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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6:21-28 2013.3.24(일) 잃은 생명, 얻은 생명

16:21-28 2013.3.24() 잃은 생명, 얻은 생명

 

예수님의 십자가로 가까이 나아가는 고난주간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달고 다닙니다. 귀걸이, 팔찌, 목걸이, 뺏지로 달고 다닙니다. 오래전에 한 여대생이 십자가를 목걸이로 걸고 다닌 것을 보았습니다. 우연히 말할 기회가 있어서 제가 말했습니다. “, 십자가는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메고 다니는 거야”. 그랬더니 그 여학생이 십자가를 뒤로 제치면서 목사님, 저도 가끔은 십자가를 메고 다녀요하고 말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무시무시한 형틀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형벌은 예수님 당시 가장 무서운 사형제도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로마제국내에서 일 년에 약 3만명 정도가 십자가에 달렸다고 합니다. 십자가는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던 사형틀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누가 죄수들을 사형시킨 교수대 밧줄을 목에 걸고 다니는 분이 있습니까? 혹시 춘향이 목을 감았던 긴 칼을 목에 매달고 다니는 분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있다면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누구나 달고 다닙니다. 달고 다닌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때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에 갔을 때였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이스라엘 북쪽 끝에 있는 헬몬산 발치에 있는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 이 질문은 우리가 평생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누구냐?”. 성경이 전체적으로 우리에게 묻는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나에게 누구며 나는 당신에게 누구입니까?”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누구며 나는 하나님에게 누구인가? 그런데 이 두 질문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관계없는 하나님이 없고 예수님과 관계없는 우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누구냐?” 그때 앞으로 썩 나와 힘있게 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하자 예수님은 매우 기뻤습니다. 덜렁거리고 따라만 다닌 줄 알았는 데 뭔가 중요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칭찬했습니다. 17, 16:17,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내가 네게 천국 열쇠를 주노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그리고 계속 말씀했습니다. 21, 16:21, “내가 이제 에루살렘에 올라가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으리라. 그러나 제삼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

 

그런데 바로 그때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사람이 또 앞으로 나오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안됩니다. 예수님이 죽다니요. 그런 일이 절대 있어서는 안됩니다”. 누군가 하고 보니 베드로였습니다. 방금까지도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찬받던 베드로였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는 이 부분을 읽을 때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뭘 좀 아는 척 하더니 역시 베드로였어”. “아이구, 입이 방정이야.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갈 것이지. 촐랑거리기는”. 그리고 한 입으로 두 말을 한 베드로의 경솔함과 무지를 탓합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한다면 우리가 만일 그 자리에 있었어도 우리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리라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는 알았지만 예수님이 죽는 것은 만류한 베드로, “예수님, 저는 예수님이 누군지 잘 압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죽어서는 안됩니다. 절대 죽지 마세요”. 이 둘 사이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이것을 아는 것과 예수님은 죽으면 안된다”. 이 둘 사이에 우리의 믿음의 간격이 있습니다. 신학적인 이유 때문일까요? 신학적으로야 당연히 예수님이 하나님이면 죽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죽으실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신학적이 아니라 우리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누구나 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은 좋은 데 예수님이 죽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죽으면 우리에게 유익이 안됩니다. 도움도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는 것은 어떻습니까? 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위해 네가 죽어라하면 어떻습니까? ”하나님,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은 믿겠는데 그를 위해 죽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냥 믿기만 하면 안되겠습니까? 믿는 것은 제가 잘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인 것을 말하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찬양도 하겠습니다. 찬양은 저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전도도 하겠습니다. 조금 어렵긴 하지만 그래서 교회 나오면 저도 기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죽는 것은 좀 어렵습니다. 아니,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요구를 꼭 저에게 하셔야 하겠습니까? 좀 편하게 예수믿으면 안되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불편한 진실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가 중요합니다. 23절입니다. 16:23,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무섭습니다. 사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부드럽고 온유하신 예수님이 베드로가 뒤로 후퇴하려고 하자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생각이 아니라 네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안 죽고 살자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 믿기만 하고 내가 죽는 것을 막는 자는 사단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졸지에 사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베드로가 말하지 못하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16:24-25,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자기를 부인하라

, 여기에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 말처럼 이해하기 어렵고 실천하기 어려운 말도 없을 것입니다. 이 말처럼 오랫동안 오해를 가져온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자기를 부정하라는 예수님은 여라 가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먼저 자기를 무시하고 학대하라는 말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너는 쓸모없는 존재이니 차라리 죽어 없어질 존재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굉장히 경건해 보이고 겸손해 보입니다. 몇 년 전 문경에서 한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정확한 사인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혹시 그가 기독교인이었다면 예수님처럼 자기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살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 부인이 아닙니다. 자살은 자기 부인이 아니라 자기 교만입니다. 자기 생의 주인을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두는 끔찍한 범죄 행위입니다. 이태리 어떤 사람이 그랬다고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너무 많은 상처를 받은 그는 어느날 죽으려고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산에 올라갔더니 이런 팻말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그 사람이 생각했습니다. “내가 왜 죽어야지?” 그래서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 죽을 용기있으면 살아야지”. 그리고 내려가는 데 또 하나의 팻말이 보입니다. 이번에도 같은 팻말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요“. 그래서 또 생각했습니다. ”내가 왜 여기 올라왔지? 죽으려고 왔지 않아?“ 그래서 바다로 뛰어 들었는 데 아직까지 안 나왔답니다. 자학과 자살은 자기 부정이 아닙니다.

 

자기 부정을 자기 육체를 괴롭히는 금욕주의의 삶으로 오해한 사람도 있습니다. 4세기에 살았던 시리아의 시므온(Simeo Stylites, A.D.309-459)이 그랬습니다. 그는 자기를 부정하기 위해 광야에 6피트 높이의 기둥을 세워놓고 평생을 그 위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자꾸 다가 오니까 기둥을 10배의 높이로 올렸습니다. 그래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30년간 그곳에 살면서 제자들이 올려준 음식을 먹고, 떨어질까봐 줄로 자신을 꽁꽁 묶고 배설물은 밧줄로 내리며 살았습니다. 교회사에 그렇게 산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생동안 거의 먹지 않고 산 사람도 있고 음식을 모래에 섞어서 먹고 산 사람도 있고 몇 년씩 서서 잔 사람도 있고 깊은 사막이나 동굴에 들어가 몇 십년간 세상을 나오지 않고 산 사람도 있습니다. 금욕주의와 고행은 주님이 가르친 자기 부정은 아닙니다.

 

또 자기 부정을 자신을 스스로 고난속으로 몰고 가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웬지 하나님께 미안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고난을 찾아 길을 나섭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부자유와 고난속에 몰아 넣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정하고 한다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큰 오해입니다. 사서 고생하는 것은 자기 부정이 아닙니다. 자신을 스스로 불행한 운명속으로 빠뜨리는 것이 자기부정이 아닙니다.

 

그러면 자기를 부정하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25절을 다시 보십시오.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여기에 목숨이란 말이 나옵니다. 목숨은 생명입니다. 우리 말로 사람에게 있는 세 가지 이 있습니다. “목숨”, “목에 붙어 있는 숨입니다. “우숨”, “위에서 오는 숨입니다. “말숨”, “말속에 있는 숨입니다. 숨은 우리 말로 생명입니다. 생명은 세 가지입니다. “목숨”, , 우리의 육체에 붙어 있고, “우숨”, 위에서 오고, “말숨말씀속에 있습니다. 참 우리 말이 좋습니다. 성경의 생명도 세 가지가 있습니다. bios(비오스)란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몸에 있는 생명입니다. 육체적 생명입니다. bio, biology란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두 번째는 psuche(푸쉬케)란 생명이 있습니다. 여기서 psycho, psychology 란 말이 나왔습니다. 푸쉬케는 우리의 혼에 있는 생명입니다. 우리의 생각, 의지, 판단을 결정하는 생명입니다. 마지막으로 zoe(조에)라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영혼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영적인 생명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 나오는 목숨은 어떤 생명입니까? “푸쉬케”, 곧 혼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버리라고 말씀하신 생명은 혼의 생명입니다. 육적인 생명을 버리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육체는 소중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걸작입니다. 육체가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또 영의 생명을 버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영의 생명을 버릴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버릴 생명은 푸쉬케”, 혼의 생명입니다. 왜 우리의 혼의 생명을 버려야 합니까? 이미 말씀드린대로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은 하나님과 관련되고 육은 세상과 관련됩니다. 그리고 혼은 가운데서 영과 육을 연결합니다. 이 혼에서 우리가 지, , 의의 인격적 활동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가정집에서 주로 많이 활동하는 곳이 거실입니다. 거실에서 우리는 가족과 만나고 식사하고 T.V보고 전화하고 이야기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대부분의 활동이 혼에서 일어납니다. 혼은 거실과 같습니다. 따라서 혼은 우리 자신입니다. 혼은 우리의 생각, 주장, 의지, 계획, 판단, 결정을 다 포함합니다. 혼이 나요 혼속에 내가 있습니다. 혼은 곧 나 자신입니다. 혼의 핵심에 내가 있고 그 나는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중심삼는 나입니다. 내 욕심, 내 야망, 내 포부, 내 욕심, 다 있습니다.

 

그래서 혼은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면서 가장 큰 원수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곧 혼속에 있는 자기 중심주의를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 자기 연민, 자기 탐익, 자기 성취, 자기 만족, 그것으로부터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자기 의로움, 다른 사람의 비난을 못 참는 것, 다른 사람의 칭찬에 목말라 있는 것, 다른 사람의 말 한 마디에 일희일비하는 것, 다른 사람과 쉽게 비교하는 것, 비교해서 조금 나으면 쉽게 교만해지고 조금 못하면 금방 비참해지는 것, 이 모든 것이 우리 속에 있는 푸쉬케”, 혼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자유해야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그래야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는다는 것, 그것이 곧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가?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자기를 부인할 수 있습니까? 모델을 보고 따라가면 됩니다. 예수님이 자기 부정의 모델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자기 부정의 일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심으로 자기 부정하셨습니다.예수님은 첫 번째로 하나님이 되실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그는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편히 먹고 잘 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석가모니는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예수님은 마굿간에 태어낫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그는 부모마저 떠나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릴 권리도 포기했습니다. 그는 평생 혼자였습니다. 예수님은 풍부하고 여유있게 살 권리도 포기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었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인정받고 존귀히 여길 권리도 포기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 사생아로 알려졌고 동네에서 귀신들린 자로 손가락질 받았으며 마지막에는 제대로 된 재판도 받지 못하고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가 마지막 포기한 것은 명예롭게 죽을 권리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으로 낙인찍혀 온 몸을 벗기우고 치욕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산 대표적인 모델입니다. 자기부인은 곧 당연한 자기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재작년 안식년때 제가 이태리의 한 미술관에 갔습니다. 이 미술관에 세계적인 작품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작품은 에케 호모라고 이태리 화가 도메니코 페티(15891624)가 그린 작품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면서 이 사람을 보라(에케 호모)” 하고 소리치자 예수님이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림입니다. 사실 그림의 내용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시는 장면은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이 유명한 것은 이 그림이 한 사람을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진젤도르프라는 사람입니다.

진젤도르프는 독일의 백작이었습니다. 그가 어릴 때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으로 교육받고 자랐지만 자라면서 많은 회의와 장애물에 부딛쳤습니다. 그에게 믿음이 있었지만 불타는 열정과 확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171919세 때 우연히 이 그림앞에 섰습니다(그림). 그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우연히 이 그림앞에 섰는 데 갑자기 그림을 보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림을 보고 있는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너를 위하여 죽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 이 음성은 놀라운 충격으로 그의 영혼안에 울려퍼졌습니다. 그러자 그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기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는 체코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이동한 모라비안 교도들을 자신의 영지인 독일 헤른후트로 오게 해 그곳에 정착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모라비안 운동을 통해 할레대학을 세우고 수많은 나라에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영국으로 간 고아원의 아버지 죠지 뮬러와 1832, 우리 나라 최초의 선교사로 온 귀츨라프(18031851)였습니다. 그리고 그 뿌리에사 요한 웨슬리가 감리교를 시작합니다. 그 모든 시작이 이 그림입니다. 빌라도앞에 침묵하신 예수님, 십자가앞에서 모든 것을 버리신 예수님,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예수님은 우리가 따를 자기 부정의 모델이요 사표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정하며 산다면 그 첫 번째가 무엇일까요? 아마 물질일 것입니다. 사람을 끝까지 붙잡고 놓치 않는 것이 물질욕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말한대로 신자가 회개하기 가장 어려운 것이 주머니 회개입니다. 말로는 모든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 교회가 뛰어넘지 못하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 기독교인의 수는 168천만 명입니다. 이 모든 기독교인의 연간 수입을 합치면 약 82천억 달러이며 이는 지구 전체 자원의 3분의 2에 해당합니다. 만일 전 세계 16억의 기독교인이 하루 1000원씩만 부담하면 전 세계 2억 고아, 3억 빈민, 6억 환자, 16백만 난민들을 다 먹일 수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교회가 안에서 쓰는 돈을 줄이고 밖으로 선교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교회가 남아서 해외선교하고 국내미자립교회 돕고 장학금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남아서 하는 것은 구제고 모자라도 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끊임없이 교회는 재정은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끊임없이 물질에 대해 자기를 부정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에 있을 때 한 한국인 의사 부부를 만났습니다. 어떻게 예루살렘에 왔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들은 부부 의사인데 아프리카에서 7년을 사역하고 돌아가는 길에 성지순례하려고 왔다고 했습니다. 70년 인생의 십일조인 7년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아프리카에 갔었노라고 말했습니다. 시간도 물질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시간, 내 물질은 없습니다. 교회든 개인이든 물질로 부터 자기를 부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우리가 자기를 부인할 것중의 또 하나가 명예욕입니다. 명예는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명예는 내가 곧 사람으로서 정당한 존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22:1절에서도 말했습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그러나 이 명예 때문에 가끔 우리는 실수하고 시험에 듭니다. 자기가 남들에게 업수이 여김받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어쩌다 누가 나에게 대하여 한 마디 하면 그것을 못 참고 뭣이 어째? 해보자는 거야?” 하고 발끈하고 나섭니다. 결국 다투고 갈라섭니다.

 

감리교의 창설자 영국의 죤 웨슬리에게 좋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웨슬리는 일생 전도하러 다니면서 많은 욕과 수모를 당했습니다. 웨슬리는 늘 그것을 주님을 위해 제자가 치루어야 할 마땅한 대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웨슬리는 며칠 동안 아무런 핍박도 고난도 없는 것입니다. 간 데마다 사람들이 전도한다고 벽돌이나 계란을 던졌는 데 며칠동안은 아무 일이 없습니다. 그때 그가 말에서 내려 땅에 엎드려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혹시 제가 죄를 짓고 타락한 것은 아닙니가? 제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보여주십시오. 왜 저를 핍박한 사람이 없습니까? 제가 주님의 제자라면 핍박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때 반대쪽 울타리에서 웨슬리의 기도를 듣고 있던 한 남자가 사나이가 웨슬리를 향하여 벽돌을 던졌습니다. 벽돌은 웨슬리를 살짝 빗나갔습니다. 그때 웨슬리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직도 제가 주님의 제자군요. 감사합니다. 주님처럼 고난받게 하셔서”. 그리고 말을 타고 길을 떠났습니다. 어떻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기분나쁘게 하고 말도 안되는 말을 하고 다닌다. 그때 여러분은 기도합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직도 제가 주님의 제자군요. 감사합니다. 주님처럼 고난받게 하셔서”. 말을 듣는 것이 정상입니까? 말 안 듣는 것이 정상입니까? 말하는 사람이 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당신의 명예를 하나님 보다 더 높힌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초대교회 주인 하나가 종의 밀고로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는 날 종을 불러 자기 인장을 끼어 주고 말했습니다. “고마워, 순교하게 해서”. 어떻습니까? 누가 우리를 모함하면 고마워. 나를 기도하게 해서”. 그렇게 말합니까? 누가 우리를 기분나쁘게 하면 고마워, 나로 기도하게 해서”. 그렇게 말합니까? 자기 부정은 자기가 누릴 마땅한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물질도 명예도 권력도 욕심도 분노도 감정도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합니다.

 

자기 부인은 생명을 살린다

그런데 자기 부정은 다만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포기하고 마는 것은 자기 부정이 아닙니다. 죽고 없어지는 것은 성경이 말한 자기 부정이 아닙니다. 다시 25절입니다.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자기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다만 죽고 끝나는 것은 불교적인 자기 부정입니다. 비우기만 하는 자기 부정은 성경적인 자기 부정이 아닙니다. “잃으면 찾습니다”. “버리면 얻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다만 허무하게 끝났다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죽음을 통해 나에게 왔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생명의 통로였습니다. 그가 죽음으로 그의 생명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자기 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부정하면 우리안에 있는 생명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다면 우리는 자기 부정을 통해 우리의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줍니다.

 

이번 주에 동영상 하나를 보았습니다. 아버지를 두 번 살린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한 아들이 병든 아버지를 두 번 살렸습니다. 한번은 간을 주어 살리고 또 한번은 신장을 주어 살렸습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영상). 어떻습니까? 이 아들은 왜 아버지에게 두 번이나 자기 장기를 주었을까요? 이미 받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가 있기 전에 이미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의 모든 장기는 본래 자기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죽게 되자 아버지의 것을 다시 아버지께 되돌려 준 것입니다. 그가 자기를 부정함으로 아버지를 살렸습니다. 심장을 주고 신장을 주면 자기가 죽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미 받은 은혜 때문에 주고 자기를 포기해서 남을 살렸습니다.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거룩한 주일,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주님을 따르기를 원합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의 삶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어 나를 살렸듯이 나도 예수님안에 죽어 세상을 살려야 합니다. 이것이 고난주간에 오신 예수님의 뜻입니다.

 

 

 

 

 

 

 

 

 

 

 

 

 

 

 

 

 

 

 

 

 

 

 

 

16:21-28 2013.3.24() 잃은 생명, 얻은 생명

 

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6:17,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내가 네게 천국 열쇠를 주노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6:21, “내가 이제 에루살렘에 올라가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으리라. 그러나 제삼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

16:23,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16:24-25,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부정의 오해

(1) 자기학대

(2) 금욕주의

(3) 자신을 고난속으로 모는 것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세 가지

(1) 목숨

(2) 우숨

(3) 말숨

 

세 가지 생명

(1) bios(비오스): 육체의 생명

(2) psuche(푸쉬케): 혼의 생명

(3) zoe(조에): 영의 생명

 

어떻게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가?

(1) 예수님의 모델

 

이 사람을 보라(에케 호모)” (그림)

 

찬송 311,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2) 물질

 

(3) 명예욕

 

자기 부인은 생명을 살린다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