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1:17-27,38-44 2013.3.31(일)
부활, 생명의 승리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신 날입니다. 여러분은 부활을 믿습니까? 미국에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한 미식축구선수가 있었는 데 능력도 없고 게을러 감독이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벤취에 앉아 있었는 데 어느날은 감독에게 와서 이번 경기는 자기가 꼭 나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나중에 이야기해 주겠다고 합니다. 드디어 경기를 시작되었는 데 경기가 잘 안풀립니다. 그래서 감독이 이래 지나 저래 지나 마찬가지다 싶어 이 선수를 투입했습니다. 그런데 이 선수가 들어간 다음부터 경기가 역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경기장을 종횡무진 휩쓸면서 점수를 올립니다. 경기후에 감독이 깜짝놀라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선수가 말했습니다. “며칠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감독님도 아시잖아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아버지는 장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내가 네가 경기하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해서 마음이 미안하구나. 이제 내가 하늘나라 가면 눈을 뜰 것인데 내가 반드시 네 경기하는 것을 보고 응원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아버지가 하늘나라에서 저를 보고 계시다는 것을 너무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경기를 잘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부활의 세계가 있다고 믿습니까? 사람이 사는 세상이 이생뿐이라고 믿는 사람과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천국에 가서 부활의 삶을 산다고 믿는 사람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아버지가 죽으면 끝난다고 믿는 사람과 아버지가 죽어 지금 나를 보고 있다고 믿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내가 여기서 부활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 천국에서 누리는 미래의 부활도 중요하지만 지금 내가 예수님을 믿어 지금 여기서 부활의 삶을 산다면 나는 얼마나 대단한 존재입니까? 이 아침 이 영광스럽고 위대한 부활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오늘 말씀을 나사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베다니의 삼남매,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를 사랑했습니다. 부모 없이 사는 이들을 보고 예수님은 측은히 여겨 자주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이 또 전해졌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이 황당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소식을 듣고 베다니로 서둘러 떠났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장례식이 끝난 뒤였습니다. 이때 마르다가 예수님을 보고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합니다. 요11:21,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여러분은 마르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부모 없이 오빠 하나 믿고 살아온 동생이 얼마나 오빠의 죽음이 안타까워했으면 예수님께 그렇게 말했겠습니까?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저는 이런 질문을 하곤 합니다. 왜 예수님은 그토록 사랑했던 나사로의 죽음을 막지 못하는가? 분명히 성경은 예수님은 나사로를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요11:5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예수님이 나사로를 사랑했다는 말은 요11장에 두 번 더 나옵니다. 그런데 그 사랑한 사람이 병들었습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미쳐 병문안할 기회도 없이 죽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사랑한 사람은 병도 들지 말고 죽지도 말아야 합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나사로가 병들었어도 금방 고쳐줘야 하고 죽지도 말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사로는 예수님이 손 쓸 겨를도 없고 병들고 죽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병들지 않고 예수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병들고 예수님이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죽는다는 말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합니까?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신 데 우리를 아예 병들게 하지 못하는가? 우리 가운데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예수님이 능력이 많은 데 왜 그렇게 잘 믿는 우리 어머니를, 우리 아버지를 죽지 않게 못하는가?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한번도 병들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믿는 우리가 한번도 죽지 않고 계속 산다고 약속한 적도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반드시 한번은 반드시 죽는다고 말합니다. 창3:19입니다.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인간의 죽음은 육체의 자연적 한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죄 때문에 옵니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생명을 단절시킵니다. 마치 낫으로 나무 가지를 치면 가지가 땅에 떨어져 얼마동안 푸릇 푸릇 하다가 시드는 것과 같이 나무 뿌리로부터 진액을 공급받지 못하니까 시들 시들하다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발견하는 진리는 이것입니다.
죽어야 부활합니다.
부활은 죽음과 상관없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야 살고 죽어야 부활합니다. 부활은 죽음을 초월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통과해야 일어납니다. 그래서 죽지 않고 오래 사는 불노장생은 부활이 아닙니다. 죽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도 없습니다.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도 부활이 아닙니다. 오래 전 서울의 모 교회에서 한 여자 성도가 간증했습니다. 자기는 죽어 냉동고에 들어간 후 얼마있다가 부활했다고. 그래서 신문들이 대서특필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기자가 집요하게 추적해본 결과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 여자는 실신한 상태로 잠시 기절해 있었습니다. 기절했다 깨어난 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완전히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톨스토이의 “부활”도 부활이 아닙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은 돈많은 귀족 네플류도프가 자기로 인해 타락하여 창녀가 된 카츄샤를 갱생시킨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제목은 “부활”이지만 그것은 성경적 부활이 아닙니다. 이것은 도덕적 갱생일 수 있고 인간적 재생일 수 있지만 부활은 아닙니다.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나야 부활입니다.
예수님도 죽었다 살아났습니다. 성경대로 죽었고 무덤에 장사되었고 사흘동안 죽음가운데 있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3일동안 음부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육체가 죽어 몸으로 부활했습니다. 지금도 하늘나라에 계시는 주님은 완전히 죽었다 완전히 부활했습니다. 계5:6절에서 사도 요한이 환상을 보았습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 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모든 천사와 생물들과 장로들은 죽임당한 어린양을 찬양합니다. 계5:12,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죽었기 때문이고 지금도 살아 계신 것은 일찍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안이숙 여사가 쓴 소설이 있습니다. “당신은 죽어요. 그런데 안 죽어요”.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부활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죽음을 비켜가는 옛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통과하는 새 생명입니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것을 이상하게 보지 마십시오. 죽어야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죽음에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나사로는 깊은 동굴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무덤은 동굴의 돌을 깍아서 만듭니다(그림1). 이스라엘은 전체적으로 돌로 된 나라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돌중에서 석회암이 가장 많습니다. 석회암은 색깔도 하얗고 잘 부숴집니다. 학자들은 이 돌들이 과거에 바다속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잘 부숴집니다.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잘 부숴집니다. 기술자 하나가 만일 마음먹고 파면 며칠만에 무덤 몇 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저도 손으로 많이 만졌습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돌이 파입니다. 볼펜으로 툭툭치면 부서집니다. 그렇게 정교하게 깍아 들어가면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무덤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무덤에 짐승이 시신을 물어가지 못하도록 큰 돌로 막아놓습니다.
여러분, 죽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꽁꽁 묶여 있는 것입니다. 어두운 동굴에 꽁꽁 묶여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신을 끈으로 단단히 묶습니다. 그리고 무덤을 열고 거기에 둡니다. 삼겹, 사겹으로 사정없이 묶었기 때문에 누구도 끈을 풀 수 없고 설령 다시 살아나 끈을 푼다 해도 무거운 돌을 굴릴 수 없습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묶이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보십시오. 죽음의 그늘이 생전의 나사로를 묶었습니다. 가난으로 묶었습니다. 질병으로 묶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죽음 자신이 나사로를 묶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덤에 가까이 갔습니다. 그라고 첫 번째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39절, 요11:39, “돌을 옮겨놓으라”. 돌을 옮겨놓게 하는 일입니다. “고랄”이라고 부르는 육중한 무덤 문을 옮겨놓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낑낑거리고 무덤문을 옮기자 나사로의 시신이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죽은 지 이미 3일이 되어 냄새는 코를 찔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43절, 요11:43, “나사로야, 나오라”. 그때였습니다. 단단히 끈으로 묶여 있던 나사로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몸은 베로 동이고 얼굴은 수건에 쌓여 있었습니다. 죽음은 무엇이고 부활은 무엇입니까? 죽음은 묶여 있는 것이고 부활은 풀리는 것입니다. 죽음은 동굴속에 갇혀 있는 것이고 부활은 동굴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동굴속에 갇혀 있던 나사로를 풀러 밖으로 나오게 했습니까? 왜 죽음은 동굴안에 있고 부활은 동굴밖으로 나오는 것입니까?
부활 생명의 신비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살아 있는 것은 절대 갇혀 있지 않습니다. 갇혀 있는 것은 죽은 것이고 죽은 것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살아 있고 움직이기 때문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관하여 사도 바울이 말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했습니다. 고전15:20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첫 열매”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첫 열매”란 이스라엘의 초실절이라는 절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긴 겨울이 지나 봄이 되면 이스리엘의 들에 싹이 나오고 싹이 자라면 열매를 맺습니다. 그때 처음 나는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는 절기가 초실절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초실절이 언제냐 하는 것입니다. 초실절은 유월절이 지난 첫 번째 안식일 다음날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지난 첫 번째 안식일 다음 날이 되면 아침 일찍 유월절에 묶어 두었던 보릿단을 자르러 보리밭으로 갑니다(그림2). 초실절은 보리를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입니다. 초실절은 보리를 드리고 맥추절은 밀을 드립니다. 사람들은 첫 번째 보릿단을 낫으로 베고 그 보릿단을 가지고 성전 뜰로 갑니다. 그리고 그 보릿단을 번제단에 서서 지성소가 있는 서쪽을 향해 흔든 다음 탈곡합니다. 성경에 기록한대로 입니다. 레23:10-11,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울 때에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그렇게 해서 탈곡하면 그것을 클라욧이라고 부르는 프라이팬에 넣어 볶습니다. 볶은 뒤 다시 맷돌로 껍질을 벗겨낸 맷돌로 갑니다. 그러면 무려 13단계를 거쳐 보리는 고운 가루가 됩니다. 이 고운 가루를 하나님께 드립니다(그림3). 이것을 성경은 “소제”라고 부릅니다. 작을 “소”자가 아니라 흴 “소”입니다. 흰 가루, 고운 가루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첫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 예수님의 부활시간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첫 열매를 거두는 때는 유월절이 지난 첫 번째 안식일 다음 날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돌아가시고 돌아가신 첫 번째 안식일 다음날, 우리로 말하면 주일날 부활하셨습니다. 놀랍게도 4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이 안식일 다음날 부활했다고 말합니다. 마28: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막16: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눅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요20: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예수님은 유월절에 죽으시고 안식일에 무덤에 계시다가 안식후 첫날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지난 첫 번째 안식일 다음날 들에 나가 첫 곡식인 보리를 수확하여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냥 드린 것이 아니라 후라이 팬에 볶고 맷돌로 갈아 고운 가루를 만들어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것을 보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합니다. 다시 고전15:20을 볼까요?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부활이 추상적인 이론이 아닌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부활은 무생명적 기적사건이 아닙니다. 사건이라면 생명적 사건이요 살아 있는 것의 당연한 자기 존재선언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죽은 것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죽은 것과 산 것의 차이는 죽은 것은 천년이 지나도 그대로 있지만 산 것은 때가 되면 반드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정덕연 집사는 신구대학에서 식물을 연구하는 분입니다. 그가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올린 사진을 보면 살아있는 생명은 반드시 소생한다는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그림4). 이 그림들을 보실까요? 겨우내 얼었던 땅에 있던 솔방울에서 생명의 싹이 나는 장면입니다. 땅에서 싹이 나는 잣입니다. 도토리에서 싹이 납니다. 가시연에서 예쁜 꽃이 피어 옵니다. 봄철마다 피어나는 생명들이 있습니다. 꽃다지입니다. 할미꽃입니다. 깽깽이 풀입니다. 금낭화입니다. 이것들은 사실 작은 것들입니다. 흙은 두텁고 무겁습니다. 아마 자기 몸의 수천배, 수만배 무게일 것입니다. 그런데 기어히 뚫고 나옵니다. 흙은 그대로 있습니다. 옆에 있는 돌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돌보다 연약한 할미꽃은 솟아 납니다. 너무 작아 사람이 한번 밟으면 죽을 것 같은 금낭화는 뾰족이 고개를 쳐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은 반드시 소생합니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것은 예수님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생명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쪽에서는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고 우리 입장에서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었기 때문이듯이 우리가 부활할 이유도 우리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도표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 나 부활
태초부터 있는 생명 나타난 생명 깨어진 생명 생명의 씨 생명의 열매
자, 하나님안에 태초부터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이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나타났습니다. 그 생명이 십자가를 통해 깨뜨려져 우리안에서 생명의 씨로 떨어졌습니다. 그 씨는 비록 작은 것이지만 생명의 모든 유전인자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라고 성장합니다. 그러면 때가 되어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가 첫 열매, 곧 부활의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우리가 죽으나 사나 우리안에 있습니다. 그 생명 때문에 우리가 죽어도 천국에 가고 그 생명 때문에 우리가 살 때 능력을 공급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도 그 생명이 있습니까? 부활이 먼저가 아니라 생명이 먼저입니다. 부활하기 때문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기 때문에 부활합니다. 그러나 순서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먼저고 우리가 다음입니다. 고전15:23절입니다.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예수님이 첫 열매요 우리가 다음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에 우리가 붙어 있기만 하면 우리는 반드시 부활합니다. 생명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나깨나 붙들 말씀이 있습니다. 요일5:13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주제의 말씀입니다. 우리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립니다. 만일 생명이 있기만 하면 우리는 언제나 부활합니다. 여러분안에 생명이 있습니까? 본래 하나님안에 있다가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온 생명, 십자가를 통해 꺠어져 나에게도 떨어진 생명, 그 생명이 있는 한 우리는 부활합니다.
부활은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은 생명을 얻는 것이면서 또한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천국에 가서 누릴 미래적 생명이면서 동시에 지금 여기서 누릴 현재적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나사로의 동생 마르다에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눈물흘리고 슬퍼하는 마르다를 위로하며 “네 오라비가 살리라” 했습니다. 그때 마르다가 말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때는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요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는 부활을 미래형으로 말하고 예수님은 현재형으로 말합니다. 마르다는 죽은 다음의 부활을 말하고 예수님은 살아서 누리는 부활을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앞에서 본 할미꽃, 도토리, 금낭화가 싹이 나고 꽃이 필 때만 살아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미 땅속에서 있을 때도 살아 있습니다. 땅속에 살아 있기 때문에 땅위로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살아 있기 때문에 미래도 사는 것이지 지금 죽어 있으면 미래도 소망도 없습니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온 후 어떻게 살았을까요? 성경은 부활한 나사로의 삶에 대하여 침묵합니다. 아마도 나사로는 부활한 후에 더 잘 살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얻은 생명입니까? 예수님도 더 잘 따르고 동생들에게도 더 잘하고 이웃들에게도 더 칭찬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의 이야기를 성경이 기록하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주는 무언의 메시지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로 나사로라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어떻게 살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나사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나사로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먼저 운명주의, 허무주의, 패배주의를 거절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부활신앙에 역행하는 세 가지 사조가 있습니다. 운명주의입니다. 운명주의는 세상은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운명에 의해 움직인다고 믿는 생각입니다. 헬라 철학이 운명주의요 이슬람교, 불교. 동양종교, 사주, 작명, 관상이 운명주의입니다. 부활신앙은 운명주의의 동굴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운명주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섭리주의를 믿습니다. 허무주의는 한번 죽으면 끝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너무 마음두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불교가 그렇고 철학이 그렇고 현대인들이 대부분 이 생각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현대 지성인들이 자살로 인생을 마쳤습니다. 우리는 허무주의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천국을 믿고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믿습니다. 패배주의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안됩니까? 성경에 어디 안된다고 말합니까? 우리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7귀신 들린 여자였습니다. 그는 누가 봐도 인생을 포기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 한번도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전도자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인생을 포기할 뻔 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바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다시 인생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기둥이 되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부터 오늘까지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고난받고 핍박받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지하 동굴에서 300년간 죽은 성도가 무려 600만이 되지만 그들 가운데 자살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맹수에게 물리고 칼에 찔려도 그들은 찬양을 부르며 죽었습니다. 부활신앙 때문입니다.
100년전에 이집트 선교사로 죽은 미국 청년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윌리엄 보든이라는 선교사입니다(그림5). 그는 에일대학과 프린스턴을 나온 수재였지만 어느날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집트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열정적으로 선교하던 어느날 갑자기 척수막염이라는 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 그가 죽은 후에 일기장 하나가 남았는 데 그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내 평생 남김없이(no reserves), 후퇴없이(no retreats), 후회없이(no regrets) 하나님만 따르기를 원하노라”(윌리엄 보든). 저도 이 말을 제 책상에 붙였습니다. 그리고 사명감이 식을 때마다 이 말을 묵상하고 또 묵상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의 부와 학위와 명예를 다 버리고 남김없이, 후퇴없이, 후회없이 25년의 짧은 생을 하나님께 드렸던 보든은 진정 부활의 사람이었습니다.
어찌 보든뿐이겠습니까? 부활의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가두는 어떤 종류의 운명주의, 자신의 생명을 죽이는 어떤 모양의 허무주의, 자기 생명을 묶는 어떤 형태의 패배주의를 거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동굴을 향해 소리쳐야 합니다. “돌을 옮겨놓으라. 그리고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부활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삶이 희생입니다. 희생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이 없지만 희생의 진정한 의미를 알면 희생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희생은 손해보는 삶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부활의 생명을 밖으로 흘려보내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듯이 우리도 희생과 섬김을 통해 우리안에 있는 부활의 생명을 밖으로 흘려 보내야 합니다.
여주에 가면 기독교 교도소인 소망교도소가 있습니다. 약 300여명 수용합니다. 최근이곳에서 교도관으로 일하다 돌아가신 한 장로님 이야기를 듣고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름은 이상춘 장로님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여러 교도소에서 교도관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몸이 안좋아서 병원에 갔는 데 뜻밖에 간암 말기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요양을 권했지만 장로님은 지금까지는 나를 위해 살았으나 이제는 마지막으로 이웃을 위해 살 때라면서 퇴직 후 자원봉사자로 매일 여주교도소로 출근했습니다. 암을 걱정하고 낙망하며 살기보다는 재소자 전도에 남은 시간을 전념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 결과 3개월밖에 못산다는 분이 5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암도 감사합니다”, “암이라서 더욱 감사합니다”하며 살았습니다. 얼마나 청빈하게 살았든지 어느날 자기 집에 도둑이 들었는 데 도둑이 이것 저것 다 뒤졌지만 가져갈 것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집에 와 이 사실을 안 장로님이 한 마디 했습니다. “뭘 가져갈 게 있어야지. 그 도둑에게 미안하네.”. 말기 암환자로 언제나 웃으며 죄수들을 돌본 장로님, 그가 죽은 날 모든 죄수들이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생명을 1년 줄여 우리 장로님에게 주세요”.
부활의 삶을 통해 희생하며 산 장로님의 삶은 손해만 본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자기를 죽여 예수님의 생명을 흘려 보내자 수많은 죄수들이 예수믿고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상춘 장로님은 우리 모두가 닮아야 할 우리의 좌표, 저는 우리 교회 장로님들이, 집사님들이, 성도들이, 한국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장로님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를 살렸습니다.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안에 예수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지금 우리를 부활의 사람으로 일어나게 합니다. “돌을 옮겨놓으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요11:17-27,38-44 2013.3.31(일)
부활, 생명의 승리
요11:21,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창3:19,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죽어야 부활합니다.
계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 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계5:12,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생명은 죽음에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무덤(그림1).
요11:39, “돌을 옮겨놓으라”.
요11:43, “나사로야, 나오라”.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보리(그림2).
레23:10-11,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울 때에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고운 가루(그림3).
마28: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막16: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눅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요20: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생명의 소생 (그림4-솔방울, 잣, 도토리, 가시연, 꽃다지, 할미꽃, 깽깽이 풀, 금낭화)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 나 부활
태초부터 있는 생명 나타난 생명 깨어진 생명 생명의 씨 생명의 열매
고전15:23,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요일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부활은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요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 운명주의, 허무주의, 패배주의를 거절하라
윌리엄 보든(그림5).
“나는 내 평생 남김없이(no reserves), 후퇴없이(no retreats), 후회없이(no regrets) 하나님만 따르기를 원하노라”
2) 희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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