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20:19-23 2013.4.7(일)
생명의 성령님, 나를 보내소서
부활절이 지난 첫 번째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한 주간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미국에 아주 열심히 사는 맥스라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는 평생 양복 재단사로 45년을 살아 왔는 데 요즘 들어 하루 하루 사는 것이 따분하고 힘듭니다. 어떻게 삶을 좀 확 바꿀 수 없을까 생각하고 있는 데 어느날 기회가 왔습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1달러짜리 복권을 샀는 데 놀랍게도 백만불 짜리 복권에 당첨된 것입니다. 너무 너무 좋아서 수표를 가지고 집으로 왔는 데 아내가 말합니다. “여보, 평생 당신은 뼈빠지게 일만 했잖아요. 하나님이 당신 이제 좀 즐기며 살라고 돈을 준 것 같아요. 양복도 좋은 것으로 사 입으시고, 마사지도 받으시고 그리고 당신 턱이 좀 나왔으니 성형수술도 하세요”.
착한 맥스는 아내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왕처럼 누어서 마사지도 받고 비싼 양복도 한 벌 사입고 길게 나온 턱도 과감하게 수술했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맥스는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펴고 길을 건넜습니다. “아, 이게 사는 것이구나. 드디어 내 세상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마침 자동차 한 대가 오더니 맥스를 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맥스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천국으로 갔는 데 맥스가 하나님앞에 서자 불평이 절로 나왔습니다. “하나님, 어쩌면 이럴 수 있습니까? 한 평생을 착하게 살다가 돈이 좀 생겨 이제 좀 살만하다 했는 데 저를 천국에 데려오시다니. 이럴 수 있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머리를 만지시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맥스야, 미안하다. 솔직히 내가 너를 알아보지 못했단다”.
맥스가 너무 좋은 옷을 입고 성형수술까지 해서 하나님도 몰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가운데 혹시 하나님도 몰라 볼 만큼 고치신 분은 없습니까? 꼭 맥스처럼은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도 가끔은 변신하고 싶습니다. 다람쥐 체바뀌처럼 사는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한 백만 불쯤 생긴다면 때빼고 광내고 얼굴도 바꾸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습니다. 믿음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절 이후, 우리는 조금 멋진 삶을 살아보고 싶습니다. 뭔가 폼나게, 뭔가 신나게, 남들 사는 것처럼 한번 살아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도 그런 생각을 하실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믿음안에서 뭔가 다르기 살기를 원하십니다. 부활절 이전과 이후는 분명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부활절 이후를 멋지게 살 수 있을까요?
두려워 하지 말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고 첫 번째 하신 말씀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요20:19,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여기에서 "문을 닫았다"는 말은 헬라어로는 "크레이오"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문을 닫았다는 뜻이 아니라 문을 꽁꽁 걸어 잠근 것을 말합니다. 이중 삼중으로 문을 잠그고 거기 숨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왜 제자들은 그렇게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던 것일까요? 유대인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에게 발각되면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체포되고 처형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나타난 제자들이 누구입니까? 2천년전 예수님의 제자만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평화를 주셨다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고난 주간 새벽기도를 통하여 십자가는 우리를 건지시고 이기게 하시고 자유케 하시고 거룩케 하시고 승리케 하셨다고도 들었습니다. 지난 주일, 부활절때는 부활은 생명의 승리라고, 살아 있는 생명은 결코 갇혀 있을 수 없고, 땅속에 숨어 있을 수 없다고. 생명은 반드시 살아 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맞다. 우리는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두려움이 부활절 지나자 또 생겨납니다.
새벽기도때 한 성도가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집이 팔려야 하는 데 안 팔려요. 그것 때문에 이자와 부채로 너무 힘들어요”. 금요 기도회때는 “목사님, 우리 아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사춘기인데 이상한 행동을 해요. 아무리 타일러도 안 들어요”. 거기다 이번 주에는 북한이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전쟁을 위협하는 발언들을 쏟아내면서 우리의 두려움은 날로 더 커지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두렵습니까? 두려움은 왜 생기며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이겨야 되는 것일까요? 두려움의 특징은 사람이 두려워 하는 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빅터 프랑클의 말입니다. “두려움은 실제로 두려워하는 그것을 초래한다”. 이것을 그는 “두려움의 사이클”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로 두려워합니다. 그러면 그 두려움이 우리에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러면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실제 어떤 일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무기력을 낳고 무기력은 무능을 낳습니다. 무능은 또 다른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또 다른 무기력을 낳습니다. 두려움의 악순환이 일어납니다. 두려움은 믿는 사람에게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에게도, 그리고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사는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이 땅에 사는 한 두려움 자체를 없애는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두려움을 이길 방법도 없는 것일까요? 있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이 두려워 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성령이었습니다. 22절입니다.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환경을 바꿔 주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른 방법으로 그들의 두려움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누구입니까? 성경은 성령을 크게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주로 구약에서 말하고 그리스도의 영은 주로 신약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창조의 사역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입니다.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곳에 있을 때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구원의 사역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입니다.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누구든지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성령님이 도움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합쳐 성령은 “생명의 영”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구약 신약
창조의 영 구원의 영
생명의 영
생명의 영이신 우리안에 끊임없이 생명을 일으키고 성장시킵니다. 생명의 성령은 끊임없이 우리안에서 생명의 일을 계속합니다. 크게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첫째는 죄를 사하고 둘째는 우리를 살립니다. 같은 성령이 한편으로는 죄를 사하고 또 한편으로는 살리는 일을 합니다. 용서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살리는 일도 중요합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이미 받은 생명을 계속 살려내는 일을 합니다.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롬8:11, “너희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벧전3:18,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신앙고백 제3조에도 성령을 “살리는 자”, “다스리며 다시 살리는 자”라고 부릅니다. 성령은 살리는 영이요 생명의 영입니다. 성경은 살리는 이 성령의 일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은유를 사용합니다.
첫째. 바람입니다.
다시 22절을 보시면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은 성령을 “숨을 내쉬며” 주셨습니다. 숨과 성령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숨입니다. 구약에서 성령을 의미하는 “루아흐”는 숨입니다. 호흡입니다. 바람입니다. 구약에 “루아흐”란 말이 380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님도 성령을 바람과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요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왜 성령은 바람과 같을까요? 이스라엘의 지리적 환경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비입니다. 매년 4월부터 10월까지 그야말로 비한방울 오지 않다가 10월 말경, 바람과 함께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비는 서편, 지중해 쪽에서 부는 바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바람은 시원한 바람, 뼈속까지 시원한 바람입니다. 그 바람이 살랑 살랑 불면 사람들은 압니다. “아, 비가 오려나 보다”. 과연 며칠 지나면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반가운 빗소리 들려 산천이 춤이 추네. 봄비로 내리는 성령 내게도 주옵소서”. 찬송가 172장3절은 이렇게 쓰여졌습니다. 사람은 비가 와야 삽니다. 그런데 비가 오기 전에 바람이 붑니다. 비가 먼저 온 것이 아니라 바람이 먼저 붑니다. 바람이 불면 비가 옵니다.
레너드 스위트라는 영성학자가 국민일보에 칼럼을 썻습니다. “성령의 바람을 타는 교회”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무가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나무를 움직인다“. 바람부는 날, 우리가 밖을 보면 나무가 움직입니다. 보이는 것은 나무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우리는 ”나무가 움직이는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나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나무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스스로 움직이는 나무는 없습니다. 나무는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바람에 의해 움직입니다. 나무가 먼저가 아니라 바람이 먼저입니다. 영적 생활의 모든 것은 성령으로 시작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나무가 움직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사람이 움직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교회가 움직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의 심령이 움직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마른 뼈 해골도 움직입니다.
그래서 영적 생활은 오래 기다려야 합니다. 내가 나를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성령님이 나를 움직이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팀 켈러라는 목사님이 쓴 책을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날 그가 목회하던 교회에서 한 여자 성도가 간증을 했습니다. 그녀는 여러 해동안 하나님께 실망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봉사도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한다고 생각했는 데 어느날부터 하나님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가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침묵, 하나님의 부재를 더 많이 느낍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가깝다고 느꼈던 하나님이 어느날 저 멀리 사라지고 나만 혼자 있는 느낌입니다. 기도해도 기도가 되지 않고 예배를 드려도 감동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여기저기 필사적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훈련이란 훈련은 다 받았습니다. 그렇게 노력했는 데도 하나님은 만날 수 없었습니다.
거의 미치다 싶이 헤매던 어느날 한 성도가 보기가 딱해 이렇게 충고해 주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찾아서 안되었으면 하나님쪽에서 당신을 찾도록 하면 어때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그는 그동안 자기가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마치 숨어 있는 하나님을 형사처럼 추적하면서 집요하게 하나님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랬는데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욥23:8-10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의 이야기였습니다. 욥이 누구입니까? 욥이 기도를 안하는 사람입니까? 믿음이 없습니까? 착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어느날 하나님이 그에게 사라졌습니다. 앞에 가도 안 계시고 뒤에 가도 안 계시고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찾아도 안 계시는 하나님, 그런데 그가 그 칠흙같은 고난가운데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아, 하나님의 때가 있구나. 하나님이 정하신 단련의 기간이 있구나. 하나님이 나에게 멀리 계신 그것까지가 단련의 때구나. 그 기간이 끝나면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겠지. 그 기간 동안 내가 할 일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는거다“. 그러면서 마음을 평안히 가졌습니다. 어디를 갔다 왔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묵묵히 앉아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렸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은 욥을 찾았고 욥은 그 전보다 갑절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바람이 불어야 나무가 움직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퇴보할 수 있고 침체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영성가들은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밤에 우리가 할 일은 요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앞서지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아랍속담이 있습니다. “내 가슴에 불을 붙여 주세요. 그러면 당신에게 빛을 비춰주겠습니다“(Give me a fire and I will give you light). 먼저 불이 붙고 나중에 빛을 비춥니다. 성령은 바람입니다. 성령의 바람은 우리를 살립니다.
둘째. 어머니입니다.
살리는 성령님의 두 번째 은유가 어머니입니다. 성령은 바람이면서 또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생명을 잉태한 자입니다. 구약에서 성령에 대하여 쓰는 말과 어머니에 대해 쓰는 말과 같습니다. 성령을 “루아흐 하야”라고 하는 데 어머니도 “루아흐 하야”라고 합니다. 다같이 “살아 있는 영, 생령, 생명”이란 뜻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낳습니다. 성령님도 자녀를 낳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기릅니다. 성령님도 말씀으로 자녀를 기릅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돌봅니다. 성령님도 자녀를 돌봅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릅니다. “보혜사”란 말은 “파라크레토스”, 곧 “파라”, “옆에”, “크레토스”, “부른다”, “옆에서 부르는 자”, “옆에 있는 자”란 뜻입니다. 성령님은 어머니처럼 늘 자식들 옆에 있습니다. 옆에서 말하고 옆에서 위로하고 옆에서 도와주고 옆에서 먹이고 옆에서 지켜줍니다. 신학교 다닐 때 늦게 신학을 한 집사님이 간증한 것이 기억납니다. 그는 결혼한 지 10년만에 아내를 잃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너무 너무 슬픈 나머지 며칠 밤을 지새워 거리로 쏘다녔습니다. 어느날 아침이 밝았을 때 비로소 정신이 들었는 데 눈을 뜨고 보니 강가였습니다. 조금만 더 걸어갔더라면 그는 죽을 뻔했습니다. 그때 그가 뒤돌아섰는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어머니가 서 계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고통을 알고 아들을 위해 밤새 아들을 따라 다닌 것입니다. 아들이 거리로 가면 거리로, 아들이 술집에 가면 술집밖에서, 아들이 강으로 가면 강까지 따라온 것입니다. 이 분이 성령님입니다. 요14:1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성령님은 어머니처럼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합니다. 함께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요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함께 거하고 속에 계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어머니 신입니다.
성령님은 살리는 어머니의 영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자주 어머니로 표현합니다. 어머니의 모태, 자궁, 어머니의 가슴, 피난처처럼 품어주는 어미새의 날개, 새끼를 품은 제비의 보금자리, 해산, 젖가슴,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것이 어머니입니다. 사66:10-13,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 이것이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이 분이 성령님입니다. 성령은 어머니처럼 우리를 살립니다.
셋째. 물입니다.
성령의 살리는 일은 마치 물과 같습니다. 매년 10월, 장막절이 오면 이스라엘에 비가 내립니다. 비가 내리면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한편으로 더위가 물러갑니다. 온갖 먼지와 오물과 쓰레기가 사라집니다. 이것들이 빗물에 휩쓸려 사해바다로 들어갑니다. 깨끗해집니다. 그 뿐만 아니라 닙니다. 비가 오면 파란 싹이 돋아납니다. 여름에 아무 것도 없는 민둥산에 파란 풀이 솟아납니다(사진). 비가 오면 묵은 땅을 기경하여 곡식을 심습니다. 그래서 심는 것이 보리입니다. 비가 오면 온갖 나무들이 생기를 얻고 산천이 춤을 춥니다. 비는 곧 성령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 비가 오면 죽은 것은 사라지고 생명이 솟아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물, 생수, 샘으로 비유합니다. 렘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 하나님은 생수입니다. 시36:10, “진실로 생명의 샘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샘, 생명의 원천입니다. 그 샘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에게 하늘의 물을 부어 줍니다. 물과 관련하여 중요한 표현이 세 가지입니다. “부어준다”. “가득차게 한다”. “흘러 넘친다”. 여러분은 생명의 원천이신 성령님이 여러분에게 생명의 물을 부어주심을 믿습니까? 행2:33절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부어주셨다”. 성령을 물로 비유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말하자면 살리는 물입니다. 하나님은 그 물을 하늘에서 쏟아 부어 주십니다. 마치 노아시대 하늘에서 홍수가 쏟아진 것과 같습니다. 창8:2,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얼마나 비가 쏟아졌든지 큰 깊음의 샘이 터지고 하늘의 창이 열려 40일 주야를 비가 왔습니다. 성령님도 우리에게 그렇게 쏟아부어 주십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그렇게 임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안에 성령의 생수가 가득 찹니다. 우리 심령의 그릇에 가득 담겨 찰랑 찰랑 넘칩니다. 이사야가 말한 바와 같습니다. 사58: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물댄 동산과 같고 물이 끊어지 아니한 샘과 같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충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넘칩니다. 요7:38,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성경의 좋은 표현이 “넘친다”는 표현입니다. 엡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롬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넘칩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안에 넘칩니다. 간신히 예수믿지 않습니다. 주일날 겨우 나오는 신앙이 아닙니다. 넘칩니다. 넘쳐 흐릅니다. 여러분, 성령이 이렇게 물처럼 우리에게 부어져 우리안에 가득하고 그 결과 밖으로 흘러 넘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성령님은 생수입니다. 물입니다. 예숭님은 부활후 이 성령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21절. 요20:21,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주신 예수님은 제자들은 그 자리에 있게 하지 않고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으로 보내노라”. 우리 같으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할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아무개야, 세상이 악하다. 그러니 세상으로 가지 말고 나와 함께 있자”.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습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교회만이 천국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어디나 천국이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신 곳은 어디나 내 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교회로 보냈지만 교회에 살라고 교회 보내신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가라고 교회로 보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세상으로 갑니다. 교회는 우리가 머물 정착지가 아니라 통과할 경유지입니다. 한 주간 동안 우리는 세상에 살다가 교회로 왔지만 예배후 우리는 교회를 통해 세상으로 갑니다. 교회에 있으면 안전하겠지만 우리는 안전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삽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가기 전에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가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서 가는 것과 내가 알아서 가는 것은 다릅니다. 주부 여러분, 여러분이 사는 가정은 하나님이 보내신 곳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루 하루 사는 것이 힘들 때가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곳에 보냈다면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직장인 여러분, 왜 하필 내가 여기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까? 힙든 직장을 그만 두고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고 싶을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곳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낸 곳이라면 어떨까요? 무엇인가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뜻이 있지 않습니까? 꼭 외국으로 가야만 선교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파송받고 예수님과 함께 가는 사람은 누구나 선교사요 그가 가는 곳은 어디나 선교지입니다. 미국의 한 교회 주차장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주차장을 떠나는 당신, 당신이 지금 가는 곳은 선교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또 세상으로 보냅니다. 우리가 살고 일하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보낸 곳입니다.
또 하나 기억합시다. 주님이 우리를 그냥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나님은 우리를 성령님과 함께 보냈다는 것. 성령은 생명의 영이라는 것.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믿어 얻은 생명을 바람처럼, 어머니처럼, 물처럼 살리고 계시다는 것을. 그 성령 때문에 결국 우리는 승리하리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 성령님 때문에 우리의 생명 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맺힐 것이라는 것을. 그 결과 우리가 1월 첫주에 꿈꾸었던 중국여인이 심은 사막의 나무처럼 우리 모두에게 크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자라고, 온갖 나무들이 서로 어울어져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생명의 숲이 우리 개인과 교회와 민족의 역사에 이루어지리라는 꿈을 우리는 꿈니다. 그 꿈을 저는 호세아의 꿈으로 대신 말하고 싶습니다. 호14:5-7,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찌라 저희는 곡식 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생명의 성령님이 영원히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요20:19-23 2013.4.7(일)
생명의 성령님, 나를 보내소서
두려워 하지 말라
요20:19,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성령을 받으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구약 신약
창조의 영 구원의 영
생명의 영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롬8:11, “너희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벧전3:18,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첫째. 바람입니다.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나무가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나무를 움직인다“(레너드 스위트).
욥23:8-10,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내 가슴에 불을 붙여 주세요. 그러면 당신에게 빛을 비춰주겠습니다“(Give me a fire and I will give you light). (아랍격언)
둘째. 어머니입니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66:10-13,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
셋째. 물입니다.
렘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
시36:10, “진실로 생명의 샘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 부어주신다
행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창8:2,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 가득하다
사58: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 넘쳐 흐른다
요7:38,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엡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롬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요20:21,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
- 하나님이 보내셨다.
- 성령님과 함께 간다
호14:5-7,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찌라 저희는 곡식 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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