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5:1-16 2013.3.17(일) 예수님 안에, 내 안에
사순절의 한복판입니다. 고난주간이 두 주 남았습니다. 고난주간을 앞두고 우리 교인중의 한 분이 저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름은 허용선집사님(그림1), 허 집사님은 몇 년전 간암판정을 받고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은 잘 되었지만 그 후에 나빠져 간경화가 되었습니다. 의사는 상태가 중하기 때문에 간이식을 받지 않으면 1년밖에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땅한 간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하고 있는 데 어느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제 간을 아버지께 이식하겠습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들은 아직 대학생이고 취업준비도 해야 할 나이입니다. 그 바쁜 와중에 간을 이식하면 혹시 건강이 잘못되지 않을까 학업에 지장이 있을까 부모는 염려가 되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에 수술했고 아들과 아버지는 3개월의 회복기간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이 소식을 듣고 아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아드님, 아버지께 간을 이식했다고 들었습니다. 참 장합니다. 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약속한 모든 복을 주실 것입니다. 잘 회복하세요”. 아버지께 간을 제공한 아들이 마치 제 아들인양 , 모든 대한민국의 아들인양 자랑스럽고 감사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문제가 많다고 하지만 아직도 우리 젊은이들은, 우리의 자녀들은 너무 착하고 예쁩니다. 그들에게 이 나라의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요15장을 읽었습니다. 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요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그리고 5절,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장은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마치 포도나무와 그 가지와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너는 내 안에 있고 나는 네 안에 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일까 하고 묵상하고 있는 데 허집사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간을 이식했다. 그래서 몸은 허집사지만 그 안에 아들이 있다. 아버지안에 아들이 있고 아들안에 아버지가 있다”. 이것은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아닐까?”
간 이야기는 허집사만이 아닙니다. 제가 전주에서 목회할 때 장윤혁집사라고 있었습니다. 이 분의 아내가 어느날부터 얼굴이 까매지고 몸이 붓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보니까 간경화입니다. 서둘러 간을 이식해야 했습니다. 간은 구하는 것도 큰 돈이 들고 꼭 맞는 간을 만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남편이 조기퇴직을 하고 자기 간을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남편의 간이 다행히 아내에게 맞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간뿐 아니라 퇴직금의 거의 대부분을 수술비로 썻습니다. 제가 병원에 심방갔는 데 둘이 나란히 누어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보고 울고, 남편은 아내를 보고 울고. 아내는 남편에게 고맙고 미안해서, 울고 남편은 아내가 살아줘서 감사해서 울고, 이 부부처럼 아름다운 부부가 있을까? 이들은 가난했지만 행복했습니다. 돌아오면서 생각했습니다. “아, 그렇다. 장집사안에 아내가 있고 아내안에 장집사가 있다. 최고의 사랑은 서로 안에 있는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요? 믿고 따르는 교주와 신도의 관계? 배우고 가르치는 선생과 제자의 관계? 복을 주고 복을 받는 축복의 관계? 조언하고 도와주는 멘토, 멘티의 관계? 요15장은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의 관계”.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생명의 관계입니다. 생명은 무엇이고 생명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생명의 특징은 곧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생물학자에게 물었습니다. “생물이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존재와 관계를 갖고 동화하는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한 생명이 살아 있다는 말은 언제 어디서나 다른 존재와 관계를 갖는 내적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생명은 결코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존재와 끊임없이 접촉하며 교섭하면서 자신을 확장합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어윈 슈로딩더(Erwin Schrodinger)이 말과 같습니다. “생명의 특징은 무엇인가?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존재가 계속적으로 다른 물질과 상호교환하며 움직이고 무엇인가 일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살아있다고 말한다”. 생물학자들은 이것을 생명의 동화작용 혹은 신진대사라고 말합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밥을 먹기 때문에 산 것이 아닙니다. 숨쉬고 걸어다니기 때문에 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말은 어떤 존재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존재와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생명의 본체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생명의 본체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요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우리는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와 관계를 맺고 그 분과 주고 받으면서 움직이고 살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런 의미에서 살아 있습니까? 지금 숨을 쉬고 있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상호 관계를 맺고 그 분으로부터 공급받고 그 분과 끊임없이 교섭하면서 그 분 때문에 자라고 성장하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한 주간동안 요15장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또 묵상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우리는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 수 있는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의지하고, 둘째 교제하고, 셋째 연합하는 것입니다.
첫째 의지입니다.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의 첫 번째는 의지입니다. 의지란 한 쪽에서 다른 쪽에 전적으로 몸을 맡기는 것입니다. 잠3:5절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아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여기서 “의지한다”는 말은 몸을 벽에 지대는 것입니다. 벽에 지대면 편하고 쓰러지기 않습니다. 그것이 “의지”입니다. 오늘 말씀 5절을 다시 보시겠습니까?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다같이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슴이라” 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의 첫 번째는 우리가 예수님 떠나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 떠나면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포도나무의 원리 때문입니다. 포도나무를 보면 나무에 줄기가 붙어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줄기가 너무 약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포도 나무 가지를 나무라고 부르지 않고 넝쿨이라고 말합니다. 나무냐 넝쿨이냐의 기준은 가지가 줄기에 항상 붙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결정됩니다. 그런데 포도나무 가지는 겨울이 되면 말라 죽어 없어졌다가 봄이 되면 다시 살아납니다. 겨울까지 죽지 않고 붙어 있어야 가지인데 거울에는 떨어지고 새봄이 되면 나왔다가 여름에만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붙어 있는 사이에만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포도는 나무가 아니라 넝쿨이라는 것입니다.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데 어떻게 가지가 스스로 열매맺겠습니까? 여름에만 붙어 있다가 겨울에는 떨어지는 데 어떻게 그 넝쿨이 열매맺겠습니까? 그러니까 5절이 맞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슴이라”.
이스라엘에 가면 포도나무가 많습니다. 요즘은 대부분 우리와 비슷한 모습으로 포도를 재배하지만(그림2), 시골로 가보면 아주 옛날 방식으로 재배합니다. 나무가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땅으로 기어 갑니다(그림3). 우리 눈에는 익숙치 않는 모습입니다. 자세히 보면 포도나무 밑에 돌들이 놓여 있습니다. 왜 돌이 있나 하고 보면 포도나무 줄기가 땅에 닿지 않도록 받쳐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받쳐주면 어떻게 됩니까? 이슬을 받습니다. 광야에서 가장 많이 이슬이 맺히는 곳이 돌멩이 밑입니다. 땅으로 기어가는 포도나무 가지를 돌멩이로 받쳐 놓으면 이슬이 내려 포도가 그것을 먹고 자랍니다. 그래서 옛날식으로 재배하는 포도밭에는 돌이 많습니다. 혹시 예수님시대에도 포도를 그렇게 재배했을까요? 그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스스로 서지도 못하고 겨우 땅밑으로 기어가는 포도나무, 그렇게 해서 겨우 땅의 이슬을 먹고 살아가는 포도나무를 보면서 주님은 4-5절을 말씀했는지 모릅니다. 4절,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나니”. 5절, “너희도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라”.
여러분도 그렇게 믿습니까? “ 예수님 떠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예수님 도움없이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렇게 믿습니까? 어릴 때 누구나 한번쯤 수영을 배워본 경험이 있습니다. 저도 어릴 때 삼촌이 냇가로 데리고 가서 수영을 가르쳤습니다. 삼촌은 나를 물위에 누이고 발을 뻗게 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자, 고개들지 말고 가만히 누어. 그리고 발을 쭉 뻗어“. 그러나 그렇게 했더니 몸이 물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제가 소리 소리 치면서 바둥대자 삼촌이 말합니다. ”가만 있어. 내가 너를 붙잡고 있잖아. 나만 믿어“. 그때 저는 둘 중의 하나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삼촌을 믿고 가만히 있든지. 삼촌을 제치고 물속에서 나오든지. 다행히 삼촌은 군인이었고 힘이 셋습니다. 또 나를 사랑했고 나도 삼촌을 좋아했습니다. 물속에 가라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지만 수영을 배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삼촌을 믿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삼촌은 어떤 경우에도 나를 물에 빠뜨리지 않는다. 내가 물속에 빠지면 삼촌은 반드시 나를 건져낸다”. 이렇게 믿기 시작하자 발을 쭉 뻗고 손을 움직여도 물에 빠지지 얺았습니다. 삼촌은 제 몸을 붙잡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거기에 몸을 맡겼습니다. 지금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때 삼촌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나를 안전하고 붙잡고 있었고 나는 삼촌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의지”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그렇게 의지합니까?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슴이라”. 어떤 경우에도 주님은 우리를 붙잡고 있고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그를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제가 좋아하는 그림입니다(그림4). 중세의 성자 성 버나드가 예수님께 몸을 맡기는 장면입니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면 예수님과 관계가 시작됩니다.
둘째 교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하기 시작하면 그 의지는 교제로 발전합니다. 의지는 내가 예수님을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말하면 짝사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만 받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는 순간, 그와 교제가 시작됩니다. 교제는 쌍방적입니다. 오고 갑니다. 주고 받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교제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말씀하신 것이 “친구”입니다. 14절입니다. 요15:14, “너희가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절입니다. 요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예수님은 요15두 번이나 그가 우리의 친구라고 말씀했습니다.
친구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속에 있는 것을 다 털어 놓은 사람입니다. 부모에게는 말 못할 고민도 친구에게는 털어 놓습니다. 우리는 너무 하나님을 무서운 분이라고 배워왔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하늘에 떠 있는 부채도사정도로 생각합니다. 가끔 손오공처럼 천둥과 벼락을 치는 분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이 무서운 형사요 검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처럼 만드시기 위해 사람처럼 되셨습니다. 사람처럼 오신 하나님이 곧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그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그는 세리 마태, 탐관오리 삭개오, 부정한 사마리아 여인,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의 친구였습니다. 그를 반대했던 사람들까지도 이것을 인정해서 말했습니다. 마11:19,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가 그의 친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강조하여 말합니다. 다시 보십시오. 요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종은 주인이 부리는 사람입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합니다. 그러나 친구는 다릅니다. 친구는 서로의 마음을 나눕니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 상처, 미래의 꿈, 다 내어 놓습니다. 모든 것을 공개합니다. 친구가 누구입니까? 지동차 왕 헨리 포드가 말했습니다. “친구는 내 안에 있는 최고의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주는 사람이다”. 좋은 친구를 만나면 자신감을 얻습니다. 친구는 누구입니까? 서로 도와주고 붙들어 주는 사람입니다. 전4: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이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친구는 붙잡아 주고 일으켜 줍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친구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친한 것입니다. 잠18:24,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가장 좋은 친구는 친밀한 친구입니다. 잠17:17도 말합니다.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친구 삼아 그와 도란 도란 교제합니까? 15절, 요15:15,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슴이라”. 친구간에는 못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 들은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우리도 우리 속에 있는 것을 모두 말합니다. 존 라이스라는 사람이 좋은 말을 했습니다. “친구란 도움을 청할 때 아무런 보답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주는 사람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친구입니다.
여러분은 마리아를 아십니까?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오실 때마다 들른 곳이 있었습니다. 베다니입니다. 베다니에는 마르다, 마리아 두 자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방문하자 마르다는 바쁘게 일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가 하도 일은 안하고 예수님 말씀만 듣자 마르다가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눅10:40, “주여,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불평했듯이 오늘날도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지금 바쁜데 그렇게 한가한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말합니다. 눅10: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예수님 말씀만 들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일이 있으나 예수님과 대화하는 일은 그 많은 일중의 하나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와 예수님과 관계는 노동적관계가 아닙니다. 노동해서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노동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와 예수님과 관계는 물질적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물질을 드려 주님을 기쁘게 한다면 얼마나 많은 물질을 드려야 하겠습니까? 다 필요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한 가지입니다. 마리아처럼 주님과 교제하는 앞에 것입니다.
2천년 교회사에는 예수님과 교제하는 많은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요약하면 네 가지입니다. 읽기(렉치오), 묵상하기(메디타치오), 듣기(오라치오), 보기(콘템푸라치오)입니다. 먼저 읽기입니다. 읽기는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거나 예수님과 대화할 때 빼놓아서는 안되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예수님께 안내하는 문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는 말씀을 사용하지 말고 말씀을 수용해야 합니다. “사용”과 “수용”은 다릅니다. 사용은 성경을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고 수용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 여기는 으것입니다. 또 하나는 성경을 읽을 때 예수님께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계시합니다. 요5: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 모든 성경에서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에게서 모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읽기는 묵상으로 이어집니다. 묵상은 되새김질 하는 것입니다. 시119:97절입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종일 읊조리는 것입니다. 묵상은 반복하는 것입니다 소나 낙타처럼 말씀을 되새김질 하는 것입니다. 읽는 것이 성경의 문자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묵상은 성경의 하나님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읽기가 내 쪽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면 묵상은 하나님쪽에서 내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묵상은 듣기로 이어집니다. 묵상에서 마음 문을 열고 말씀에 집중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않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몸이 피곤하면 안 들립니다. 마음이 바쁘면 안들립니다. 하나님을 목적 삼지 않고 수단삼으면 안들립니다. 말이 많으면 안들립니다. 배가 부르면 안들립니다. 내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앞에 서지 않고 착한 모습으로만 서려고 하면 안들립니다. 잡생각이 날 때 잡생각에 빠지면 안들립니다. 언제나 기도할 때 잡생각이 날 수 있습니다. 유혹이 올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금식할 때 마귀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때마다 무시해야 합니다. 자기가 기도를 주도하려고 하면 안들립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하지 않고 내 노력으로 하려고 하면 안들립니다. 기도를 말로만 하고 듣지 않으려고 하면 안들립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면 예수님을 바라 봅니다. 예수님 바라보는 것이 묵상의 최종 목적입니다. 성경과 기도의 최종목적은 예수님 바라보는 것입니다.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원리가 있습니다. 바라보면 동화됩니다. 바라보면 전염됩니다. 바라보면 닮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계속 바라보면 예수님과 같은 눈으로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병자를 봅니다. 그때까지는 내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랬더니 불쌍합니다. 나를 미워하고 오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서원하고 미웠습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그를 보자 불쌍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태양을 볼 때 예수님의 눈으로 봅니다. 아름답습니다. 일을 볼 때 예수님의 눈으로 봅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눈으로 봅니다. 이것이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교제하기 원합니까? 과정은 이렇습니다.
읽기(예수님의 말씀) - 묵상(예수님 생각)- 듣기(예수님의 음성) -보기(예수님의 눈)
셋째 연합입니다.
예수님과 교제를 통해 이르는 최종적인 목적지는 예수님과 연합되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시겠습니까? 요15: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포도나무가 있는 것은 열매맺기 위함입니다. 열매맺는 것이 포도나무의 최종 목적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열매를 맺습니까? 열매는 가지에 맺힙니다. 그렇다고 가지가 혼자 열매맺나요? 아닙니다. 줄기에서 진액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혹시 가지가 시원찮다고 줄기가 혼자 열매맺습니까? 아닙니다. 가지 없이는 줄기도 열매맺지 못합니다. 열매맺는 원리는 서로 연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지와 줄기, 줄기와 가지가 함께 연합해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에서 열매가 나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다 중요한 것을 한 가지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예수님을 필요로 하듯이 예수님도 나를 필요로 하는구나. 내가 예수님없이는 못살 듯이 예수님도 나 없이는 못사시는구나. 예수님이 나무의 소중한 줄기라면 나도 나무의 소중한 가지다. 줄기만 있고 가지가 없는 나무가 없듯이 나도 예수님에게 소중한 존재다. 물론 가지는 줄기보다 못하다. 줄기는 항상 있지만 가지는 있다가도 없기 때문이다. 가지는 여름에는 있고 겨울에는 없다. 그래서 가지와 줄기는 같지 않다. 그러나 가지가 없이 줄기가 어떻게 혼자 열매맺을 것인가? 불가능하다. 아, 나에게 예수님이 중요한 것처럼 나도 예수님에게 중요하다”. 혹시 나를 쓸모없는 존재라고 자책하고 계신 분은 없 습니까? 나는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고 스스로 자기를 비하하는 분은 있습니까? 믿으십시오. 줄기가 나무에서 중요한 것처럼 가지도 나무에서 중요합니다. 열매는 줄기와 가지의 연합을 통해서 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일하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열매맺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열매맺기를 원하십니다. 열매맺는 원리는 이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이 열매맺으신다. 둘째 나를 통하여 열매맺으신다. 다같이 “나를 통하여”.
“예수님과 내가 한 생명안에 있다”. 이것을 성경은 “연합”이라고 말합니다. 연합은 상호침투하는 것입니다. 연합은 공존입니다. 연합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거한다”라는 말이 반복되고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요15:1-10절에서 무려 10번이나 “거하라, 거하면, 내 안에 거하라”고 말합니다. 5절 중간, “저가 내 안에 내가 저안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6절,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안에 거하면”, 10절 중간,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같이”. 신약성경 전체에 “예수님안에, 그리스도안에”라는 말이 262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아십시오. 우리만 예수님안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우리안에 거하십니다.
성경 최고의 신비는 우리는 예수님안에 있고 예수님은 우리안에 있다는 신비입니다. 촛불을 보십니까? 초가 둘이라도 합치면 하나입니다. 그리고 다시 떼면 둘입니다. 각자의 촛불은 따로 있지만 그러면서도 하나입니다. 고염나무를 아십니까? 고염나무가 감나무에 접붙이면 고염은 사라지고 감이 됩니다. 그러다가 감나무가 죽으면 고염도 죽습니다. 연합의 원리입니다. 저는 섬진강 상류지역에 살았습니다. 언젠가 강을 따라 며칠을 걸어본 적이 있습니다. 강은 남해로 이어졌습니다. 강이 바다에 이르자 강은 사라지고 바다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강이 없이는 바다도 없습니다. 믿으세요. 예수님안에 우리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안에 예수님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에게 소중합니다. 예수님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없이 예수님도 아무 것도 못합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한 포도나무입니다. 모든 능력, 모든 힘, 모든 비전, 모든 좋은 것이 여기서 나옵니다.
그래서 16절이 결론입니다.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많은 열매를 맺으십시오. 열매맺기 위해 사십시오. 그러나 비결은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예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십시오. 예수님과 하나되십시오. 당신은 예수님처럼 소중한 존재입니다.
요15:1-16 2013.3.17(일) 예수님 안에, 내 안에
허용선집사(그림1)
요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어윈 슈로딩더, “생명의 특징은 무엇인가?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존재가 계속적으로 다른 물질과 상호교환하며 움직이고 무엇인가 일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살아있다고 말한다”.
요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첫째 의지입니다.
잠3:5“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아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포도나무(그림2)
땅밑으로 기는 포도나무(그림3)
성 버나드 그림(그림4)
둘째 교제입니다.
요15:14, “너희가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마11:19,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요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헨리 포드, “친구는 내 안에 있는 최고의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주는 사람이다”.
전4: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이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잠18:24,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잠17:17“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요15:15,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슴이라”.
존 라이스, “친구란 도움을 청할 때 아무런 보답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주는 사람이다”.
눅10:40, “주여,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예수님과 교제하는 길
(1) 읽기
말씀을 사용하지 말고 말씀을 수용해야 한다.
요5: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
(2) 묵상
시119:97“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3) 듣기
(4) 보기
읽기(예수님의 말씀) - 묵상(예수님 생각)- 듣기(예수님의 음성) -보기(예수님의 눈)
셋째 연합입니다.
요15: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고염나무(그림5)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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