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5:11-21 2013.3.10.(일) 우리안에 생명이 있다면
봄을 잉태한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느날 정말 비싼 보물을 소유하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에 가면 사해 옆에 쿰란이란 곳이 있습니다(사진1). 여기에서 세게에서 가장 오래된 성경사본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위대한 발견은 우연한 일로 이루어졌습니다. 1947년 2월, 어느날 그 지역에서 양을 치던 베드윈 목자가 어둑 어둑해서 집에 돌아갈 때가 되어 양을 점검하는 데 양 한 마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양을 찾는 데 저 위에 동굴 하나가 보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양이 있을까 하여 돌을 던졌는 데 뭔가 쨍그랑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서 기어 올라갔더니 항아리 8개가 있고 그 안에 아마포로 싸인 가죽 두루마리가 있었습니다. 베드윈 목동은 이것을 가져다 베들레헴 골동품상에게 1달러를 받고 팔았습니다. 그 후에 이것이 소문이 나 히브리 고고학 교수의 귀애 들어갔는 데 고고학자가 현장을 방문하여 두루마리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세계적인 보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전 150년경 이곳에 살던 유대인들이 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경사본이었습니다. 고고학자는 그것을 100만불에 샀습니다. 내용은 구약 이사야 66장 전권이었습니다. 이 때로부터 이 지역에서 성경사본 발굴 운동이 시작되었는 데 몇 년동안에 모두 800개의 두루마리를 발견되었고 그것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구약을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사진2). 지금도 이스라엘 박물관에 가면 그때 발견된 항아리와 성경 사본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보물은 보물인데 그 가치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100만불, 아니 1000만불 짜리 보물인데 단 1불을 받고 팔았다는 것입니다. 보물이 얼마나 가치있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쿰란의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정말 나에게는 보물이 있는가? 나는 그것을 귀중하게 여기는가?”
영적 생활이란 결국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값진 보물을 소유하는 것이고 다음은 그 보물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값비싼 보물이 있습니까? 지금 그것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자,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값비싼 보물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13절을 보시겠습니까? 요일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주신 값비싼 보물은 영생입니다. 영원한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것이 있습니까? “나에게 있겠지” 생각하지 말고 늘 확인하셔야 합니다. 11-12절에도 말합니다. 요일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안에 그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오늘 우리에게도 전수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있으면 이 생명이 있고예수님없으면 생명고 없습니다. 예수믿으면 누구나 이 생명을 받습니다.
문제는 이 위대한 생명을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없는 것은 아닌데 그냥 방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한 100여년전에 미국의 한 마을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이때 한 할머니도 전기시설을 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 직원이 가서 보니까 집안에 어두 침침합니다. 그래서 계량기를 보니까 계량기가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할머니, 전기를 통 안쓰셨네요. 전기를 안쓰시나요?” 그때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응, 나는 전기를 쓰는 데 촛불을 켜고 끌때만 써”. 이 할머니는 전기를 달기는 달았지만 촛불 켜고 끌 때만 쓰기 때문에 집안에 늘 어둡고 침침했습니다.
왜 우리의 삶이 어둡고 침침한지 아십니까? 전기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가끔 어둡고 침침합니다. 우리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어서 일까요? 아닙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 안 쓰기 때문입니다. 있기는 있는 데 쓰지 않고 그대로 둡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내게도 전기는 있어. 그런데 안 쓰고 있을 뿐이야”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쓰지 않는 전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쓰지 않는 생명이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성경은 믿는 우리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말을 수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216번 말했고, 요한은 26번 말했습니다. 너희안에 예수님 계신다. 계신다. 정말 계신다. 반드시 계신다. 예수님이 계신다면 요일5:11-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 여러분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신 것 믿습니까? 그렇다면 생명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안에 생명이 있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면 그 생명은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제공할까요?
생명은 기도하게 합니다.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우리로 기도하게 하는 일입니다. 14-15절을 봅니다. 요일5:14-15,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로 또한 아느니라”. 하나님의 생명은 기도하게 합니다. 왜 그럴까? 모든 생명의 존재원리는 유유상종입니다. 끼리 끼리 모입니다. 우리안에 들어온 생명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본래 그 출처가 하나님입니다. 요일1:1, “태초부터 있던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로서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시집간 딸이 가장 편한 것은 친정집이듯, 사람이 힘들고 아플 때 고향을 찾듯이,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늘 생명의 원천을 찾습니다. 찾지 말라고 해도 찾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 믿는 사람에게 기도는 영적 본성입니다. 그저 나도 모르게 하나님 찾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엄마 부르는 원리와 똑같습니다. 이 원리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세 가지 요소로 된 존재라고 말합니다. 영과 혼과 육입니다. 살전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여기에 영과 혼과 몸이 나옵니다. 히4:12절에도 또 있습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려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여기에도 영과 혼과 관절, 골수가 나옵니다. 관절과 골수는 육입니다.
영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인간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거하고 있습니다. 방으로 하면 안방이요 성전으로 하면 지성소입니다. 몸은 가장 낮은 것으로 사람의 외부를 자리잡고 있습니다. 집으로 말하면 건물이요 성전으로 말하면 바깥뜰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혼이 있습니다. 혼의 밖에는 육이 있고 안에는 영이 있습니다. 집으로 말하면 거실이나 현관이요 성전으로 말하면 안 뜰입니다. 혼은 가운데 있으면서 영과 육을 중개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그릴 수 있습니다.
인간 = 영 + 혼 + 육
(안방, 지성소) (거실, 안뜰) (건물, 바깥뜰)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임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가운데 생명으로 임했습니다. 그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의 영과 우리 영의 교류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생명의 원천이 우리안에 있는 영과 교섭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영) - (교류) - 영(우리의 영)
기도는 생명이신 하나님의 영과 우리안에 피조된 우리의 영이 서로 교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서 기도는 예수를 믿어야 가능합니다. 예수님 믿지 않고는 본질적으로 기도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 믿으면 하나님의 생명이 임하고 생명이 임하면 영적 유유상종, 그 생명이 우리안에 있는 영과 접촉합니다. 그래서 기도라고 말하지만 성경적이 아닌 기도가 있습니다. 심리적 기도, 이 기도는 자기 내면 세계와 대화하는 것입니다. 마인드 콘트롤, 최면술, 마술 같은 것이 여기 속합니다. 이 기도를 해도 마음이 편해질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성경적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자기와의 대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생명이 우리안에 있는 영과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명상적 기도도 성경적 기도가 아닙니다. 명상도 일종의 심리적 기도입니다. 명상은 자기 속에 있는 무의식의 자아와의 대화입니다. 명상과 묵상은 다릅니다. 명상은 자기와 대화하는 것이고 묵상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명상은 자기 체험을 목표하고 묵상은 하나님 체험을 목표합니다. 명상은 심리적인 자기 개발이 목표고 묵상은 말씀과 성령안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명상은 자기 소리를 듣는 것이고 묵상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명상은 자기가 자기를 대면하는 것이고 묵상은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명상의 목적은 자기 개발이고 묵상의 목적은 하나님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눈을 감았다고 기도가 아니며 입술을 움직였다고 기도가 아닙니다. 성경적 기도의 목적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영으로 내 영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일반기도와 성경적 기도의 가장 큰 차이는 기도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 기도의 주인은 자기자신이고 성경적 기도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자기가 기도의 주인이기 때문에 일반적 기도는 늘 자기 성취, 자기 뜻, 자기 생각을 앞세웁니다. 기도는 수단이 되고 기도는 목적지향적입니다. 불교도 법당에서 3천배, 만배하고, 미신 믿는 사람도 새벽에 정한수 떠놓고 빌고 남묘효렝교믿는 사람은 호랭이, 사자를 외치며 기도하지만 그 목적은 자기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적 기도는 어떻습니까? 14절을 보실까요? 요일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다같이 “그의 뜻대로”. 왜 그렇습니까? 기도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들어와 나로 기도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소원을 더 얻는 기도가 있고 하나님 자신을 더 얻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목적삼는 기도가 있고 하나님을 수단삼는 기도가 있습니다. 15절입니다. 요일5: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것을 얻은 줄을 아느니라”. 우리가 기도하면 무엇이나 얻습니다. 그러나 가장 크게 얻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기도를 통해 이루는 가장 크게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안에 생명이 있다면 우리는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생명은 더 커집니다.
생명은 죄를 이깁니다
우리안에 있는 생명이 하는 두 번째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를 이기는 일입니다. 18절을 보겠습니까? 요일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 이 말은 오랫동안 많은 오해가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가 실제 범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안 난 것도 아닌데, 우리는 매일 범죄하고 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은 잘못된 말씀입니까?
원리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앞에 나온 도표를 다시 보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영과 혼과 육으로 되어 있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셋은 하나님이 정하신 어떤 관계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라고 하는 관계입니다. 그것은 영은 혼을 다스리고 혼이 육을 다스리는 구조입니다. 말하자면 하향식입니다. 영이 건강하면 그 영이 혼을 지배하고 혼이 건강하면 그 혼이 육을 지배합니다. 그런데 사단은 정반대입니다. 육이 혼을 다스리고 혼이 영을 다스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
영 영
혼 혼
육 육
사단의 공격
그 대표적인 사건이 에덴동산사건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한 일은 그가 아담의 영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아담의 육을 공격했다는 것입니다. 창3:6절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여기서 먹음직스럽고, 보암직스럽고, 탐스러운 것은 다 인간의 육적 소욕들입니다. 사단이 아담의 육을 공격하자 육은 아담의 혼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아담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단하는 모양으로 선악과를 따 먹습니다. 정말 사단은 교묘합니다. 배후에서 조종은 다 해놓고 아담이 스스로 한 것처럼 만듭니다. 혼이 육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영이 아무 맥도 못쓰고 혼이 하자는 대로 자신을 내 맡깁니다. 그래서 아담은 죄짓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주셨을까? 이 잘못된 구조를 바로 잡기 위해서입니다. 영을 강화해서 영이 혼을 다스리고 혼이 육을 다스리게 하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육을 다스리는 일을 “죄를 이긴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죄는 육에서 생기기는 데 육을 죽이는 방법은 영을 강화시키는 방법입니다. 롬8:10을 보시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바울은 몸을 죽인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몸에 있는 죄를 죽인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육체는 존재의 필수요소입니다. 갈2:20,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우리는 싫건 좋건 육체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육체는 하나님이 만드는 창조물입니다. 그러나 그 육체속에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안에 있는 죄를 이겨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 생명입니다.
다시 18절 보십시오. 요일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죄를 범하지 못한다”고 했습니까?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이 둘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못한다”는 것은 할 수도 있다는 것이고 “안한다”는 것은 할 수 있지만 스스로 안한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지만 그 가능성을 언제나 의지로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를 이기는 의지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내 의지가 아닙니다. 내 의지는 믿을 것이 못됩니다.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주 이름으로 구원해 날 받아주소서”. 다같이 “주 이름으로”. 내 힘으로는 안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사에서 대죄라고 불리운 7가지 죄가 있습니다. 교만, 시기, 탐욕, 탐식, 분노, 정욕, 나태입니다. 이 7가지 죄의 목록은 오랜 역사속에서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죄로 여겨져 왔습니다. 먼저 교만입니다. 교만은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최후까지 남는 죄가 교만입니다. 교만의 중심에는 끈질긴 자기 중심과 자기 사랑이 있습니다. 시기입니다.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잠14:30절 말씀입니다. 시기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슬퍼하는 것입니다. 질투와 시기는 조금 다릅니다. 질투는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고, 시기는 자기가 갖지 못한 좋은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슬퍼하는 것입니다. 한 유대인 민담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친구가 길을 가다 왕을 만났는 데 하나는 욕심이 많고, 다른 하나는 시기심이 많았습니다. 왕이 두 사람에게 “만약 너희 중에 한 명이 요청하면 무엇이든지 그대로 주겠다. 단, 옆 사람에게는 요청한 것의 두 배를 주겠다”했습니다. 그랬더니 시기심 많은 친구가 말했습니다. “왕이여, 저의 한 눈을 빼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상대방은 두 눈을 빼야 했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우리 영혼을 어둡게 만드는 극렬한 감정입니다. 분노는 우리 영혼의 눈을 어둡게 하고 기도를 망가뜨립니다. 탈옥수 신창원도 어릴 때 너무 가난해서 육성회비를 못내자 담임선생님이 “너 같은 놈은 학교 다닐 필요없어”하고 소리쳤는 데 그 한마디는 그의 마음에 비수처럼 꽂혀 세상과 사람에 대한 분노의 씨앗이 되었다고 합니다.나태는 행하지 않는 죄입니다. 탐욕은 채우지 못한 욕심입니다. 탐식은 배를 자기 신으로 삼는 것입니다. 정욕은 마셔도 마셔도 해갈되지 않은 바닷물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믿고 구원받았어도 없어지지 않고 우리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오면 우리가 이것들을 이깁니다. 어떻게 이깁니까? 먼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영에 들어오면 영이 혼을 지배합니다. 그러면 혼이 육을 다스립니다. 육에 있는 7가지 죄들을 다스립니다. 죄들은 그때부터 영의 종노릇하며 맥을 못 춥니다.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힘을 못 씁니다. 힘을 못 쓸 뿐 아니라 좋은 것으로 바뀝니다. 교만은 겸손으로 바뀝니다. 시기는 사랑으로, 탐욕은 감사로, 탐식은 절제로, 분노는 용서로, 정욕은 정결로, 나태는 근면으로 바뀝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생명의 양과 크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크고 강해지면 육도 작아지고 죄는 힘을 잃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영
혼
육
교만, 시기, 탐욕, 탐식, 분노, 정욕, 나태
겸손, 사랑. 감사, 절제, 용서, 정결, 근면
그래서 또 한 그림을 보겠습니다. 이 그림은 완성편입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자, 사람은 누구나 이 다섯 중의 하나입니다. 첫째 죄만 있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없는 사람입니다. 안 믿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죄가 홀로 지배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가운데 임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죄는 강하게 우리속에 남아 있습니다. 생명은 있으나 여전히 죄가 압도합니다. 그래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는 단계입니다. 셋째 단계는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자랍니다.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무럭 무럭 자랍니다. 그래서 우리속에 있는 죄와 비슷하게 됩니다. 그러면 둘이 치열한 갈등을 빗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 싸웁니다. 이것이 롬7장입니다. 그러다가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우리 속에 생명이 풍성해 집니다. 그러면 서서히 죄를 지배하게 됩니다. 죄에 지는 경우보다 죄를 이기는 경우가 더 많아 집니다. 생명의 압도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지막 단계가 오직 생명만 있는 단계입니다. 죄는 사라집니다. 오로지 생명만 있습니다. 이것이 계22장입니다.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간에 살겠네”. 첫 번째와 마지막은 믿는 자의 현실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2번이든지 3번이든지 4번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꿈꾸는 영적 생활의 승리는 4번입니다. 매번 죄를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차서 죄를 이기는 것이 쉽고 일상이 됩니다.
죄 죄만 있는 단계(죄의 지배)
죄 생명 생명이 있으나 죄가 생명을 압도하는 단계(죄의 압도)
죄 생명 생명이 자라면서 죄와 갈등을 빚는 단계(죄의 갈등)
죄 생명 생명이 크게 자라 죄를 압도하는 단계(생명의 압도)
생명 오직 생명만 있는 단계(생명의 지배)
여러분은 어떤 단계에 있습니까? 18절 다시 보실까요? 요일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우리안에 있는 생명이 점점 자라면 악한 자가 맥을 못씁니다. 우리안에 거룩한 생명의 자생력이 생긴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이를 위해 생명이 하는 세 번째 일이 있습니다. 요일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남이요 영생이시라”. 자, 우리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첫째 기도하게 됩니다. 둘째 죄를 이기게 됩니다. 그러면 죄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안에 생명이 풍성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생명은 20절,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가게 합니다.
왜 우리가 더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까? 생명은 생명의 근원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 닮고 더 가까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사람이 성공하고 행복한 것은 목표를 단순화하고 집중할 때입니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에 집중하면 성공하고 행복합니다. 마음의 행복은 언제나 단순성에서 옵니다. 옛날 어떤 부자가 수도원에서 기도하는 수도자들에게 금을 나눠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인을 시켜 마차에 수도원으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수도사들이 말합니다. “우리는 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인은 “그러면 궁핍한 사람을 위해 쓰십시오”하고 수도원 대문앞에 두고 왔습니다. 그런데 며칠 있다 가 보니까 그 금덩어리가 대문앞에 그대로 있습니다. 누구도 그것을 건드리지 않았고 심지어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주인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더니 주인이 감동을 해서 도로 가져갔습니다. 이것이 단순성입니다. 단순성은 곧 하나의 마음입니다. 물질에 단순하면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영혼이 단순해 지면 하나님께 집중하게 됩니다. 마5:8절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나님 한 분에게 집중하면 마음이 청결하게 되어 하나님을 봅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성가 중의 한 분이 12세기 성자 성 버나드입니다. 1090년에 태어난 그는 프랑스 클레이보에 수도원을 세웠다고 해서 클레이보의 버나드로 알려졌습니다. 이 분이 쓴 찬송가가 있습니다. 85장, “구주를 생각만 해도”입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4절입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주 사랑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얼마나 좋은 찬송인지. 곡조뿐 아니라 내용이 좋습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생각만 해도 마음이 좋습니다. 예수님 생각하는 것이 영적 삶의 시작입니다.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영적인 삶은 예수님 생각하는 데서 시작해서 예수님 얼굴 보는 것입니다. 4절,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주 사랑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예수님 사랑할수록 더 사랑해 집니다. “그 사랑 받은 자만이 그 사랑 알도다”. 성 버나드는 일생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은 갈수록 더 커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주 얼굴 뵈옵는 것입니다. “그 사랑 받은 자만이 그 사랑알도다”. 사랑을 경험적입니다. 사랑할수록 더 합니다. 그래서 버나드는 하나님 사랑은 네 단계로 발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자신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 이것은 육신적인 사랑입니다. 둘째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 이 사랑도 아직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랑은 아니지만 필요한 사랑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 이 사랑이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잘해주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은 본래 좋으신 분이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랑입니다. 마지막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 이 사랑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라고 성숙해 갑니다. 그래서 5절입니다.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되시고 이제로부터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더 풍성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영이 강해져서 육의 소욕인 죄를 더 잘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이신 하나님과 더 깊히 교제할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안에 세계 최고의 보물, 하나님의 생명이 있음을 믿습니까? 그냥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과 교제를 시작한다는 것을 믿습니까? 우리안에 있는 생명은 또한 우리 영을 지배하고 혼은 지배하여 결과적으로 육체의 소욕인 죄를 이긴다는 것을 믿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 강할수록 죄가 더 맥을 못쓰는 것을 믿습니까? 우리안에 있는 생명이 하나님을 알고 그를 사랑할수록 죄를 더 많이 이기고 하나님을 더 많이 닮아가는 것을 믿습니까? 13절을 믿음으로 고백합시다. 요일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능력이요 소망이요 힘입니다.
요일5:11-21 2013.3.10.(일) 우리안에 생명이 있다면
쿰란(사진1).
항아리와 두루마리(사진2).
요일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일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생명은 기도하게 합니다.
요일5:14-15,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로 또한 아느니라”.
살전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려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인간 = 영 + 혼 + 육
(안방, 지성소) (거실, 안뜰) (건물, 바깥뜰)
하나님의 생명(영) - (교류) - 영(우리의 영)
성경적이 아닌 기도
(1) 심리적 기도
(2) 명상적 기도
요일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요일5: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것을 얻은 줄을 아느니라”.
생명은 죄를 이깁니다
요일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
영 영
혼 혼
육 육
사단의 공격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요일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7대 대죄
(1) 교만-자기를 높이는 것.
(2) 시기-다른 사람의 행복을 슬퍼하는 것
(3) 분노-우리 영혼을 어둡게 만드는 극렬한 감정
(4) 나태-행하지 않는 죄
(5) 탐욕-채우지 못한 욕심.
(6) 탐식-배를 자기 신으로 삼는 것
(7) 정욕-마셔도 마셔도 해갈되지 않은 바닷물
하나님의 생명
영
혼
육
교만, 시기, 탐욕, 탐식, 분노, 정욕, 나태
겸손, 사랑. 감사, 절제, 용서, 정결, 근면
죄 죄만 있는 단계(죄의 지배)
죄 생명 생명이 있으나 죄가 생명을 압도하는 단계(죄의 압도)
죄 생명 생명이 자라면서 죄와 갈등을 빚는 단계(죄의 갈등)
죄 생명 생명이 크게 자라 죄를 압도하는 단계(생명의 압도)
생명 오직 생명만 있는 단계(생명의 지배)
요일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생명은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요일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남이요 영생이시라”.
마5:8절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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