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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8:42-48 생명, 긍휼의 눈물 2013.4.21(일)

8:42-48 2013.4.21()

생명, 긍휼의 눈물

여러분은 성경중 가장 짧은 귀절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성경 전체가 31, 173절인데 그 중 가장 짧은 것이 요11:35절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우리말로는 3개의 단어로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두 단어입니다. “Jesus wept." 딱 두 단어입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 구절이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이지만 이 귀절이 또한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인 구절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죽은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예수님은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앞에 예수님이 보이신 모습,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 귀절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셨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지극히 작은 피조물 하나의 죽음앞에 진실로 슬퍼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인생을 살면서 울어 보셨습니까? 저도 어렸을 때부터 조금 눈물이 많아 울보라고 불렸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울면 안된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사람이 잘 우는 것이 몸에 좋다는 연구가 나왔습니다. 사람이 울면 우선 눈의 독소를 제거하여 눈동자 표면을 촉촉하게 적셔 준답니다. 이른바 눈물의 자동세척 기능입니다. 그래서 눈물이 눈동자를 깨끗하고 부드럽게 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사람이 울면 마음도 시원해집니다. 단단한 마음이 부드러워 집니다. 모든 스트레스와 병이 사라집니다. 대부분의 병은 잘 안 울어서 생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살고 싶다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러 나오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자로 시작하는 일곱가지 울음을 이야기합니다. “무조건 우십시오. 무차별적으로 우십시오. 무시로 우십시오. 무수히 우십시오. 무릎끓고 우십시오. 무안을 당해도 우십시오. 무엇보다 울고 또 우십시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눈물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지만 최근에 우리는 더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북한의 전쟁 위협으로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더니 지난 주 미국 보스톤 마라톤에서는 테러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습니다. 그중에 마틴이라는 8살 소년의 죽음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사진). 자전거타기와 야구를 좋아했던 소년은 그날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 막 결승점을 앞둔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폭발물이 터졌고 8살 소년 마틴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6살 여동생도 크게 다쳐 함께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달리면 자기를 기다린 가족의 품에 안기리라는 희망을 가진 아버지에게는 너무 참담한 슬픔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때 죽은 사람이 마틴을 포함해 3명이고 다친 사람이 170명을 넘었습니다. 타박상을 입은 사람, 화상을 입은 사람, 고막이 손상된 사람, , 다리를 잃어버린 사람,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왜 이런 고통들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이 고통들과 싸우며 살아야 할까요? 성경은 놀랍게도 우리에게 왜 고통이 오는지 한번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 어떻게 그 고통을 이기며 살아야 할지 한번도 구체적으로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성경이 고통에 대하여 말할 때 꼭 빠뜨리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고통당한 사람에 대한 긍휼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이 고통을 없애주거나, 우리 삶에 아예 고통이 생기지 않도록 막아주기를 바랍니다. 혹시 고통이 생겼어도 그것을 이기는 신비한 능력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대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고통당할 때 잘 참고 기다려라. 그리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만 가르칩니다. 왜 그럴까요?

 

이 질문과 함께 제가 읽은 말씀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을 지나다가 만난 한 환자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는 길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저마다 문제를 안고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받기를 원하여 밀고 당겼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님의 몸에 어떤 변화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몸에서 빠져나간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님만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군가 하고 돌아보았더니 한 여인이 예수님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혈루병을 앓는 여자인데 예수님 몸에 손이 닿는 순간 자기 병이 나았다고 간증했습니다.

 

이 여인은 누구일까요? 43절에 혈루병 걸린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혈루병은 여성병으로 만성출혈병입니다. 혈관조직이 약하여 혈관틈으로 피가 나오는 병입니다. 피가 흘러나와 결국 악성 빈혈로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이 병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이 여인은 이런 저런 방법을 다 해보고 안되니까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의지하려고 그날 예수님께 나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예수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자기 몸의 병이 고침받았습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6절입니다. 8: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앏이로다 하신대”. 이 여인이 고침받은 것은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안에 있는 생명의 능력이 이 여인에게 흘러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혈루병 여인에게 흘러갔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부정한 병이라고 규정한 병이 있음을 아십니까? 11장에 나옵니다. 이런 병입니다. 소경, 절뚝발이, 손부러진자, 곱사, 난쟁이, 눈에 백막있는 자, 괴혈병, 버짐을 가진 사람, 피부병, 고름흘리는 자, 피흘리는 자, 아이낳은 여자, 설정한 자, 사생아등입니다. 이들이 부정한 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창조에 미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온전하게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병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온전성을 깨뜨리는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인들은 이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병중의 하나가 혈루병이었습니다. 혈루병 여인을 보십시오. 이 여인은 지금 몸에서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아주 부정한 여인입니다. 치료는 커녕 사람들과 멀리 격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병을 고칠 때마다 보여준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 그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성경이 말합니다. 1: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능력보다 먼저가 긍휼입니다. 손을 내밀기전에 먼저 가진 마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손을 내밀고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닙니다. 깨끗함을 받으라고 소리치고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고 깨끗함을 받으라 소리쳤습니다. 나인성에서 아들을 잃고 슬피우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이때도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7:13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다같이 불쌍히 여기사”.

의사는 병을 고치고 하나님은 사람을 고칩니다. 의사는 병을 치료하고 하나님은 마음을 치료합니다. 병보다 더 큰 것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먼저 치료하십니다. 한 목사님에게 장애인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아들이 기도하다 울었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아들, 기도하다 왜 우니?”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빠, 예수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어요.” “?” 한참 있다가 아들이 말햤습니다. “슬프하세요”. “왜 예수님이 슬프실까?” 아들이 한참있다 말했습니다. “제가 슬퍼하니까요”. 수님은 장애인이 아들이 슬퍼하니까 예수님도 슬퍼하셨습니다.

 

11세기의 성자 제롬이 베들레헴에서 성경을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구약은 히브리어, 신약은 헬라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으로 제롬이 라틴어로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얼른 이 성경을 번역해서 예수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한번은 기도하는 데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제롬이 하도 기뻐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제가 주님께 선물을 드리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하늘과 땅이 다 내 것인데 네가 나에게 무슨 선물을 주겠느냐?” 제롬이 말했습니다. “제가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있는 데 그것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정말 나에게 선물을 주겠느냐? 그러면 한 가지만 다오”. 제롬이 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네 죄와 고통을 다 나에게 다오. 그것이 나에게 최고의 선물이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긍휼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의 하나님이 긍휼의 하나님임을 믿습니까? 하나님을 설명할 때 가장 좋은 말이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입니다. 시편 116: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9:31,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긍휼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사라와 하갈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몸종 하갈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자 그를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사라가 그를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하갈이 광야로 내쫓겼습니다. 사람들은 다 하갈을 버렸습니다. 사라도 버리고 아브라함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막으로 내쫓긴 하갈을 따라 광야까지 가서 거기서 그들 모자를 위해 샘을 내 주었습니다. 물이 없던 광야에 퐁퐁퐁 물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을 축복하셨습니다. “네 씨가 많아 수를 셀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생겨난 것이 오늘날 아랍족입니다. 그때 하갈이 너무 감사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16:13-14,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여기서 살피시는 하나님이 엘로이, 감찰하시는 하나님, 바라보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살피시고 바라보시는 것을 믿습니까? 394,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잖네”. 긍휼의 하나님,

 

그런데 예수님에게서 긍휼이 생기는 순간, 그에게서 나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능력입니다. 46, “내게서 능력이 나갔도다”. 예수님 마음에서 긍휼의 샘이 솟는 동안 예수님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밖으로 나갔습니다. 긍휼과 함께 나갔습니다. 긍휼과 함께 치료의 능력이, 긍휼과 함께 회복의 능력이, 긍휼과 함께 치유의 능력이 나갔습니다. 이 능력이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늘의 생명입니다. 언제나 공식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긍휼과 함께 흘러 갑니다. 그러면 능력은 아픈 사람에게는 치료의 능력이, 우매한 사람에게는 지혜의 능력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부요의 능력이, 외로운 사람에게는 기쁨의 능력이 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흘러 갑니다. 개인에게도 흘러 가고 교회에게도 흘러가고 열방과 우주적 생명으로도 흘러갑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생명이 흐르는 통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명이 흘렀던 또 하나의 요소가 있었습니다. 48절입니다. 8: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안에 있던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간 이유를 여인의 믿음에 돌리고 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과연 예수님은 여인에게서 어떤 믿음을 보았을까? 예수님이 여인에게 믿음이 있다. 그 믿음 때문에 여인이 나았다고 말할 때 그 믿음은 무엇일까?

 

우선 믿음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여인이 했던 행동중 계속 강조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만지다. 만졌다라는 말입니다. 44, 45, 46, 47절에 네 번이나 나옵니다. 여인은 그날 무엇을 만진 것일까요? 44절에 보면 여인은 예수님의 옷가를 만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언뜻 들으면 여인이 예수님 옷의 어떤 부분, 옷의 끝자락같은 데를 만졌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옷가란 말은 유대인들이 입고 다니는 탈리트라는 기도복에 길게 늘어뜨려진 옷술을 말합니다(사진). 유대인의 기도복에 붙어 있는 이 옷술은 아무렇게나 만들지 않습니다. 여러번 감고 감아 매듭을 만드는 데 그것에 신앙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것은 처음엔 15번 감고 다음에 13번 감아 매듭으로 만듭니다.

 

이스라엘에 수신학이 있습니다. 수신학은 숫자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3은 하나님 수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 구약에도 천사가 나타날 때 항상 셋이 나타납니다. 4는 인간의 수입니다. 동서남북, , 여름, 가을, 겨울, 남녀노소, 4는 인간의 수입니다. 34을 합친 7은 완전수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있을 때 완전해집니다. 12도 완전수입니다. 3x412입니다. 그래서 12지파, 12제자가 나옵니다. 그런데15란 수는 아도나이”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13에하드”, “하나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합치면 아도나이 에하드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볼 때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는 유대인의 기도복의 옷 자락은 그래서 아도나이 에하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을 담았습니다. 그래서 그날 여인이 예수님의 옷가를 만진 것은 단순히 옷을 만진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은 나를 치료할 유일할 전능자라는 믿음의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두 조각 나도 나는 하나님을 붙잡겠다. 세상 아무도 못해도 하나님은 하신다. 내 몸이 불치병이라도 하나님은 고치신다. “오직 하나님만 하신다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믿는다면 고난에 대한 생각도 다릅니다. “고난은 어쩌다 찾아온 재수없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이 뜻가운데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보따리다”. 이렇게 믿는 것입니다. 정말 좋은 말씀이 3:11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여기서 좋은 말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인생은 항상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때를 따라 아릅답습니다”. 때가 있습니다. 좋은 때가 있고 나쁜 때가 있고, 문제는 그 때를 하나님이 주관한다는 것입니다. 일의 시종을 사람이 측량할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은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커다란 모자이크의 한 부분입니다. 전체 그림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영원입니다. 영원중에는 이런 저런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하나님이 주시는 전체 그림의 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지금은 어두운 때구나”. 이것이 고난입니다. 그러나 항상 고난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아름다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체 그림인 영원을 사모해야 합니다.

 

왕따란 말이 있습니다. 따돌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따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이 왕따를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왕따=왕이 나중에 따로 쓰려고 준비한 사람”. 그렇습니다. 왕따는 지금 볼 때 따돌림 당하지만 왕이신 하나님이 나중에 따로 쓰려고 준비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난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혈루병 여인이 이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나를 고치신다. 그래서 나는 아도나이 에하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고백으로 예수님의 옷술을 붙잡겠다. 내 병은 나를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다. 내 병은 하나님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려고 나에게 주신 선물보따리, 은혜의 보석 상자다. 나는 현재의 고난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영원을 사모하리라”. 이 믿음이 예수님의 생명이 그에게 흐르게 했습니다.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생명도 긍휼로 흘러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건을 읽고 우리가 깨닫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나에게도 예수님안에 있는 생명이 있다는 것과 그 생명이 예수님처럼 긍휼로 흘러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23절입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은혜와 긍휼과 평강”, 여기만 나온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쓴 딤후1:2에도 나옵니다.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사도 요한이나 바울은 하나님의 마음을 똑같이 깨달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은혜와 긍휼과 평강”, 이 세 단어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을까?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긍휼은 우리가 서로 나누는 사람간의 사랑입니다. 은혜는 죄를 사하시려고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의 마음입니다. 긍휼은 고난당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은혜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라면 긍휼은 나와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먼저 은혜가 임하고 긍휼이 뒤따라 옵니다. 그러나 같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면 우리는 긍휼의 마음을 갖습니다. 은혜는 긍휼을 낳고 긍휼은 은혜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이루어지는 것이 평강입니다. 평강은 은혜 더하기 긍휼입니다. 따라서 둘 중의 하나가 없으면 평강은 없습니다. 왜 우리가 사는 세상이 평화롭지 않은지 아십니까? 은혜없는 값싼 긍휼만 있거나 긍휼없는 값싼 은혜만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날마다 은혜를 받습니까? 은혜를 받아도 평강이 없는 이유는 그 은혜가 긍휼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를 좋아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윤동주의 서시의 한 부분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것입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긍휼을 가져야 할 이유는 세상에 좋아서가 아닙니다. 세상이 의롭고 착해서가 아닙니다. 딱 한 가지입니다. 모두 다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북한을 보십시오. 핵을 무기삼아 전 세계와 전쟁을 벌이고 있지 않습니까? 백성들은 굶어죽는 데 지도자들은 위험한 전쟁놀이에 미쳐 있지 않습니까? 같은 민족이지만 너무 화가 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렇게 떠들던 김일성이도 가고 김정일이도 가지 않았습니까? 결국 모두 죽어갑니다. 그래서 불쌍합니다. 100년도 못되어 죽어갈 것들이 영원히 사시는 하나님앞에 큰 소리칩니다.

 

그래서 미워하고 싸우고 원수갚은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다 죽어갈 것들이 인간의 작은 감정으로 하나님 주신 생명을 스스로 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집트 사막에서 기도하던 수도자중에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하여 자기를 모욕한 형제에게 복수하고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수도원장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아바, 제가 당한 만큼 그에게 갚아주려고 갑니다”. 수도원장은 그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했지만 그는 그가 자기를 모욕한 자의 대가를 치루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수도원장이 일어나 기도했습니다. “, 하느님, 이제 우리는 당신이 필요없어 졌습니다. 당신이 할 일을 우리가 모두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는 그때 생각을 바꿨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일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조금 억울한 일을 당한 분 계십니까? 이유없이 모욕을 당해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분이 계십니까? 잊어 버리세요. 원수 갚지 마세요, 원수갚는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불쌍히 여기세요. 4:32절 말씀대로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왜 불쌍히 여겨야 합니까? 모두 다 죽어갈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 하나 알고보면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몸에 갑작스런 병이 발견되어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 삶과 죽음 사이를 오락 가락하며 수술을 받는 사람들, 서울 난곡동의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이들, 거기에 씌여있는 미혼모의 편지, “목사님, 우리 애기를 잘 부탁해요. 그리고 저를 찾지 말아 주세요”. 우연히 인터넷에 자살이라고 치자 이런 글이 떠 올랐습니다. “자살하고 싶습니다. 하루하루가 너무 짜증나고, 지루하고, 재미없고. 우울증때문이라는 사람이 많은데, 잘 모르겠고, 학교에 가도 재미가 없어요. 가끔 아무 이유없이 계속 눈물날때도 있고, 엄마도 싫고, 친구도 싫고, 그냥 전부 다 싫어요”. 아직 어린 학생같은 데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눈물이 확 나왔습니다. 삶의 지쳐 너무 지고 쓰러진 사람들, 하루 하루 일에 쫓겨 하나님도 잊고 사는 사람들, 평소에 그렇게 믿고 친하게 지냈다가 하루 아침에 등을 돌리며 원수처럼 된 사람들, 모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치 피를 흘리며 살기 위해 예수님의 옷을 붙잡고 늘어지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혈루병 환자였듯이 그들도 또한 우리에게 또 하나의 혈루병환자들입니다.

 

저는 오래전에 당한 교통사고를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기록했습니다. 교통사고가 날 때까지 저는 인생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용기를 내 가해자의 방을 노크했을 때 이 쓸데없는 이분법은 사라졌습니다. 뜻밖에 가해자는 나보다 더 많이 상처를 받고 누어 있었습니다. 운전대를 들이받아 내장이 파괴되고 목의 신경을 다쳐 두 손이 마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온 몸에 타박상을 입고 기브스를 한 채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를 한참 바라보고 있는 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없다. 나만 피해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피해자다. 우리는 모두 죄로 인해 당하는 상처의 공동 피해자다”. 가까이 다가가 그를 껴안았을 때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습니다. “인생에 가해자, 피해자는 따로 없다. 누구나 가해자요 누구나 피해자다”. 그래서 평생 이집트 수도원에서 기도하고 살던 안토니의 말이 제게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일은 이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자기의 죄의 탓으로 돌리라. 그리고 숨이지는 순간까지 시험이 있을 것을 기대하라”.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고 숨어 넘어가는 순간까지 이 세상에는 시험이 없을 수 없지라고 생각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은혜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것처럼 내가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긍휼로 훌려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받기만 하고 주지 않으면 고이고 썩습니다.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은혜로 받은 하나님의 생명, 긍휼로 흘러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가 강같이 흐르게 하소서.

 

 

 

 

 

 

 

 

 

 

 

 

 

 

 

 

8:42-48 2013.4.20()

생명, 긍휼의 눈물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Jesus wept."

 

마틴(사진).

 

8: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앏이로다 하신대”.

 

예수님의 생명이 혈루병 여인에게 흘러갔습니다.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1: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시편 116: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9:31,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16:13-14,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394,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잖네”.

 

믿음은 예수님의 생명이 흐르는 통로입니다.

8: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옷가”(사진).

 

아도나이 에하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왕따=왕이 나중에 따로 쓰려고 준비한 사람”.

 

우리의 생명도 긍휼로 흘러가야 합니다.

2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딤후1: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은혜=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

긍휼=우리가 서로 나누는 사람간의 사랑

 

은혜+긍휼=평강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서시)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안토니, “인간에게 가장 큰 일은 이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자기의 죄의 탓으로 돌리라. 그리고 숨이지는 순간까지 시험이 있을 것을 기대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