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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광의 길을 가르치신 예수님! (막 10:35~40)

영광의 길을 가르치신 예수님! (막 10:35~40)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하나님께 드리셔야 했습니다. 이제 때가 이르러,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이끄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서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일, 곧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한번도 제대로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때마다 그들은 그릇된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로부터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신앙고백을 들으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있을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그 후 예수님이 변화 산에서 내려오셔서,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가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로 그들에게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오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며 쟁론했습니다.

드디어 때가 차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오르시게 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예수님은 마지막 세 번째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그들에게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직후에 되어진 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눅19:11 말씀과 같이,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이르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들은 오로지 자기들이 받을 영광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와 같은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영광에 이르는 길을 그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영광의 길은 고난을 통해서 영광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일에 예수님은 몸소 확실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값없이 받는 은혜만을 사모합니다. 다시 말해서 고난을 당함이 없이, 자기 십자가를 짐이 없이, 그저 영광만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치신 영광의 길은 분명히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때의 고난은 병에 걸리거나, 사업에 실패하거나, 또는 자기의 잘못으로 당하는 고통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 때의 고난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고난을 이겨내면, 그 후에는 반드시 영광이 따라옵니다.

롬8:18 말씀과 같이, 현재의 고난은 장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고후4:17 말씀과 같이, 현재의 고난 곧 환난은 잠시 받는 것입니다. 경한 것입니다. 그러나 장래의 영광은 지극히 큽니다. 영원합니다. 그리고 중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이 가르치신 영광의 길을 늘 명심합시다.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잠깐의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야고보와 요한의 간청입니다(35~37절).


막10: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일을 여덟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앞에 나오는 일곱 가지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받으실 고난들이었습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는 고난 후에 찾아올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실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할 것입니다. 그런 후 그들은 예수님을 이방인들에게 넘겨줄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능욕할 것입니다. 침 뱉을 것입니다. 채찍질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죽일 것입니다.

이상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받으실 고난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신 지 삼 일 만에 살아나실 것입니다. 이는 고난 후에 찾아올 영광이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신 후에 영광을 얻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자,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이 때 사용된 동사 “나아오다”의 시제가 현재형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급한 심정으로 예수님에게 나아왔던 것입니다.

마20:20을 보면, 이 때 그들의 어머니도 함께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마27:56에 의하면, 그들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막15:40에 의하면, 그의 이름은 살로메였습니다. 그리고 요19:25에 의하면, 그는 예수님의 이모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세베대의 두 아들, 곧 야고보와 요한은 서로 사촌지간이었습니다. 아무튼 야고보와 요한은 평소에 자신들이 바라던 일이며, 또한 그들의 가족이 원하는 것을 예수님에게 요청하기 위해서 그들의 어머니까지 모시고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높이며 존경하는 뜻으로 부르는 칭호였습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무엇인가를 구할 때 “선생님”이라는 칭호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온 것도, 또한 그들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도 그들이 예수님에게 구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구하는 바를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에게 말씀드리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요구가 떳떳하지 못함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동료들, 곧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을 배려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오로지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일에만 급급했습니다. 그들의 별명은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별명대로, 그들은 불쑥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다짜고짜 다음과 같이 요구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에게 백지수표를 요구했던 셈입니다. 그 위에 얼마가 되든지 자기들이 필요한 액수를 적어 넣으면, 예수님은 그대로 다 지불해주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모한 요구였습니까?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는 아이들이 부모에게 조를 때 쓰는 방법입니다. “들어준다고 약속하시면, 말하겠어요. 그러나 약속하지 않으시면, 말하지 않겠어요.” 이런 식으로 그들은 예수님에게 떼를 썼던 것입니다.


막10: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은 사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더라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다 아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짐짓 그들에게 물어보셨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은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잘못된 욕망을 발설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그것을 통하여 그들을 가르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야고보와 요한은 한껏 고무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요구를 묵살해버리지 않으시고, 자신들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물어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잔뜩 기대하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예수님에게 아뢰었습니다.


막10: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구주로 믿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도 믿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이 그의 나라를 세우시며, 영광 가운데 그의 나라를 다스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의 자리를 요구한 데 있었습니다. 왕의 우편에는 왕 다음으로 존귀한 자가 앉는 법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존귀한 자가 왕의 좌편에 앉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그들 앞에도 수많은 성도들이 살았습니다. 크게 쓰임을 받은 인물들도 많았습니다. 또한 앞으로 그들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귀하게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을 바로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와 같이 간청을 한 데는 나름대로의 까닭은 있었을 것입니다. 이미 마19:28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때, 그들도 열두 보좌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 곳에서 험한 일을 많이 당하신 후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명 예수님은 그 후 삼 일 만이면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이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그들은 열두 보좌에 앉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과연 누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이야말로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충분히 앉을만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과 사촌지간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열두 제자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최 측근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도, 또한 예수님이 변화 산에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때도, 그들은 늘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물론 그 때마다 베드로도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주 예수님에게서 꾸중을 들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얼마든지 베드로를 따돌릴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제외된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은 자신들의 차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머니와 함께 와서, 자기들의 자리를 미리 굳히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그들에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됨을 가르치신 바 있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 모두가 똑같이 크게 되며, 똑같이 첫째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자기들이 높은 자리에 앉기를 바랐습니다.

물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끝자리에 앉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때 보아너게가 예수님에게 구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영광을 구하기에 급급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38절).


막10: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의 대답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먼저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의 무지함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자신을 예로 드시며, 그들의 무지함을 깨우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답에 나오는 두 부분을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그들의 간청이 무지함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구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가장 큰 영광을 구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역으로 말하면, 그들은 가장 큰 고난을 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해서만 영광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장 큰 영광을 얻으려면, 그들은 마땅히 가장 큰 고난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이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그들은 고난 없이도 영광을 얻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나아와 가장 큰 영광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실상은 가장 큰 고난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무지를 깨우치시기 위하여, 자신이 마실 잔과 자신이 받으실 세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자신을 예로 드신 것입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여기에 잔이 나옵니다. 시23:5 말씀처럼, 때로는 잔이 하나님의 은총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75:8 말씀과 같이, 때로는 잔이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마시는 잔은 어느 편에 해당하겠습니까?

막14:36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마셔야 할 잔은 모든 죄인들에게 내려질 하나님의 진노가 가득한 잔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마셔야 할 잔은 예수님이 당하실 대속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매우 쓴 잔이었으며, 지극히 큰 고난의 잔이었습니다.

곧이어 예수님은 자신이 받으실 세례를 말씀하셨습니다. 눅12:50 말씀처럼, 이것도 예수님이 당하실 대속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실 것입니다. 그리함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흘리실 피에 깊숙이 잠기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예로 드시며, 그들에게 영광의 길을 밝히 가르치신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고난의 잔을 마시며, 고난의 세례를 받으실 것입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원리는 분명합니다. 먼저 고난이며, 그 후에 영광입니다. 먼저 십자가이며, 그 후에 부활입니다. 따라서 야고보와 요한이 큰 영광을 얻으려면, 먼저 그만큼 큰 고난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뜻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고난의 잔을 마시며, 고난의 세례를 받을 것이다. 그런 후에 나는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너희가 내 보좌의 우편과 좌편에 앉으려면, 너희도 나처럼 고난의 잔을 마시며 고난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 너희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 당시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는 것이나 자신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며, “주여 그리마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자기들이 얻을 영광만을 바랐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시렵니까? 고난을 당하는 만큼 받게 될 영광은 커집니다. 그러나 당하는 고난이 없다면, 받을 영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결론입니다(39~40절).


막10: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예수님의 질문에 야고보와 요한은 서슴없이 대답했습니다. “할 수 있나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로 가실 때, 도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이 때 야고보와 요한도 같은 심정으로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마실 잔과 예수님이 받으실 세례는 대속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결코 그들은 예수님이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없으며, 예수님이 받으시는 세례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설령 그들이 생각했던 잔과 세례가 박해에서 오는 고난이라고 칩시다. 과연 자신들이 말한 대로, 그들은 박해에서 오는 고난을 감당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로잡히셨을 때,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얻을 영광만 바라보며, 선뜻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큰 소리를 쳤다가, 예수님를 세 번이나 부인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듯 섰다고 생각하면 넘어지기 쉽습니다.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기 마련입니다.  

슥13:7은 그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이 넘어질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 후에 그들에게 있을 일까지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성급하고 경솔한 대답을 했더라도, 예수님은 그들을 나무라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앞날을 내다보시면서, 오히려 그들의 말을 인정해주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예수님은 그들이 무슨 뜻으로 예수님이 마시는 잔을 마시며, 예수님이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며, 앞으로 그들이 당할 일을 간접적으로 그들에게 밝히신 것입니다.

행12:2 말씀을 보면, 헤롯 왕이 칼로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이로써 사도들 가운데 야고보가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계1:9 말씀을 보면, 요한은 밧모 섬에서 예수님의 환난에 동참했습니다. 그 당시 밧모 섬은 오늘날의 감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고난의 잔을 마셨습니다. 또한 고난의 세례도 받았습니다. 물론 그들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시니까, 모든 고난을 이겨낼 권능이 그들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따라서 분명 그들은 영광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은혜로 되어졌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면류관을 벗어서 예수님 앞에 바쳤을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막10: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왜 예수님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친척이라고 해서, 예수님의 최 측근이라고 해서, 또한 어머니까지 모시고 와서 예수님에게 조른다고 해서, 예수님이 그 자리를 주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사적인 이유 때문에, 아무에게나 임의로 그 자리를 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 되실 수가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상을 주십니다.  

그러면 누가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됩니까? 예수님은 이와 같이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20:23을 보면, 하나님이 그 자리에 앉을 사람을 준비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도록 예비하셨을까요? 대답은 자명합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가장 큰 고난을 당한 사람입니다. 고난을 당한 만큼 영광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영광의 길입니다.

빌2:8 말씀처럼,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온전한 희생제물로 드리시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빌2:9 말씀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셔서, 예수님을 영광의 보좌에 앉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우리는 그저 값없이 받는 은혜만을 사모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받으려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날마다 예수님의 고난에 힘써 참여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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