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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
고전1:26-31
(2000/8/20)

먼 길, 그러나 가야 할 길

저는 지난 한 주간을 멍한 상태에서 지냈습니다. 꿈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고려항공 소속의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내리고, 대한항공기가 평양 순안 공항에 내리고, 남북의 흩어진 가족들이 눈물의 상봉을 하는 광경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50년, 참 긴 세월이었습니다. 50년이라면 제게는 아직 살아보지 못한 세월인데, 한 핏줄을 나눈 형제 자매가, 부모 자식이, 남편과 아내가 남북으로 나뉜 채 그리움만 가슴에 품고 살아온 세월이 50년이라니요. 기가 막혔습니다. 흩어진 가족이 없는 저도 그랬는데, 이산 가족들의 감회야 오죽했겠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는데요, 이번 주 설교 준비하는 게 참 어려웠어요. 제 속에서 말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어요. 무슨 말을 하겠어요. 우리가 다 보았는데요.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딴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요.

그런데 제 속에서 자꾸만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5) 하는 말씀이 떠오르는 거예요. 저는 다만 '아멘' 했지요. 하나님은 어쩌면 남과 북의 가족들이 흘리는 눈물을 통해서 이 땅에 통일이라는 선물을 주시려는 건지도 몰라요. 이념, 경제, 정치, 문화…이게 다 중요하긴 해요.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근본적인 신뢰이고, 신뢰는 사랑에서 온다고 생각해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는 한 분단의 세월은 영원할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메었어요. 물론 곧 통일이 올 거라는 낙관적 기대는 삼가야 해요. 우리는 먼 길을 걸어가야 할 거예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광야라는 하나님의 학교에서 연단 받아야 했던 것처럼요. 하지만 이제 우리는 통일의 새 땅을 목전에 두고 있어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땅, 그 통일의 땅에 들어갈 용기예요. 우리에게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필요해요. 그들은 10명의 정탐꾼들이 '우리는 할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했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가나안을 차지할 수 있다고, 용기를 내라고 백성들을 격려했어요.

역사 구원에 가장 긴요한 것

이념이나 정치적 이해관계, 경제적 이해관계가 풀 수 없었던 문제를 눈물이, 그리움이 풀어줄 것이라는 믿음은 너무 순진하게 들릴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게는 자꾸만 이 소리가 들려와요.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함석헌 선생님이 한번은 이렇게 말했어요.

"역사 구원에 가장 긴요한 것은 强도 아니고 智도 아니다. 언제나 싸움의
원인, 멸망의 원인은 强에 있고 智에 있다. 그것은 반드시 자기보다 강하
고 간악한 强과 智의 대적을 불러내고야 만다. 그러므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이다."

누가 강한가를 다투는 자리에 평화는 없어요. 이긴 자의 기쁨 뒤에서 패자는 눈물을 흘리고 설욕을 다짐하기 때문이에요. 누가 똑똑한가를 다투는 자리에는 인격이나 덕성이 끼어 들 자리가 없어요. 상대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한 조급함과 두려움만 있게 마련이에요.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 했어요. '溫'하고 '柔'한 것이 '冷'하고 '强'한 것보다 생명에 가까워요. 아이가 어른보다,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끈질긴 생명을 보이지요? 생명의 질서는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반대인 경우가 많아요.

누구의 손에 붙들려 살고 있나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아주 귀한 교훈은 이거예요. 세상에서는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사람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주 소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지 않아요? 세상의 어떤 사람도 쓸모의 관점에서 취급되어서는 안 돼요.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전령인 교회를 세우실 때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이들을 먼저 부르셨어요. 그들은 자기들이 별 것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아요. 역사는 이들처럼 '自我'에 갇히지 않은 이들이 이루어나가는 게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
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1:27-28)

중요한 것은 그가 누구의 손에 들려졌느냐 입니다. 길가에 뒹굴던 돌멩이 몇 개가 다윗의 손에 들려졌을 때 그 돌멩이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게 되었어요.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이지요. 미디안의 목동이었던 모세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렸을 때 그는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이끌 수 있었어요. 우리는 자꾸만 내가 누구의 손에 붙들려 살고있나를 물어야 해요.

아담의 평화

1996년에 돌아가신 헨리 누엔 신부님은 참 훌륭한 분이셨어요. 그분이 쓰신 책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도 감동이려니와, 그분의 삶 자체가 진리에 대한 맹렬한 추구였기 때문에 저는 그분을 좋아해요. 그분은 예일 대학교의 교수였는데 어느 날 자기의 안정된 삶에 불안을 느껴요. 내가 정말 믿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 건가? 그는 자기의 소명을 확인하고, 자기가 고백하는 신앙을 몸으로 살아보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예일대학의 종신 교수직을 내놓고 캐나다에 있는 라르쉬 공동체에 들어갔어요. 그곳은 정신지체장애우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어요. 그는 그곳에 머물면서 아담이라는 사람을 돌보게 되었어요.

아담은 장애가 아주 심해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잠시도 살 수 없었어요. 아담과 보내는 시간이 누엔에게는 힘겨웠어요. 아무런 감정표현도 하지 않는 아담과 함께 사는 일은 무척 당혹스러웠어요. 양치질, 옷 갈아 입히기, 약 챙겨 먹이기, 밥 먹이기, 휠체어에 태워 치료실에 데려가기. 날마다 반복되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 일은 자칫 '내가 뭘 하고 있나?' 하는 회의를 낳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누엔은 달랐어요. 일개월 가량이 지난 후 누엔은 자기 삶에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았어요. 사람을 당혹스럽게 하는 사람, 차리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사람, 인간의 치욕을 드러내는 바로 그 아담이 자기의 가장 가까운 동료로 인식되기 시작하는 거였어요. 아담이라는 낯선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드는 대신 자기 속에 사랑이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그는 분명히 의식하게 되었어요. 다른 일을 할 때는 자기의 전 존재를 투입하지 않을 때가 많았지만 아담과 함께 있는 시간은 아주 소중한 시간이 되었어요.

벌거벗은 그를 안아 욕조에 넣고, 그의 가슴과 목에 물을 끼얹어주면서 누엔은 아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그리고 아담에 대해 느끼는 온갖 감정들도 이야기했어요. 그러면서 누엔은 생각과 감정을 넘어서는 어떤 공감이 자기들 사이에 생긴 것을 느꼈어요.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시19:2-4)

히브리의 시인이 말하는 것을 누엔은 아담과의 생활을 통해 경험한 것이지요. 아담과 함께 있는 시간이 누엔에게는 평화의 시간이었어요. 아담이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평화였습니다. 아담이라는 완전히 무력한 존재가 그들 가운데 있을 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평화를 맛보았어요. 아담 때문에 사랑과 친절과 우의에 찬 말들이 오고갔고, 아담 때문에 사람들은 인내를 배웠고, 아담 때문에 용서를 배웠고, 아담 때문에 그들은 미소와 눈물을 경험했어요. 아담의 무기력함이야말로 라르쉬 공동체가 누리는 평화의 뿌리였던 거지요.

함이 없는 행함

놀랍지 않습니까? 아담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저 그 자리에 있음으로 해서 평화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같은 사람을 통해서도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힘없고, 배운 것 없고, 멸시받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왜일까요?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1:29)

인간 역사에서 가장 슬픈 일은 인간 관계를 지배/피지배 관계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깔보고 함부로 대하고 짓누르려고 해요. 자기보다 나은 사람 앞에서는 꼬리를 살랑거리고 입가에 미소를 띠고 주변을 맴돌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지배의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거예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라.(마20:26)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

인간 관계의 근본은 서로 알아줌이요, 보살핌이요, 섬김임을 예수님은 온 몸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데서 마음의 병이 생겨요.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불화가 생겨요. 상대방의 연약함을 지배의 기회로 여기지 않고, 돌봄과 사랑의 마음으로 감싸 안는 곳에 평화가 깃들게 마련입니다. 노자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을 부린다(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고 했어요. 또 "부드러움을 지키면 이를 일컬어 강하다"(守柔曰强) 한다 했어요. 부드럽다는 것은 무엇에도 거역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약함으로 강함을 이기는 것, 십자가로 죽음을 이기는 것, 사랑으로 미움을 넘어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 어느 누구도 이 땅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화해와 용서와 하나됨의 시작을 나의 공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김대중 대통령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입니다. 눈물과 그리움은 약해 보이지만, 50년 이데올로기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이 있어요.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내가 주도권을 쥐겠다는 욕망이에요. 숨겨진 지배의 욕망을 경계해야만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의 손에 들려 있습니까? 하나님의 지혜에 몸과 마음을 맡기십시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의 지혜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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