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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기석목사

자부심의 덫

자부심의 덫
눅7:29-35
(2000/9/3)

유목민의 시대

21세기를 가리켜서 '유목민'의 시대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유목민은 어디 한 곳에 정착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물과 목초지를 찾아 끝없이 이동하면서 삽니다. 그들의 삶은 단출합니다.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동에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의미가 다르긴 하지만 현대인들도 끝없이 이동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흐름에 재빠르게 자기를 맞추어 갑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길거리의 가게 간판이 바뀌는 시간이 점점 짧아집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간판은 점점 커지고, 상호도 자극적으로 변해갑니다. 바야흐로 변신의 세월입니다. 홍길동이 따로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다른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얼굴을 뜯어고치기도 하고, 이름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자기의 장점을 알리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합니다. 요즘은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 '자기소개서'를 요구합니다. 특별 전형으로 학생을 뽑는 대학 입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이들은 고민합니다. 어떻게 자기를 돋보이게 드러낼 수 있는가. 자기가 누구인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어떻게 포장해서 상품화할 수 있을까, 이게 문제입니다. 포장지 색깔은 점점 화려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는 자기 머리를 자기가 쓰다듬는 것을 격려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아무러하든 자화자찬은 위험합니다.

위험한 자부심

'나만큼 의로운 사람이 어디 있냐?'
'나만큼 순수한 사람이 어디 있냐?'
'나만큼 똑똑한 사람이 어디 있냐?'
'나만큼 헌신적인 사람이 어디 있냐?"

이런 경우는 병적인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았어요. 아시다시피 그들은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이었지요. 그들은 자기들의 삶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살았어요. 사실 그들의 삶은 자부심을 가질만해요. 자부심(自負心)이란 '스스로 제 가치나 능력을 믿는 마음' 아니에요? 그들은 율법에 철저했고, 생활에 규율이 있었어요. 문제는 자기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병적으로 표현되는 것이지요. 바울 사도는 자랑하는 이들에게 말했어요.

각 사람은 자기의 행실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갈6:4)

향가 연구로 유명한 양주동 선생님은 자기를 '국보'라고 자부했고, 도올 김용옥은 자기만한 선비가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진짜 선비는 그러는 게 아니지요. 내로라 하는 자부심은 사탄에게 기회를 주기 쉬워요. 사탄이 하는 일은 다른 이들과의 친밀한 사귐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귀를 막고, 담을 쌓고 살아요. 자부심이라는 게 자칫하면 다른 이들에 대한 멸시로 변하기 쉽습니다. 남들은 다 시시해 보이는 거지요. 그들은 남들에게 배우려고 하지 않아요. 할 이야기만 있고 들을 이야기는 없어요.

갑각류를 닮은 사람들

동물 가운데 갑각류(甲殼類) 아시지요? 갑각류는 내부에 뼈가 없기 때문에 물렁물렁한 기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보호 기능이 뛰어난 키틴질 갑각 안에 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를 지켜주는 그 딱딱한 껍질 때문에 외부 세계와 잘 교류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교조주의적인 사람들은 갑각류를 닮았어요. 자기 나름대로의 형식과 틀 속에 머물면서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삽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만한 여백이 없고, 다른 이들의 고통과 슬픔에 반응할 줄도 몰라요. 자기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다 배척합니다. 그들의 상태를 예수님은 적절한 비유로 드러내셨어요.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
였다.(32)

그들은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남들에 대한 법관이 되기로 자처하고 살아요. 경건의 옷을 입고 사람들의 살이를 판정하는 것이지요. 그들의 판단기준은 매우 자의적(恣意的)입니다. 제 멋대로라는 말입니다. 금욕적으로 사는 세례 요한을 보고는 귀신들렸다고 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신명나게 살아가는 예수님을 보고는 점잖치 못하다고 비난합니다. 그들의 눈은 칼을 닮았어요. 모든 것을 갈라내요. 유대인과 이방인, 의인과 죄인, 남자와 여자…. 그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문제의 인물이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낙인을 찍습니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 우리가 많이 보았던 광경입니다.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가차없이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그를 매장했던 것 기억나시지요? 낙인을 찍는 이유는 그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해서 지배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찍힌 낙인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세리와 죄인의 친구'입니다.

여러분, 유대교에서도 그렇고 중세 수도원 전통에서도 그렇고, 경건을 추구하는 사람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식탐'(食貪)이었어요. 음식에 게걸스럽고, 포도주를 마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혐의를 받게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예수님의 이미지를 망가뜨리려고 그런 별명을 붙인 거예요. 이런 걸 인격 말살(character assassination)이라고 해요. 그들은 더 나아가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낙인까지 찍음으로서 예수를 기피 인물로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들의 그런 낙인찍기가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셨어요. 세리와 죄인들과도 허물없이 어울리셨어요. 바리새인들의 말은 그러니까 틀림은 없어요. 물론 악의를 품고 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말이예요.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 있습니다.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인생을 즐기며 사는 것이 비난받아야 할 일인가?"

엘리트의 책임

나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나와 여러모로 다른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 것이 잘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들과 어울려 살면서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우리는 답해야 합니다. 세상이 어지럽다고 산으로 들어가버리는 이들의 뒷모습이 아름다운지, 어지러운 세상을 조금이나마 밝히려는 마음을 품고 산을 내려오는 이의 앞모습이 아름다운지,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마다 답은 다를 것입니다. 大學 제1장은 공부하는 사람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之於至善이니라.
큰 배움의 길은 밝은 마음을 더욱 밝히는 것이고, 사람들과 하나되는 데
있고, 지극한 선에 머무는 데 있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흔히 말하는 엘리트들입니다. 그들은 밝은 마음을 더욱 밝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至善) 안에 머물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한가지가 부족했습니다. 티끌 속에 뒹굴고 있는 사람들을 가까이 해 그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이끄는 책임을 소홀히 한 것입니다(親民). 그들은 "까마귀 노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식의 태도를 가지고 삽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신 것은 다른 이들의 삶을 판단하고 정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남다름을 뽐내라는 것도 아닙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온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고는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출34:29-35). 전할 때는 빛나는 얼굴로 하지만 백성들과 일상의 삶을 살 때는 자기 빛을 가린 겁니다. 시체말(時體말, 그 시대의 풍습이나 유행)로 사람들 앞에서 '光'내는 데는 취미가 없었던 것이지요.

親民의 삶

예수님은 親民하는 분이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멀리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 심지어 품행이 좋지 않다고 소문난 여성까지도 친교의 자리에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열고 주님과 만난 이들은 다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젠 체 하는 태로도 그들을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웃고 울면서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희망과 사랑의 씨앗을 심어주셨습니다. 바리새인의 백색 순수가 위대합니까? 사람들과 사귀면서 그들 속에 아름다움을 창조하시는 예수님이 위대하십니까? 여러분,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려면 나와 만나는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다른 사람의 허영심을 부추기거나, 사람의 품성을 타락시키는 일에 관심을 갖도록 한다면 문제입니다. 마음의 빗장을 더 굳게 지르고 살도록 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은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랑을 전염시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신뢰를 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따뜻함을 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늘을 외경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로라 하는 헛된 자부심이 때로는 우리의 발목을 잡아채는 덫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깨끗하고, 나는 의롭다는 생각이 다른 이들을 배척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조심하십시오. 다른 이들에 대한 무자비한 판단자가 되는 순간 우리는 악마의 손아귀에 확고히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자기 빛을 가리고, 죄인으로 규정된 이웃들 속에 살면서 그들을 아름다움의 길로 이끄셨던 예수님의 길을 따라 걷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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