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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기석목사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로마서1:16-17
(2000/9/10)

경희대학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행상을 하는 아주머니들을 바라보며 걷다가 문득 '참 고단하게들 사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쾌활하고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옥수수 사세요."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였습니다. 나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아주머니를 바라봄으로써 거절 의사를 완곡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맑고 투명한 음성으로 내 뒤통수를 향해 외쳤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뒤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저는 속으로 "감사합니다" 하고 화답했습니다. 기분이 좋았어요.

길거리에서 혹은 전철에서 탁한 목소리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하지만 자기 생업의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그 아주머니의 음성이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주머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자기를 드러냈습니다.


우리 신앙의 현주소
길을 걸으면서 생각했어요. 나는 과연 낯선 이들 앞에서 당당하게 '나는 목사입니다' 하고 말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씀드려서 자신이 없어요. 나의 신분이 드러나면 사람들이 일시에 내게 손가락질을 해댈 것 같은 두려움을 느껴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요. 기독교인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기 때문이지요. 요즘 기독교인이 낀 술자리에서는 안주를 시키지 않는대요. 기독교를 씹는 것만으로도 술안주는 충분하다더군요. 세상을 탓할 것도 없고,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경솔한 처신을 욕할 것도 없어요. 그게 세상에 비친 한국 기독교의 실상이라면 달게 감수해야지요. 뿌린대로 거두는 거 아니겠어요?
·권력형 비리에 연루된 신자들
·사이비 종파들의 번성
·또 다른 권력욕의 표현인 교회 세습문제
·바른 소리 하는 이들을 黜敎시킨 순복음교회

많은 젊은이들이 한국교회에 대해 절망하고 있어요. 그들은 화가 나 있어요. 가장 아름다워야 할 기독교가 추한 악취를 풍기고 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고, 자기들도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구정물을 뒤집어 쓴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는 거예요. 그래요. 그들의 분노는 정당해요. 사실 그런 분노조차 없다면 젊은이가 아니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달아나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달아나는 것은 문제에 접근하는 바른 방법이 아니에요. 오히려 이 땅의 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 뜨거운 열정을 가져야 해요. 자기를 갱신하고, 교회를 갱신하려고 결단해야 해요. '자기 닦음'과 '자기 갱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맹목적 분노는 자기를 해칠 뿐이에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부끄러워 하는가?
초대 교회에서 사람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한 것은 십자가라는 걸림돌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의 희생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납득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십자가는 어리석음이었어요. 그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십자가, 한 젊은이의 좌절된 꿈이 핏방울로 아로새겨진 그 십자가는 실패한 인생의 상징처럼 보였어요. 이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원수들을 물리쳤다면 몰라도 그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돌아가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한국교회 교인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우리의 삶의 경험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성공의 사다리 위를 향해 올라가려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생업의 현장에 있는 기독교인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더 큰 충성을 바칩니다. 주님은 다른 이를 복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기 살 길을 찾으라고 가르칩니다. 주님은 세상의 약한 자들 곁에 다가서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출세를 위해 힘있는 사람 쪽에 줄을 서라고 가르칩니다. 많은 성도들이 신앙에 충실하기 보다는 세속적인 가치관에 충실하려 합니다.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신앙을 유보하는 일이 잦아집니다. 그러다보니 자기가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스스로도 의아해 합니다. 나름대로의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목마름을 가지고 삽니다. 하지만 그 목마름을 해갈할 수 있는 올바른 길에 설 용기를 갖지 못합니다.

2) 기독교 신앙이 유치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텔레비전을 보면서 저는 암담함을 느낍니다. 그곳에서 설교를 하고 간증을 하는 이들을 보면서 저는 믿지 않는 이들이 그 프로그램을 본다면 과연 믿을 마음이 날까 의심스럽습니다.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텔레비전 부흥사들의 두 가지 전략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사람들 마음 속에 두려움을 심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저질 코미디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입니다. 심령의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숙성한 끝에 나오는 이야기를 듣기 어렵습니다. 그런 설교를 듣는 이들의 열광적인 반응도 비정상적으로 보입니다.

기독교 신자의 수가 1400만이랍니다. 감리교인은 138만 명이구요. 그러나 그중에 예수를 따라 살려고 용맹정진하는 신자는 얼마나 될까요? 사람들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어요. 예수를 믿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 넓은 길을 확보하려 해요. 땅 집고 헤엄치려는 것이지요. 땅 집고 헤엄치는 동안은 수영의 참 맛을 알 수 없어요. 빠지면 익사할 위험이 있는 창파에서라야 비로소 수영의 맛이 나타나는 거예요. 진리의 바다 깊은 곳에 뛰어들어 한번 목숨걸고 믿어볼 기개가 있어야 우리는 예수의 복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요.

3)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했어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복음은 힘이에요. 어떤 힘이지요? 자유하게 하는 힘이고 사랑하게 하는 힘입니다. 자유는 얽매인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에 매여 삽니다. 돈, 체면, 출세, 미움과 사랑, 근심 걱정…우리는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보려면 저게 걸리고, 저렇게 해보려면 이게 걸려요. 그러나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고 나면 삶이 달라져요. 바울은 고린도후서6장에서 기독교인의 실존을 이렇게 말합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
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8b-10)

또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 대한 의구심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할 여유를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어요.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집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살지만, 그들의 삶의 뿌리는 위에 있어요. 그 위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요.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 어떤 경우에도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힘, 이것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어요. 복음을 진정으로 영접한 이들은 그런 능력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런 능력을 체험한 사람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아요. 세상에 뭐라 하든 복음의 진실 안에서 빛을 발하며 사는 거지요. 이걸 가리켜 바울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했어요.


구심운동과 원심운동의 조화
여기서 義人은 '의리와 지조를 굳게 지키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 것이에요. 하나님은 자기의 죄의 깊이를 자각하고, 당신께 돌아오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주셔요. 그들을 받아주시는 거지요. 어느 분은 구원이란 "받아들여짐의 체험"이라고 했어요.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義認'(justification), 곧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거라고 말해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에 받아들여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자기를 갱신해 나가요. 이 사람의 과정을 가리켜 '聖化'(sanctification)라고 해요.

저는 사람이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구심운동과 원심운동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삶의 구심운동은 하나의 중심을 향해 회귀하는 힘이에요. 우리 삶이 아름다우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 끝없이 돌이키지 않으면 안돼요. 산을 오르는 알피니스트들이 베이스캠프를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처럼,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딘가를 늘 확인해야 해요. 그런데 돌아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우리 삶을 성화해 나가려는 치열함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일종의 원심운동이지요. 정지용은 [나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해요.

얼골이 바로 푸른 한울을 우러렀기에
발이 항시 검은 흙을 향하기 욕되지 않도다

대지를 딛고 서서 하늘을 우러르는 것, 이것이 기독교인의 실존이에요. 여러분, 세상이 어둡다고 원망하기보다는 작으나마 등불 하나를 켜드는 게 옳은 태도 아니겠어요? 지금 기독교의 현실을 보면서 부끄러워만 마시고,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밝히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힘써야 할 때입니다. 아르키메데스는 누가 지구 밖에 입각점을 놓아준다면 지구를 들 수 있다고 했다지요? 하지만 그런 입각점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부끄러워 하면서 밖으로만 맴돌지 마십시오. 오히려 지금 우리의 실상을 보았으니, 이제 비를 드십시오. 먼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허섭스레기들을 치워내고, 청파교회에 있는 쓰레기들을 치워냅시다. 길에서 넘어진 사람은 길을 딛고 일어나야 하듯,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뿐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믿어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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