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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기석목사

지금은 조정의 시간

지금은 조정의 시간
창21:1-7
(2000/9/17)

어울림
교회 옆 골목을 걷다보면 분꽃이 예쁘게 핀 집이 있습니다. 나는 분홍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그 꽃을 보면 왠지 애잔한 느낌이 들면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분꽃을 보면서 왜 생뚱맞게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하는 가사가 생각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제도 우산을 받고 그 집을 지나치다가 동요 [꽃밭에서]를 불렀습니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문득 '어울리게'라는 표현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채송화 봉숭아처럼 소박한 꽃과 더불어 피어있는 나팔꽃을 보고 '어울리게 피었다'고 한 작사자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다정했습니다. '어울린다'는 것은 여럿이 함께 섞인 모양새가 격에 맞아 자연스럽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 속에는 독주나 독차지에 대한 욕망이 없습니다. 자기가 최고라고 하는 공격적인 자부심도 없습니다. 어울림은 자기 몫을 누리되 다른 이들의 자리를 빼앗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과연 '어울리게 살고 있나?' 하나님께서 맡겨주신(稟賦하신) 삶의 자리에서 다른 이들과 잘 어울리면서 살고 있나? 얼마 전 산길을 걷는데 제 집사람이 탄성을 질러요. 웬일인가 했더니 흰 눈을 맞은 듯 온 몸이 하얀 버섯을 가리키며 '참 예쁘다'고 하더군요. 정말 눈에 띄더군요.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눈에 띌 정도로 화려한 버섯은 대개 독버섯임을 말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남들 앞에 자기를 과시하려고 온갖 치장을 하는 사람치고 남과 조화를 이룰 줄 아는 사람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14일 타계하신 소설가 황순원 선생님은 경희대학이 증정하려는 명예박사학위를 거부했다지요? 정부가 수여하려한 훈장도 거절하고요. 또 평생 잡문을 쓰지 않고 언론사와의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지요? 그는 소설로서만 말하려고 한 것이지요. 그는 남들 앞에 '나는 이런 사람이요' 하고 나팔을 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중뿔나게 남 앞에 나서는 법이 없었지만 많은 이들의 사표(師表)가 되었습니다.


비동시성, 비동일성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인물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아브라함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아브라함은 영웅적인 면모를 가진 사람도 아니고, 남보다 출중한 인격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참 평범합니다. 그저 마음씨 착한 이웃집 아저씨 같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셨습니다. 성경의 놀라운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에게 남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가 참 어리무던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아닐까요? 그는 자기 이익을 위해 계산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는 아무 조건도 내걸지 않고 주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자기 삶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요? 그가 사리에 밝은 사람이었다면 그럴 수 있었겠어요? 하나님도 이렇게 당신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자신의 생 전체를 맡기는 이들에 대해서는 부담을 느끼시나 봐요. 하나님은 그에게 이런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12:2).

참 귀한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이런 약속을 받았어요. 어찌 보면 인생의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는 나이였어요. 이 약속을 지키시려면 하나님이 좀 서두실 필요가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희망의 단초가 될 자식을 주지도 않고, 정착하여 살만한 땅을 주시지도 않아요. 고향을 떠난 이후 그는 고단한 나그네로 세상을 떠돕니다. 그 동안 별의별 일을 다 겪습니다. 이방의 권력자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조카 롯과 헤어지는 아픔을 맛보기도 합니다.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 때문에 가정 불화를 겪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했고, 하나님의 큰 약속을 받은 사람의 인생이 어쩌면 이렇게도 안 풀리지요?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과 우리의 손발이 잘 안 맞는 것 같아 속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여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 맞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과 맞지 않습니다. 이 비동시성과 비동일성이 신앙적 회의를 낳게 만듭니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지만,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별다른 기대를 안 갖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것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말해요. 내년 이맘 때쯤이면 품에 아기를 안게 될 것이라고요. 아브라함은 그 말에 별 반응이 없어요. 사라는 그 말을 실없는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웃었어요. 하지만 다음 해,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가 되던 해에 두 사람 사이에 이삭이 태어났어요.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자꾸 계산하지 마세요. 자꾸 꼬치꼬치 물으면 다쳐요. 오늘 본문은 그것을 "말씀대로"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식을 주신 것은 그를 부르신지 무려 25년이 지나서예요.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어요. "이 긴 기다림의 세월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서두르지 않으시는 하나님
먼저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해도 서두르시는 법이 없다는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하겠어요. 하나님은 즉흥적으로, 기분 내키는대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해도 다지듯 꼼꼼하게 해나가십니다. 그러니 당신의 일꾼들을 부르실 때도 당장 부려먹기 위해 유능한 사람들을 부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위해 사람을 선택하고 나면 그를 역사의 흐름에 내던져 연단하십니다. 그에게 있는 헛된 자부심을 깨뜨리고, 거칠고 조급한 마음을 부드럽고 여유있게 변화시키려고 시련의 용광로 속에 밀어 넣습니다. 때로는 고독과 외로움의 골방 속에 밀어 넣기도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태어났지만 그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은 미디안 광야에서 고독과 좌절의 세월을 보낸 후였습니다. 미디안 광야생활을 통해 모세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격정에 못 이겨 사람을 때려죽일 정도로 급했던 그의 성격은 허허로운 광야 체험을 통해 부드럽게 변화되었습니다. 오죽하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니라"(민12:3) 했겠어요.
·다윗은 사무엘을 통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왕으로 즉위하기까지 근 10년 이상을 풍찬노숙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그 동안 다윗은 밑바닥 인생들의 아픔과 한을 온 몸으로 경험했고,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 강인함을 배웠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전도자로 부름을 받기까지 10여 년의 세월을 숨죽이고 살았습니다. 아라비아 사막에 머물기도 하고, 자기 고향에 머물기도 하면서 그는 주님과 깊이 사귀었습니다. 그 십 여 년의 시간이 그를 예수의 일꾼으로 키웠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서두시지 않습니다. 서두르는 것은 사람의 버릇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조정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25년, 모세의 40년, 다윗과 바울의 10여 년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들의 인격을 다듬는 조정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여백 만들기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이 간섭하실 수 있는 여백을 우리 속에 마련하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떤 일을 우리에게 맡기실 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회피하지 마십시오. 자꾸 회피하다보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말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만나려고 연락을 해 올 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회피한다면 그는 내게 마음을 닫고 말 것입니다. 아름다운 관계는 늘 자기 포기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여리고 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못 본 체 지나쳤던 제사장과 레위인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바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리고에서의 스케줄이 꽉 짜여 있었기 때문에 강도 만난 이 곁에 다가설 여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다지 인간적인 사람들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요구 앞에서 자기 삶의 스케줄을 조정하기를 꺼리는 사람들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손해를 감수하면서라도 하나님의 요구에 우선적으로 응답할 때 우리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다른 차원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시간에 여백을 만드십시오.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고요한 시간을 하루에 한 차례 이상은 꼭 만드십시오. 그리고 늘 그럴 수는 없겠지만 다른 이가 부를 때마다 바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물질 사용에도 여백을 만드십시오.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시는 주님을 위해 사용할 것을 늘 마련하고 사십시오.
·여러분의 생각에도 여백을 만드십시오. 내가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데서 마음의 병이 생깁니다. 나도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다른 이로부터 배우려고 하십시오. 마음을 열고 모든 이에게 배우려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 영혼의 집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오랫동안 힘써온 일에 결실이 없어 괴롭습니까? 그렇다면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조정하라고 요구하시는 건가? 가야금의 아름다운 소리를 들으려면 현을 조율해야 하듯이 아름다운 인생을 살려면 우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우리 삶을 조율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요구에 어울리는 생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은 조정의 시간입니다. 조정의 시간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게 됩니다. 그것은 정말 멋진 일입니다. 조정의 시간이 끝나자 아브라함은 이삭을 품에 안게 되었습니다. 그는 복의 매개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 즉 두루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두루 잘 어울리는 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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