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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기석목사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얼굴
계1:12-16
(2000/10/1)


보고 싶은 얼굴
우리 고전 {심청전}에 나오는 심봉사의 소원은 눈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심봉사는 夢雲寺 부처님의 영험함을 믿고 공양미 삼백 석을 약속합니다. 눈 뜬 후에 대체 무엇이 보고 싶길래 그런 불가능한 약속을 했을까요? 진해 벚꽃놀이 구경? 내장산 단풍 구경? 종로 거리의 인파? 천하절경이라는 금강산 구경? 아니면 뺑덕 어미 얼굴? 아닙니다. 심봉사의 소원은 하나입니다. 일각이라도 광명을 볼 수 있다면 "내 딸 淸이의 얼굴을 보리라." 그 얼굴 하나 보고 싶어 심봉사는 애태우는 겁니다.

여러분, 보고 싶어 못견디는 얼굴이 있습니까? 얼굴에 대해 생각하는 데 뜬금없이 이런 노래가 떠오르더군요.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는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무심코 그린 얼굴

정말 그리운 얼굴은 우리 마음에 노크소리도 없이 무시로 드나듭니다. 동그라미 그리려는데 무심코 그리게 되는 얼굴. 여기서 '무심코'라는 말이 기가 막히지 않아요? 일부러, 의도를 가지고 한 게 아니에요. 무심코, 그냥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것은 자기 속에 그 사람 생각이 가득차 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인생이 참 신날 거예요. 힘겨운 일이 있어도 그가 있으니 견딜 수 있겠지요. 그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은 무지개빛이 되는 거지요. 이전부터 암송하고 있던 시가 생각납니다.

하루가 한 생애 못지 않게 깁니다
오늘 일은 힘에 겨웠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산그림자 소리없이
발 밑을 지우면 하루분의 희망과 안타까움
서로 스며들어 허물어집니다

마음으론 수십 번 세상을 버렸어도
그대가 있어 쓰러지지 않습니다
(구광본, [귀가] 전문)

이런 이가 있다는 것은 우리 생을 얼마나 든든하게 하는지요? 그런데 지나다니는 사람들 얼굴을 보면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를 않더군요. 재재거리며 걷는 아이들의 싱그러운 표정이 없다면, 어른들만 사는 세상이라면 거리는 온통 회색빛일 거예요. 어른들의 얼굴을 보세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거나, 피곤에 지친 얼굴들이 많아요. 남의 얼굴을 볼 것도 없어요. 거울 속에서 퀭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도 마찬가지더군요. 환한 얼굴을 만나고 싶어요. 얼굴에 꽃등 하나 켜든 것처럼 항상 환한 그런 얼굴 말이에요. 그 얼굴만 보면 세상 시름을 잊게 될 얼굴, 못난 내 모습을 잊게 될 얼굴, 마주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환해지는 그런 얼굴 말입니다.


요한이 본 얼굴
요한은 그 얼굴을 보았습니다. 유배지인 밧모섬에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몸을 돌이켰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화가와 시인들이 그려내려했던 지상의 예수님이 아니라, 하늘에까지 높이 올려진 그리스도,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은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셨습니다.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를 상징합니다. 어둔 세상을 밝히는 일이 교회의 존재 이유임을 촛대는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매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의 죄를 씻어 없애는 제사장이시며, 우리 삶에 대한 심판자이심을 드러냅니다.
·주님의 머리와 털은 흰 양털 같았고, 눈과 같았다고 합니다. 흰 색은 순결과 카리스마적인 광채를 뜻합니다. 주님은 세속의 모든 어둠을 넘어서 완전한 세계에 이르신 것입니다.
·주님의 눈은 불꽃 같았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그분의 눈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죄인들에게 그 눈은 두려움의 눈이겠지만, 주님의 긍휼을 바라는 이들에게는 사랑의 눈일 것입니다.
·주님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았습니다. 이 든든한 발은 흔들리지 않는 확고함을 뜻합니다.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것 같아 늘 조마조마한 우리들을 안고 계신 주님의 발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았습니다. 출렁이는 파도 소리처럼 주님의 음성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시인이 일찍이 노래하지 않았던가요?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19:2-3)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좌우의 날선 검은 하나님의 말씀(Word of God)을 뜻합니다.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는(히4:12) 말씀 말입니다.
·한 마디로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은 수평선 너머에서 해가 힘있게 솟아오르는 것처럼 장엄했습니다. 온 세상의 만물을 두루 비추어 만물을 살게 하는 해처럼 주님은 생명의 근원으로 드러나고 계십니다.

가진 것 없이 척박한 팔레스타인 땅을 떠돌던 예수님,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이처럼 변화된 것을 보면서 요한은 자기의 고난이, 혹은 성도들이 겪는 고난이 무의미한 것이 아님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예수 얼굴 그리기
사람들마다 예수님의 얼굴을 다르게 그립니다. 각자가 만난 예수님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팔레스타인의 농민 혁명가로 그립니다. 어떤 이는 그 시대의 인습적인 지혜를 뒤집어엎는 전복적인 현자(賢者, Sage)로 그립니다. 우울한 종교인의 얼굴로 그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휴머니스트로 그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 합해도 예수님을 온전히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예수상을 그리는 일들은 참 중요합니다. 며칠 전 [광수생각]이라는 만화가 참 재미있더군요.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빠, 제가 하느님을 그려볼게요!" "아무도 하느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데…?" 아빠는 뜨악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아이는 말합니다. "걱정할 것 없어요. 내가 그린 걸 보면 알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마지막에 만화가가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모르는 것도 압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얼굴을 잘 그리지 못하는 것은 너무 어른이 돼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래요,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그린다는 데, 우리가 주님의 모습을 그리지 않는다면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 거예요.


성경에서 만나는 예수의 얼굴
저는 성경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만납니다. 그 얼굴 하나 하나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일에 시달려 눈이 흐릿해졌을 때, 맑은 눈을 빛내며 율법학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소년 예수의 해맑은 얼굴을 기억합니다.
·저물녘 긴 그림자를 끌고 터덜터덜 걷고 있는 사람처럼 맥없이 살고 있을 때, 이른 새벽 한적한 곳을 찾아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내려오시던 샛별 같은 얼굴을 기억합니다.
·작은 성공과 실패 앞에서도 감정의 동요를 보이는 나의 작음이 아파질 때면, 소용돌이치는 바다 한복판에서 배 뒷편에 누워 태평하게 잠드신 태산같은 얼굴을 기억합니다.
·온통 '나'와 '내 가족'의 일에만 매달려 살면서, 이웃의 아픔과 세상의 아픔에 대해 무감각하게 살 때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며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시던 그 얼굴을 기억합니다.
·삶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불의에 대해 분노하는 것마저 잃어버린 것이 안타까워 눈물지을 때 채찍 만들어 성전을 청결케 하시며 거룩한 분노에 떨던 그 얼굴을 기억합니다.
·지고 가는 내 생의 짐이 너무 무거워 비틀거릴 때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시던 그 얼굴을 기억합니다.
·작은 모욕을 당했을 때에 살 맛을 잃은 사람처럼 우울해 할 때, 당신을 죽이려는 가야바 앞에서, 빌라도 앞에서 한없이 고요하셨던 그 얼굴을 기억합니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 때문에 마음이 흔들릴 때, 십자가 위에서 그를 못박는 이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시던 그 수척한 얼굴을 기억합니다.
·삶의 전망이 보이지 않아 안절부절 못할 때, 제자들을 찾아와 평강을 빌어주시던 부활하신 주님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지금 그 얼굴을 보고 있다면, 그리고 그 얼굴을 닮으려 하면 우리는 이미 과거의 '나'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그 얼굴을 보러 세상에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얼굴이 여러분의 마음에서 지워진 것은 아닙니까? 아직 그리기를 시도하지도 않은 것은 아닙니까? 지금부터라도 그분의 얼굴을 그리며 사십시오. 그것이 참 아름다운 삶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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