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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기석목사

관용을 넘어롬15:1-7

관용을 넘어
롬15:1-7
(2000/10/15)

사랑이신 하나님

얼마 전 프랑스에서 엠마우스 운동을 전개하고 계신 피에르 신부님의 책을 읽었습니다. 엠마우스는 집 없는 사람, 사회로부터 추방된 사람, 삶에 절망한 사람들의 안식처입니다. 그곳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어느 날 한 꼬마가 신부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신부님 '사랑이신 하나님' 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신부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몇 주일 전, 네가 기진맥진한 상태로 돌아오던 때를 생각해봐라. 너는 춥고 배도 고팠지만, 땀에 흠뻑 젖은 채 돌아왔어. 그날 너는 하루 종일 배를 쫄쫄 곯으면서 어느 할머니의 일을 도와드렸지. 그런데 저녁에 돌아온 너는 내게 이렇게 말하더구나. '신부님, 오늘 하루 일이 참 만족스러워요.' 그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니? '이런 즐거움을 절대로 잊지 말거라. 너의 가슴속을 즐거운 노래로 가득 채우는 이 순간, 이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단다. 너는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지를 맛보았기 때문이야. 세상의 모든 도서관을 뒤져 신학을 통째로 알아도 하나님을 알 수는 없단다. 그런데 너는 지금 하나님에 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맛볼 수 있었다면 너는 이미 사랑이신 하나님을 만난 거야. '"(피에르, <<당신의 사랑은 어디 있습니까>> 중에서)

사랑의 기쁨을 맛본 사람, 다른 이들을 돌보기 위해 자기를 희생해 본 기쁨을 아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 이미 하나님과 만난 사람이라는 거지요. 피에르 신부님의 말씀은 참 명쾌합니다. 위대한 신학자가 하나님에 관해 잘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땀을 흘려본 사람이 하나님에 관해 더 잘 안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사랑의 땀흘림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사랑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고요. 따라서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사람은 많이 배운 사람이나 돈 많은 사람이 아니라, 사랑이 많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죄의 뿌리가 온전히 뽑히지 않은 사람들이 모인 곳인지라 교회도 시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로마 교회의 문제

로마 교회도 풀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분열의 위험에 빠져 있었습니다. 로마 교회 안에는 유대인 가운데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도 있었고, 비유대인(이방인이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편협한 '선민의식'을 경계해야 합니다. 비유대인이라는 말도 적절하지는 않지만 유대인들과 구분하기 위해 부득이 사용합니다)으로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그들은 모든 차이를 넘어서 형제/자매의 우의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인종, 지위, 성별, 빈부에 관계없이 모두가 다 하나가 된다는 것,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편견과 독선, 허영과 교만의 옷을 벗으면 사람은 자유로워집니다. 삶은 축제가 됩니다. 우리가 삶을 축제로 만들지 못하는 까닭은 너무 많은 옷을 입고 살기 때문이겠지요. 초대교회 교인들은 옷을 벗은 자의 자유를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망각의 동물입니다. 제 아무리 큰 기쁨이나 슬픔도 시간이 지나가면 퇴색해버리고 맙니다. 최초의 기쁨과 감격이 지나가자, 그들은 옛 생활의 인력에 조금씩 끌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은총의 빛에 눈이 부셔 보지 못하던 서로의 허물과 흠을 보기 시작한 겁니다. 문제는 유대교 출신의 신자들에게서 시작됐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왠지 좀 미심쩍었던 모양입니다. 너무 쉬워 보인 거지요. 그들은 슬그머니 옛날에 버렸던 먼지 투성이의 정결규정들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규정들을 지키는 것이 구원받는 일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겠지요. 비유대인 신자들은 그런 유대인들의 행태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 것 같습니다. 비유대인 신자들의 시선이 곱지 않으니 유대인 신자들의 시선도 자연 곱지 않을 수밖에요. 로마 교회의 일치가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저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 교회의 불화를 해소하고 원래의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로 돌아가도록 권고하기 위해 로마서를 썼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신앙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몇 가지 아주 중요한 원리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라고 부름받은 사람들

바울은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합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 강한 사람은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율법의 규정에 매이지 않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로마 교회에는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 강한 이들이 많았어요. 그들은 또 대개 비유대인들이었구요. 바울은 그들을 향해 매우 강한 어조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형제의 약함을 들춰내고, 비웃고, 따돌리고, 무시하지 말고, 오히려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문장의 첫 단어는 영어로 하면 'must'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마땅한 책임입니다. 나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 하여 그를 배제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들의 약함까지도 부둥켜안고 가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는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참 통렬한 규정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한다는 말은 어떤 선택을 하든 자기의 욕망을 중심에 놓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성도는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에요. 디히트리히 본회퍼는 기독교인을 가리켜 '타자를 위한 존재'(being for others)라 했습니다. '타자'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기독교인에게 '타자'는 없습니다. '이웃'이 있을 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떤 존재로 부름받았는지를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관용을 넘어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수적입니다.

첫째, 이웃을 관용을 가지고 대하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고, 삶의 방식도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용납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나의 견해를 반박하면 화부터 나거든요. 텔레비전 토론 프로에 나온 사람들을 보면 한국 사람들의 대화는 '주장은 있지만 토론은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자}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홍세화님은 프랑스 사회를 "톨레랑스가 있는 사회"라고 하더군요. 번역하기 어렵지만 '톨레랑스'란 나와 다름을 용납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나는 그런 꼴은 죽어도 못 봐" 하면서 극단적으로 말하는 것부터 버려야 합니다. 세상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삶은 계속되니까요. 남들과 협력하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도 관용은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둘째,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권리에 대한 자발적인 포기와 희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를 존경하고 사랑한다면 문제가 다릅니다만, 나의 일에 사사건건 반대하고 딴죽을 거는 사람을 용납하고 그를 위해 내 권리를 포기하고 희생한다는 것은 보통 힘겨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라고 부름받았습니다. 저는 사랑이란 '남을 위해 좋은 몫을 남겨두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런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지레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작은 일부터 실천해야지요. 성서학당에서 제가 이 말을 했더니 임창선 권사님이 그러시더군요. "지금까지는 지하철을 타면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썼는데, 이제부터는 좋은 자리에는 앉지 않겠어요." 그래요, 그것은 작은 실천이지만 사랑의 시작입니다. 작은 시작이 우리를 더 나은 세계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예수의 모범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하는 이유는 뭐지요? 그 대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닮고 싶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닮고 싶어한다면 그를 존경하거나, 사랑하는 거 아니겠어요. 사랑하면 닮아요. 오랫동안 예수를 믿는다고 믿었는데 예수를 닮지는 않았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발가락을 내보이며 발가락은 닮았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예수님의 삶은 다른 이를 기쁘게 하려는 동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주님은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들의 약한 것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소외감 속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벗이 되어 주셨고, 기꺼이 그들의 손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또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당신의 생명까지 바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사53:11). 예수님을 가리켜 "상처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라고 한 이가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안고 치유해주기 위해 자기의 상처와 아픔을 돌볼 겨를이 없었던 거지요. 우리가 온전히 주님을 닮지는 못한다 해도 아주 조금이라도 닮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어요?


영광의 회복

바울 사도가 이처럼 강하게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은 언제입니까? 우리가 믿음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서로 사랑할 때입니다. 성가대의 찬양 소리가 참 아름답지요? 여러 소리가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것은 참 멋진 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세상의 조화로움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상대방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마음 쓸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서로 협력하며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와 다른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위험한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의 지평을 넓혀줄 기회입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은 우리에게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가르치는 스승들입니다. 우리가 곁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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