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김기석목사

에바다막7:31-37

에바다
막7다:31-37
(2000/10/8)


귀먹고 어눌한 사람
예수님이 갈릴리 북쪽에 있는 두로 시돈 지방을 거쳐서 갈릴리 호수에 돌아오셨을 때 사람들이 한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는 귀먹고 어눌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자를 고치고, 각색 병든 이들을 고치는 그분의 능력은 갈릴리 호수 주변에 사는 이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의 능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을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데려갑니다.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가련한 사람의 치유를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만들고 싶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으셨습니다. 그리고 침을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 행동 하나하나는 애정에 찬 몸짓 언어였습니다. 그 병자는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 깊은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양 귀와 혀에 닿은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 그 병자는 자기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상처를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여기서 '탄식'(stenazo)이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신음입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그의 처지를 주님은 함께 아파하십니다. 그렇기에 그 탄식은 하나님께 바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정말로 마음 아파하고, 그의 처지 때문에 신음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기도로 들으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 땅에서 신음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기도로 들으셨습니다. 탄식은 그런 겁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
느니라. (롬8:26)

깊은 탄식 후에 주님은 외쳤습니다. 에바다(Ephphatha)! 이 말은 '열리라'(be opened)는 뜻의 아람어입니다. 그 사람은 귀로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치유되었습니다. 그는 말하고,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심으로 빛을 창조하신 것처럼 우리 주님도 말씀으로 새로운 삶을 창조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은 몰려온 사람들에게 아무에게도 이 일에 대해 소문을 내지 말라고 했지만 경계할수록 그 소문은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자기 속에 불꽃이 일고 있는 데 그것을 어떻게 품고만 있겠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이 병자는 참 행복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는 저의 귀에 손을 넣어 주십시오. 해야
할 참 소리를 하지 못하는 저의 혀에 손을 대주십시오. 오늘도 주님은
나를 보며 탄식하고 계신 데, 저는 주님의 탄식을 듣지 못한 채 살아
갑니다. 주님, 저를 향해 외쳐 주십시오. '에바다'."


우리의 귀도 닫혀 있습니다.
우리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답답해 합니다. 한 때 사오정 시리즈가 유행했습니다. 상황에 맞지 않는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가리켜 사오정이라 합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결혼 50주년을 맞이해서 할머니와 참 좋은 시간을 보내셨답니다. 저물녘 해지는 바닷가 벤치에 앉아 있으려니 비감스런 생각도 들고, 살아온 나날이 참 고마운 생각도 들어서 생전 하지 않던 말을 아내에게 건넸습니다. "여보, 참 고마워. 당신과 함께 한 시간이 내게는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어." 그런데 할머니는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어요. "영감, 오늘이라도 진실을 말해주어 고마워요. 사실 나도 당신과 함께 사는 게 참 지겨웠거든요." 할머니의 귀가 어두웠던 거지요.

우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웃어요. 하지만 우리가 꼭 이렇게 살아요. 하나님의 사랑 고백을 듣고도 우리는 응답할 줄 모르지 않아요? 하나님과의 관계만 문제인 게 아니에요. 우리는 다른 이들과 함께 살면서도 그들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살아요. 말뿐인가요? 그들의 눈빛이 하는 말, 표정이 하는 말을 듣지 않고 살아요. 그런 여백이 없는 거지요. 왜 이렇게 되었지요? 세 가지가 떠오릅니다.


첫째, 우리 삶이 너무 바빠요. 그래서 다른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정신적 여백없이 살기 때문이에요. 누군가의 말을 들으려면 멈추어 서야 해요. 그런데 우리 삶은 달리기예요. 어디로 가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달리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막 달려요. 하늘이 무너질는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토끼 한 마리가 낮잠을 자다가 사과 한 알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냅다 뛰기 시작했어요. 하늘이 무너졌다고 생각한거지요. 다른 동물들은 영문도 모르고 토끼를 따라 뛰었어요. 누구 하나 멈추어 서서 왜 자기들이 이렇게 뛰고 있는지 물어보지 않아요. 우리가 이런 꼴이 아닌가 싶어요. 서로가 분주하기 때문에 부부간에도 깊은 대화를 못해요. 부모 자식 간의 갈등도 마찬가지예요. 아이들이 잘 해주기를 바라지만 그의 존재에 귀를 기울일 시간을 좀처럼 내지 못하는 거지요.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바빠서 부모 세대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시간이 없구요. 우리는 말이 넘치는 세상에 살아요. 하지만 그 말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이르지 못하는 껍데기 말들이 많아요. 사람들은 말을 가지고 서로 피부만 긁어대고 말지요. 서로의 깊은 곳에 있는 상처나 기쁨을 어루만지지는 않아요.


둘째, 우리가 마땅히 들어야 할 소리를 듣기에는 세상의 소음이 너무 커요. 프로 야구 경기 결과에 집착하고, 연예인들의 사생활 정보를 수집하기에 귀를 모으고, 증권가의 루머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으니, 이웃의 내밀한 소리를 듣기 어려울 수밖에요. 세미한 중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도 들을 수 없어요. 하루에 몇 분 만이라도 우리 귀를 해방시켜야 해요. 마음을 고요히 하고, 자기 호흡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도 들으려다 보면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거예요.


셋째, 우리 속에는 꼭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강한 저항이 있습니다. 단 소리는 잘 듣지만, 쓴 소리는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의 완고함이 우리 귀를 멀게 합니다. 예언자들의 언어는 대개 쓴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의 운명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궁중에 머물면서 왕들 듣기 좋은 소리를 했던 예언자들은 편히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곧이곧대로 전했던 재야 예언자들은 항상 가시밭길을 걸었습니다. 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우리 영혼이 성장할 텐데요.


우리의 혀도 온전치 못합니다.
우리는 참 많은 말을 하고 삽니다. 말이 많으니 실수도 많겠지요? 오죽하면 야고보 선생이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약3:2)라고 했겠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 말의 기능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오히려 사람들의 관계를 깨뜨리니 문제지요? 야고보는 말에 대해 참 비관적입니다.

혀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입니다. 혀는 우리 몸의 한 부분이지만, 온 몸을
더럽히고, 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고, 마지막에는 혀도 지옥 불에 타
버립니다.(약3:6)

우리는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자기를 지키기 위해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고, 이웃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그게 우리입니다. 쓸데 없는 말은 곧잘 하면서도 정작 해야 할 말은 제대로 못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불의에 항거하지 못하고, 고마움을 잘 표현하지도 못합니다.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도 용서를 구하지도 못합니다. 세상에서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채 살고 있는 이들을 위해 입을 열지도 못합니다. 우리 입은 점점 거세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에바다' 하고 외쳐주시기를.


모국어, 사건을 일으키는 말
오늘의 본문에서 저는 또 다른 한가지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모국어가 일으키는 사건입니다. '에바다'라는 말은 아까도 말씀 드린 것처럼 '열리라'는 뜻의 아람어입니다.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했던 말이 아람어입니다. 하지만 식민지배국인 로마의 말인 헬라어가 행정 언어로 사용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헬라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헬라어를 잘 하는 사람은 출세하기 쉬웠습니다. 지배자들의 언어를 배워서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앞장섰기 때문에 기회가 많았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아람어를 사용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귀 먹고 말까지 잃어버린 이 불행한 식민지의 동포를 향해 민중의 언어인 아람어로 외치셨습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그 말이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언어가 권력이 되는 세상에서 예수는 민중들의 언어를 통해 일어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신 겁니다. 마가가 헬라말로 복음서를 쓰면서도 이 아람어를 번역하지 않은 것은 참 깊은 배려인 것 같습니다. 말은 사건을 일으킵니다. 사건을 일으키는 그 말을 어떻게 번역할 수 있겠습니까? 민중언어인 '에바다'를 헬라어로 표기하면 dianoiktheti가 됩니다. 맛이 안 나지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을 통해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세상이 온통 외국어 열풍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언어가 출세의 수단이 된 시대입니다. 한글의 맛을 채 느끼기도 전에 아이들은 영어 공부에 더 열을 올립니다. 가수들의 노래에 영어가 들어온 것은 벌써 오래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중가요에서 사용되는 우리말은 전혀 어법에 맞지 않습니다. 컴퓨터 공간에서 사용되는 젊은이들의 언어는 더욱 심각합니다. 소리나는대로 적고, 줄여 적고, 비틀어 적습니다. 저는 사용하는 언어를 바꾸는 순간 영혼을 바꾸게 된다는 말을 두렵게 기억합니다. 우리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고, 전통이 녹아 있고, 우리만의 리듬이 담겨있는 우리말,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사건을 일으키실 때 사용하시는 말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곁에 다가오십니다. 우리의 병든 곳을 애정에 찬 손길로 어루만지십니다. 주님의 손길이 머무는 곳마다 막혔던 것이 열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국어로 "열려라", 혹은 "일어나라" 하고 외치시는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 음성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참 말을 되찾고, 이웃의 아픔과 기쁨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반응하게 될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추천 설교 > 김기석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의 한가운데서  (0) 2018.11.21
관용을 넘어롬15:1-7  (0) 2018.11.21
아름다운 얼굴  (0) 2017.02.15
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  (0) 2017.02.15
지금은 조정의 시간  (0) 2017.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