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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광일목사

착하고 충성되었나-마 25:24~30

착하고 충성되었나-마 25:24~30
  
  


알프스 산 동쪽 기슭 마을 숲 속에 한 노인이 조용히 살고 있었습니다.

알프스 산 동쪽 기슭 마을 숲 속에 한 노인이 조용히 살고 있었습니다. 계곡 물에 쓰레기가 들어와 마을의 샘물이 오염되지 않도록 관리하라고 마을에서 고용한 사람이었습니다. 노인은 마을을 순찰하면서 나뭇잎과 가지를 줍고, 샘물을 더럽히는 쓰레기들을 치웠습니다. 수정같이 맑은 물에 새들이 날아들고, 샘물 주변에 세워진 물레방아들이 쉬지 않고 돌아 논에 넉넉한 물을 댈 수 있었습니다. 식당에 앉아 경치를 내다보면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습니다. 바람직한 휴양지로 소문이 나서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늘어 잘사는 마을이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저녁, 마을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예산을 심의하던 중 노인에게 지불되는 돈을 문제 삼았습니다. “도대체 노인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쓸모없이 사람을 고용하는 것입니까? 더 이상 더럽지도 않으니 그 노인을 고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 날 모임에서 노인은 해고되고 말았습니다. 몇 달 동안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을이 되자 낙엽이 지고,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물속에 떨어져 깨끗한 물의 흐름을 방해했습니다. 모여진 쓰레기에서 냄새가 났습니다. 샘물에는 적갈색 이끼가 조금씩 생겨났습니다. 그러더니 점점 물은 더러워지고 악취가 풍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레방아의 돌아가는 속도가 느려지더니 마침내 멈추고 말았습니다. 새들도 떠나고 사람들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마을 사람들은 긴급 모임을 가졌습니다. 자신들의 결정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샘물을 지키던 노인을 다시 고용했습니다. 몇 주가 지나지 않아 샘물은 다시 맑은 생수로 변하고, 물레방아가 활기 있게 돌아가고, 찾는 사람들도 많아져 산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은 전과 같이 생명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한 노인의 보이지 않는 수고가 마을을 살린 것입니다. 세상은 큰일을 감당하는 사람에 의해서라기보다 맡겨진 곳에서 말없이 충성하는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고 아름답게 변한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결과를 내었는가, 얼마나 이익을 남겼는가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주어진 직분에 얼마나 충성되게 감당하였는가로 평가하여야 합니다.

달란트 비유가 시작되는 본문 14절에는 주어가 없습니다. 주어는 1절의 그때에 천국은의 구절과 연결됩니다. 즉 천국이 주어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충성은 악한 임금이나 악덕 기업주에게 바치는 충성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어떻게 사느냐의 태도입니다. 따라서 14절은 또 천국은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맡겼다는 단어는 충성의 핵심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충성하라고 주신 자원입니다. 생명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충성하라고 맡겨 놓으신 것입니다. 종들이 가진 것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장사를 하라고 맡겨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자원이 달란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든, 헌금이든, 은사든 무엇이든 크고 귀한 것입니다. 왜 주인은 적은 일에 충성하였다고 말합니까? 하나님의 위대하고 크심에 비해 우리가 받은 것은 적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충성을 보시고 많은 것을 맡겨 주십니다. 충성은 작은 것에 진실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본문에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이 대비되어 나옵니다. 두 종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주인에게 평가받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세워질 우리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착하고 충성된 모습으로 지금까지 살아오셨습니까?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떠합니까?
 

첫째로 악하지 않았나

심리학 교수 살로비(P. Salovey) 박사는 범죄의 20%가 질투 때문에 생긴 행위라고 강조합니다. 질투는 무서운 범죄행위의 요인이 됩니다. 그런데 질투의 특성 중 하나가 자기와 관계없는 사람에 대하여는 질투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옷가게를 하는 사람이 농부가 농사를 잘 지어 많은 돈을 벌었다고 질투하지 않습니다. 회사원이 동네 식료품점이 잘된다고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분야에서 경쟁관계에 있다면 질투가 일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질투의 불길이 가까운 관계에서 작용하기 시작하면 그 불꽃이 더욱 사나워집니다. 부부관계, 친구관계에서 질투의 불꽃이 일어나면 불길에 화상을 입는 사람이 나오게 됩니다. 질투의 임상학을 저술한 그레고리 화이트(Gregory L. White) 박사는 이혼 부부의 30%가 질투 때문에 갈라섰다고 지적합니다. 질투는 상대와 비교로 인한 열등감에서 출발합니다.  ‘왜 저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나에게 한 달란트인가하고 불만을 가지며 질투하게 됩니다. 얼마를 받았든지 하나님께서 적당히 주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치 않으면 한 달란트의 가치를 땅에 묻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얼마를 받았든지 소중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부인한다면 악한 종이 되고 말 것입니다.

본문 26절입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일을 안 하게 된 책임을 주인에게 돌렸습니다. 주인은 심지 않은 곳에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곳에서 모으는 사람인 줄 알았으므로 땅에 묻었다가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일 안한 이유가 주인 때문이요,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주인 때문이라고 말하며 주인을 악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나의 행위가 상대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면 그 또한 악한 일을 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주인은 어째서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드느냐? 언제 그렇게 나쁘게 했더냐?하면서 오히려 종을 향해 악한 종이라고 지적합니다.

악한 종이라함은 악한 일을 했기 때문에 악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악한 것입니다. 한 일이 적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없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기회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기회를 놓친 것이 악한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 주신 기회에 충성을 다했는가?"  혹시 주인에게 악한 종으로 보이지는 않았는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입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여전히 불만하고, 여전히 시기하고, 여전히 원망하고 있다면 악한 종의 모습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달란트를 주셨다면, 한 달란트로 감사하고, 한 달란트로 충성해야 합니다. 한 달란트로도 넉넉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게으르지 않았나

김남준 목사는 거룩한 삶의 은밀한 대적 게으름이라는 저서에서 비전의 사람, 사명의 사람에게는 삶이 유한하다고 말하기가 너무나 짧다. 시간을 선용하는 것이 충성이다. 게으름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성향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불충성이요, 맞서 싸워야 할 악이다. 게으름은 충성하기 위해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악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싸워야 할 대적 가운데 하나가 게으름입니다. 그런데 몸이 게으르다고 혀까지 게으르지는 않습니다. 게으른 자 일수록 입은 분주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를 보십시오.  그는 주인을 비판하기에 바빴습니다. 감사에 게으르고 불평하기에 바빴습니다. 쓸데없는 일에 바쁜 것이 게으름의 모습입니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바쁜 것은 충성의 열매가 아니라 육체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게으름을 포기하지 아니하면 영적 거인이 될 수 없습니다. 게으름은 성도가 맞서 싸워야 할 나쁜 습관입니다. 우리로 섬기지 못하게 하고,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게으른 상황들과 부단히 싸워야 합니다. 게으름을 이길 때 비로소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 26절입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게으름은 바람직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죄악입니다. 자신은 물론 공동체도 망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은 초대교회를 거치는 동안에 대표적인 죄악을 말할 때 게으름을 포함 시켰습니다. 게으름의 본래 의미는 돌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무책임하고 무관심하여 돌아보아야 것들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감격하기도 싫어하고 매사에 의욕이 없는 모습을 합니다.

게으름은 죄악이고 사명을 포기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사명감이 있는 사람은 게으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준 일이라고 생각하고, 태어나 해야 할 일이고, 이루어 놓고 죽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찌 게으르겠습니까?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어떻게 게으를 수 있습니까? 우리의 모습이 혹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에 게으른 것은 아니었습니까?
 

셋째로 무익하지 않았나

컴퓨터 황제 빌 게이츠(Bill Gates)CNN 방송 설립자 테드 터너(Ted Turner)는 세계적 부호입니다. 빌 게이츠는 소아마비 퇴치기금으로 6백억을 세계보건기구(WHO)에 쾌척했고 테드 터너는 UN에 매년 12천억씩 기부금을 내고 있습니다. 자선에 관심이 없던 게이츠에게 구제의 기쁨을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터너였다고 합니다. 3년 전, 터너는 사업에만 몰입하던 게이츠를 향해 충고를 던졌습니다. “너무 많은 돈을 은행에 예금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참 불행한 일이다. 그 돈으로 남을 돕는다면 인생이 훨씬 풍요로울텐데...” 게이츠는 이 말에 감동을 받아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돈도 중요하고 명예도 중요하고 지식도 건강도 중요하지만 누구에게 유익을 주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본문 30절입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이라는 말은 가운데 중()에 마음 심()자입니다. 중심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은 주인이 없을 때 성실하지 못합니다. 맡겨준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익한 종은 주인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같아야 합니다. 처음이나 나중이나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잘 될 때나 잘못될 때나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모두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유익을 주는 종입니까? 아니면 무익을 주는 종입니까?

개관사정(蓋棺事定)이란 고사성어의 뜻은 죽어서 관의 뚜껑을 덮은 후에라야 비로소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유엔 사무 총창 다그 함마슐드(Dag Hammarskjold) 는 생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 태어날 때 모든 사람이 웃어주는 사람이 되고, 너 죽을 때 모든 사람이 슬피 울어주는 사람이 되라!” 함마슐드 총장은 평화의 사도로 알려진 인물인데, 아프리카 콩고 내전을 해결하려고 현지로 날아가던 중 비행기 추락 사고로 안타깝게 서거를 하게 되었습니다. 함마슐드의 서거 소식을 듣고 평화를 사랑하는 전 세계인들은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너 죽을 때 모든 사람이 슬피 울어주는 사람이 되라던 그의 말대로, 많은 이들의 애도 속에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 주신 기회에 얼마나 충성했던가? 하나님의 뜻에 만족하고 살아왔던가?” 한 달란트든 반 달란트든 받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주께서 맡겨주신 것 자체가 은혜요 감사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들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악하고 게으르지 않았습니까? 유익을 주지 못하고 무익한 모습으로 살아왔습니까? 부디 주어진 자리가 어떤 자리이든 몸된 교회를 위해, 이웃과 성도를 위해 착하고 충성되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부끄럽지 않게 세워지는 착하고 충성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