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빅터 프랭클(Victor E. Frankl)의 단편소설 ‘곡예사의 헌신’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한 난쟁이 곡예사가 있었습니다. 거꾸로 서서 공을 돌리고 접시를 돌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돈을 던져 주면 그것으로 먹고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어 그나마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긴 신부가 성당에 데려다가 심부름하며 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난쟁이가 성당에 온 뒤로부터 차츰 얼굴에 생기를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던 어느 날 예배를 드리면서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가진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이다” 난쟁이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가진 재능은 거꾸로 서서 공 굴리는 것과 접시 돌리는 것 밖에 없는데 이것이라도 하나님께 드리자.” 밝은 낮에 드리자니 창피하여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지 않는 새벽에 예수가 달린 십자가상 앞에서 물구나무를 서고 발가락으로 접시를 돌리고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 재주를 부렸습니다. 최선을 다해 가지고 있는 재주를 다 부렸습니다. 그는 이 일을 매일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난쟁이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보람이 생겼습니다. 하루는 청소부가 성당에서 청소를 하는데 난쟁이가 거룩한 십자가상 앞에서 재주를 부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깜짝 놀라 신부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청소부의 말을 들은 신부는 이를 확인하려고 새벽에 숨어 지켜보았습니다. 그러자 난쟁이가 무릎을 꿇고 “주님, 제가 가진 재주는 이것뿐입니다” 하면서 온갖 재주를 다 부리며 십자가 앞에서 재주를 부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신부가 혼을 내려고 나가려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더니 무릎을 굽히고 한쪽 손으로 난쟁이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대가 나를 기쁘게 했노라 그대의 땀을 내가 받았노라. 그대의 눈물을 받았노라 그대의 재능을 내가 받았노라”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신부는 무릎을 꿇고 “오, 주여, 나도 저 난쟁이와 같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땀을 쏟아 주께 드릴 수 있는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하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진정한 일꾼은 과연 누구입니까? ‘일꾼’은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 또는 시중드는 하인, 청지기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교회의 일꾼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무엇인지 알아야 바른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부활하신 예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나가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일꾼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요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다른 성도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겸손과 성도들을 섬기는 봉사자의 모습을 통해 교회 일꾼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꾼은 교회가 세운 것이 아니고, 자의로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이라고 바울은 증거합니다. 우리는 바울을 교회의 일꾼 되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도 교회의 일꾼 되게 하심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임명받은 교회의 일꾼들은 신앙 공동체에 섬기는 자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 자부심과 책임감으로 충성스럽게 일하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일꾼들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부끄러울 것 없는 일꾼으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교회의 일꾼으로 세운 까닭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말씀을 이루려함이니 어느 성도가 정년 퇴직기념으로 독일제 그랜드 피아노(Grad Piano)를 교회에 바쳤습니다. 본당 피아노가 낡았기에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본당에서 사용하던 피아노를 처리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은퇴하신 권사가 이십년전에 권사 임직기념으로 바친 피아노인데 그냥 치워 버릴 수가 없기에 담임목사가 전화를 걸었습니다. “권사직분기념으로 피아노 바치셨지요?” “그렇습니다. 제가 바쳤지요” “어떤 성도가 새 피아노를 바치셨는데 설치해도 되겠지요?” 그런데 한참 말이 없습니다. 얼마 후 “목사님, 안됩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눈물로 기도하고 바친 건데 치우면 안 됩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안 됩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새 피아노를 본당에 들여놓지 못하였습니다. 안타까운 목사는 선배에게 방법이 없겠느냐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배 목사가 “방법이 있기는 있는데!”라고 대답합니다.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오늘부터 기도를 시작하시오” “어떤 기도입니까?” “간절히 구하오니 하루 속히 그 권사의 눈에 흙이 들어가게 하여 주소서.” 그 권사는 교회를 위해 일한다면서 자기 기분대로, 자기 마음에 맞추어 일했던 것입니다. 교회의 일꾼들은 모름지기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일이면 내 마음에 안 들고, 뜻에 안 맞고, 기분에 안 들어도 반대하고 나서서는 안 됩니다. 자기의 생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5절입니다.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바울은 복음 전파를 사명으로 하는 일꾼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일꾼이란 말 앞에 교회를 붙여야 합니다. 왜 주님을 섬기는 것이 힘들게 느껴집니까? 왜 교회 봉사하는 일이 부담스러워집니까? 예수의 복음과 그의 몸 되신 교회를 위하여 한다는 의식이 없이 일꾼이라는 말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의미 없이 죽도록 일만 한다면 일꾼 되기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일꾼은 하나님이 주신 직분에 자부심이 넘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알고 섬기기에 즐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인이 되어서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룰 수 없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부르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녔을 지라도, 교회에 공로가 있다 할지라도, 교회를 위하여 수고를 많이 하였다 해도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주인이 되고 있다면 사람의 일꾼은 될 수 있어도 교회의 일꾼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일꾼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자이어야 합니다. 둘째로 사람을 세우려함이니 최고의 휴머니스트라 불리어지는 아베 피에르(Abbe Pierre) 신부는 2차 대전 당시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던 프랑스의 투사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인으로 돕는 일에 데 한계를 느낀 그는 직접 뛰어 들어가 집 없는 사람들과 노숙자, 전쟁고아들의 안식처를 마련하는 빈민구호활동을 50년이 넘도록 하였습니다. 피에르 신부가 이런 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국회의원이던 어느 날, 자살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복역한 후 딸을 만나러 갔으나 딸이 외면하였습니다.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자살을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피에르 신부가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해 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월급은 집 없는 사람들의 집을 지어주느라 다 들어가고 도리어 빚까지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죽기를 원하니 거치적거릴 게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집이 지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자들을 생각해서라도 집짓기가 빨리 끝날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지 않겠소?” 자살을 기도했던 그는 신부를 도와 집짓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그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신부께서 돈이든 일이든 그저 베푸셨다면, 아마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 그는 자신보다 더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았습니다. 절망한 자에서 구원자가 된 것입니다. 피에르 신부의 엠마우스 공동체 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피에르는 자살을 기도했던 사람이 엠마우스 공동체 운동의 일원이 되어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보고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가 쓴 책의 제목이 ‘단순한 기쁨’입니다. 기쁨 중 단연 최고의 기쁨은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도와 세워줌으로 누리는 기쁨입니다. 나의 것을 혼자 누리지 않고, 다른 이와 함께 공감하며 다른 이를 도와 그를 세우는 기쁨이야말로 최고의 기쁨입니다.
본문 28절입니다. “곧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여기의 완전한 자란 ‘성숙한 자’를 가리키며,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의 모습을 갖춘 자를 뜻합니다. 그런데 세우는 일은 소망을 지닌 교회의 일꾼들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교회의 일꾼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것을 훈계하고 충고하여 바로 잡아주어 완전한 사람으로 세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간직한 교회 일꾼들의 충성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괴로움과 수고의 일을 기쁨으로 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소망이신 예수로 충만하게 함으로 완전한 자로 세우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이것은 입으로만 하는 전파로는 불가능합니다. 교회의 일꾼들의 헌신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셋째로 수고를 다하려함이니 1866년 9월2일 대동강 모래사장은 핏빛으로 물들었습니다.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에 탄 사람들이 평안감사 박규수 군대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선원들이 모래사장으로 끌려나오는데 그 와중에 한국 사람들에게 책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도 모래사장으로 끌려나와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저녁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는 시간에 대동강 모래사장을 피로 붉게 물들이며 죽어간 27세의 청년, 그는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로 순교를 당한 토마스(Robert J. Thomas)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나누어준 성경을 받아든 홍신길, 최치량, 또 성경책을 뜯어 벽지로 사용한 박영식이 한국 기독교 역사에 큰 업적을 남긴 개척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벤 박춘권도 평양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토마스 선교사가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토마스의 목숨을 내놓는 수고는 그와 함께 역사하신 하나님에 의해 복음의 문을 여는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본문 29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여기의 ‘힘을 다하여’는 달리기 선수가 골인지점을 향하여 최선을 다하여 달리는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고 ‘수고하는 것’은 피곤하여 지치도록 노력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땀 흘리고 공들인 만큼 세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수고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일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억지로 일하지 마십시오.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를 따라 일해야 합니다.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는 과연 누구입니까? 성령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하여 맡겨진 일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따라 일 하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여야 합니다. 이 모습이 진정한 교회의 일꾼의 모습입니다. 어느 중학교에 음악교사가 부임하여 학교 밴드를 조직했습니다. 여러 악기들이 제 소리를 내려면 1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음악에 문외한인 학교장은 일방적으로 연주회 날짜를 결정했습니다. 관악대는 당황하였지만 열심히 준비하여 연주회 날이 되었습니다. 시작되기 전에 지휘하는 교사는 긴장하는 관악대원들에게 “자신이 없는 사람은 연주를 하는 척만 하라”고 말했습니다. 잠시 후 교사가 지휘봉을 흔들었지만 놀랍게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하는 척만 했을 뿐 소리를 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척하는 사람은 수백 명이 있어도 음악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척하는 일꾼들로는 어떠한 역사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몸 된 교회의 일꾼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수고를 다해야 합니다. 누구의 일꾼입니까? 사람이 세운 일꾼입니까? 하나님이 불러 세우신 교회의 일꾼입니까? 임명받은 임원들은 사명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교회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각 사람을 권면하여 세우는 교회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힘을 다하여 수고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의 일꾼이 되는 임원들과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