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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2. 2. 예수님의 심방사역 요한복음 21:1-17

2014. 2. 2.              예수님의 심방사역            요한복음 21:1-17

I. 예수님의 심방사역


한 성도가 구약성경을 읽다가 목사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신혼 초기 남자는 군대 가는 것도 연기가 되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사님께서 대답을 하셨습니다.

“집에서 더 무서운 전쟁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혼이라고 하는 것은 신나는 일도 많이 있지만 혼나는 일도 많이 있다고 해서 신혼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문제없는 가정은 없습니다. 치유와 위로가 필요없는 가정은 없습니다.

영적 도움이 필요없는 가정도 없습니다.


우리교회 모든 목자들이 그렇지만 김 집사님 역시 목자로서 훌륭한 목자입니다. 목장가족들을 참 잘 돌봅니다. 목장모임이 있는 날이면 기도로 준비하고 모임때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모임에 참석하는 모든 가족들이 깊은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얼마전부터 정작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이 힘들어 졌습니다.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자신이 회장에게 큰 도움이 되어 주어야 되겠다 싶었든지 밤늦게까지 일을 합니다. 주일에도 회장하고 단둘이서 출근해서 회사에 밀린 일들을 감당하곤 했습니다. 어쩌다 한번씩 주일 예배에 오면 말씀은 은혜가 되지 않고 목사님은 알리 없지만 목사님의 눈길도 차갑게 느껴졌습니다. 목장모임에 가도 성령의 임재와 감동은커녕 셀가족들의 무거운 얘기가 짜증스럽게만 들리고 부담스럽게만 느껴졌습니다. 드디어 목자로서의 사명도 책임감도 내려놓고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어느날 딸아이가 불의의 사고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속교회 목사님의 심방을 받고 김 집사님은 큰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셀가족들의 방문과 위로가 줄을 이었습니다. 아! 이게 교회구나. 이게 목장 소그룹의 능력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배가 살아나고 감동적인 목장모임도 회복되고 목자로서의 자세도 새로워졌습니다. 이게 심방의 능력이요 상호 책임, 상호 방문의 중요성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21장 1절에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예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셨는데 여기 우리를 주목시키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그 후에’ 라는 단어와 ‘또’ 라는 단어입니다.

그 후가 있으면 그 이전이 있을 터인데 이것은 요한복음 20장을 말하고,

그 후는 요한복음 21장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주신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1장에 또 제자들을 찾아오셨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종교입니다.

심방사역은 하나님이 아픔을 겪는 인간을 찾아오시는 고귀한 방문을 얘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 이 귀한 사역을 위임해 주시고 거룩한 심방의 사역을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21장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

부활사신 예수님은 또 언제 제자들을 심방하셨습니까?


1. 부활하신 예수님, 제일 먼저 무덤가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를 심방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라도 발라드려야겠다 생각해서 향유를 준비하고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습니다. 무덤가에서 절망가운데 울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찾아오시자 절망의 밤, 탄식의 밤이 환희의 아침으로 바꿔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방사역은 슬픔의 눈물을 기쁨으로 바꾸는 힘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울고 있는 그 자리, 절망하는 그 자리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2. 두 번째, 제자들이 두려움에 젖어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근간의 소문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량으로 체포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간 자들이라고 하는 누명을 쓰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스승이 십자가에 매달리는데 십자가 곁에도 가보지 못한 제자들은 부끄러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다락방 한가운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너희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 죄책감에 시달리는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이 두려움과 공포, 죄책감과 불안을 몰아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혼자 이 세상 한복판에서 두려워 떨도록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3.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또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질하고 있던 제자들, 특별히 베드로를 심방하셨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고 던져보았지만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그 밤,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절망의 나락에서 울고 있을 때에, 집안에 갇혀 꼼짝하지 못하고 불안에 떨고 있을 때에, 삶의 현장에서 빈 그물을 들고 낙심해 있을 때에, 우리 예수님 제자들을 심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아오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절망이 환희로 바뀌어집니다.

불안이 평안으로 바뀌어집니다.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어집니다.

매년 대심방을 한다는게 목사들에겐 큰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교인들에게도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생활은 이 거룩한 부담을 통하여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함께 살아나는 영적인 도약, 비약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II.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


교회의 심방사역이란 예수님을 대신하여 담임목사로부터 위임받은 교역자나 목자가 교우를 방문하는 일을 말합니다. 교회의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는 사역을 말합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 세 번째 나타나신 본문의 상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3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 하니 일곱명의 제자들이 한꺼번에 따라 나섭니다. 베드로 일행이 고기 잡으러 간 사실에 대하여 베드로가 타락했다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갔을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깊이 묵상해 보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가 함께 있을 때는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문제를 예수님이 친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나 지금 제자공동체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아니하는 이 상황 속에서 저들에게 닥친 가장 현실적인 문제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마 먹고 사는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맏형되는 베드로에게 큰 짐이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앞장서서 말합니다. 내가 한번 가보겠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고기가 전혀 잡혀 주지 않았습니다.


3절 마지막에 보면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예수님 십자가에서 우리 인생의 모든 죄 짐을 다 담당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역사를 운행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구세주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간혹 우리 현실의 문제, 인생의 문제를 이 믿음이 예수님이 담당해 주시지 못한다고 느낄 때에 당황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일행은 차리리 안간 것만 못했습니다. 이제는 제자로서도 실패하고 고기잡는 어부로서도 실패한 밤이었습니다. 절망과 좌절이 엄습해 왔을 것이고 피곤에 피곤이 찾아왔습니다. 물고기조차 제자들을 비웃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예수 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의 슬픈 고백이지요.

내 잘못으로 빈그물들고 갈릴리 바다에서 헤매고 있건만 괜히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집니다. 교회 불평이 생기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한심스러워집니다.

이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같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고 있는 이 모든 상황속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됩니다.

반대로 세상일이 너무 잘 되어서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세상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도 역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을 향하여 돌리게 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심방사역입니다.


로마서 1:11-12 성경은 심방사역의 또 다른 목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방문하게 되면 너희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게 될 것이다. 그 일로 말미암아 너희 믿음이 굳건히 서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 나도 큰 위로를 얻게 될 것이고 너희들도 큰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기 위하여 심방하기를 원한다”

여기 ‘나누다’ 영어의 impart에서 명사형이 없습니다만 성령사역자들이 즐겨쓰는 impart의 명사형 임파테이션(impartion)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 축복의 기름부으심, 기도의 능력의 기름부으심, 비전의 기름부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역자가 여러분의 가정을 방문해서 믿음생활이 승리하며 살 수 있도록 임파테이션,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와 목장의 게으른 심방 사역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스가랴 11:16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게으른 너희들은 우리 양떼들의 마음이 허물어질때에 이세상 살아가다 상처가 나고 쓰러지고 넘어져 있을 때에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많은 사역을 감당하다가 지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수고하는 자를 격려하고 축복하는 일입니다. 바로 그것이 심방 사역입니다.


III. 예수님을 영접하라(심방준비)


이 본문은 5절 말씀으로 이어져 갑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는 호칭이 퍽 재미있습니다. “얘들아!” 예수님의 마음속에 제자들의 신앙이 얘들 같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이제 눈을 뜨게 되면 아빠 얼굴을 알기 시작합니다.

아빠가 아이와 노는게 재미있지요.

아빠가 아이 앞에 얼굴을 내밀면 아빠 얼굴을 알아보고 웃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려요. 아이의 눈에는 갑자기 아빠가 사라진 겁니다. 울먹 울먹 울려고 그래요. 그러면 손을 걷어 치우면서 까꿍~ 그럽니다. 아이는 깔깔대고 웃습니다. 신기하게도 아빠 얼굴이 사라졌다 금방 또 나타난단 말이지요.


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이 아이는 아빠 얼굴이 사라진 겁니다. 울려고 울먹울먹해요. 손을 치우면서 까꿍 까르르 뒤집어 집니다.

이 어린아이는 눈앞에만 안 보이면 아빠가 사라진 줄 알지요.


이 세상 살다가 어려운 일을 겪습니다. 힘든 일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니 계신 양 나를 도와줄 수 없는 분인 양, 우리가 절망하고 낙심하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그것이 어린아이 신앙, 얘들 신앙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 없이 살아가다가 실패하고 살아오셨습니까?

예수 없는 인생길에 사업에 어려움이 있으십니까?

온갖 문제가 얼히고 설혀 있습니까? 몸과 마음이 지쳐 있습니까?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망에 빠져있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찾아 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들을 떠나지 않는다. 언제나 너희와 함께 한다.


심방사역의 가장 큰 목적은 성도들로 하여금 이제 애들 신앙을 벗어나 믿음의 성장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어린애처럼 젖이나 먹이고 기저귀나 갈아주기 위해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대심방을 통해 믿음이 얼마나 성숙해졌는지 성공의 사다리를 점검해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생활은 건강한가? 목장생활은 행복한가? 가정은 화평한가? 이웃을 섬기는 섬김의 사역은 건강한가? 전도의 비전은 있는가?

여러분의 믿음을 점검하게 됩니다.


때문에 심방받는 가정에서는 마르다처럼 접대에 지나친 신경을 쓰기보다는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고넬료는 베드로의 심방을 받을 때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까지 모아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심방받을 때에 부부가 함께, 온가족이 함께, 목사님을 기다릴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 될까요?


이번 대심방을 기다리는 한 권사님 가정에서 목사님의 오는 시간을 기다리다가

혼자서 시 한 토막을 썼습니다. 목사님이 다녀가신 다음에 타이핑을 해서 목사님께 액자를 만들어서 드린 모양입니다. 제 눈에 띄었습니다. 읽어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우리가정 심방 받는 날 주님이 이 작은 집에 오신다네

버선발로 대문을 몇 번이고 열러나가도 창문을 몇 번이고 여 닫아도

우리 목사님 언제쯤 오시려나

금그릇에 기도를 소중히 담고 은쟁반에 감사예물 올려놓고

홍보석으로 찬양을 만들며

진주보석으로 목장가족의 기도목걸이를 엮어 만든다.

오늘은 우리가정 심방 받는 날 주님이 이 작은 집에 오신다네

사랑하는 딸 신우야,

엄마와 감사 찬송하며 정발산 마루턱 힘껏 달려보지 않으련.


심방받는 교역자도, 주님을 대신해서 찾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과 축복을 담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심방받는 가정들도 주님을 영접하는 마음으로 교역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옳습니다.


IV. 심방의 목적


1.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신 심방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 왜 찾아 오셨을까요? 아직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18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이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에 파도소리만 출렁 출렁 들려오는 갈릴리 바다에 고아들처럼 버려둘 수가 없어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외로운 제자들, 절망으로 예수를 떠난 제자들을 그냥 버려두실 수가 없어서 찾아 오셨습니다.

고독한 분이 있습니까? 망망한 바다에서 흔들리는 배 한 척처럼 아슬아슬한 삶을 사는 분이 있습니까? 아무도 나를 도와 줄이 없어 외로워하시는 분들! 안심하십시오. 주께서 찾아오십니다.


2. 우리 예수님이 왜 베드로를 심방하셨습니까? 베드로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잡히실 때 모닥불가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 상처를 못내 지울 수 없어서 아파하고 있는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의 실수나 잘못을 나무라지 아니하시고 무조건 용서하십니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세 번에 걸쳐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을 확인하시며 다시 한번 사명을 그에게 맡겨 주십니다.

내 잘못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인데 상처는 내가 받습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안에서도 인생사에서도...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상처를 치유해 주시길 원하십니다.

예배를 통해서, 치유수양회를 통해서도 그 상처는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을 찾아가서 가정에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그 가정에만 주시는 찬양을 통하여 내게만 주시는 개인적인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어루만져주시고 치료하시고 회복해 주십니다.


3. 왜 찾아 오셨을까요? 우리에게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지금 있어야 하는 자리는 갈릴리 바다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명 버리고 세상일에 허둥대고 있을 때 신앙잃어 버리고 세상에 빠져있을 때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너는 소중한 사역자다. 너는 나의 제자다. 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될 하나님의 사역자다.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로마에 들어가 전도하고 있을 때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로마를 잠시 떠나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교인들의 권유도 있고 해서 로마 시가지를 벗어나 교외로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새벽녘 로마 언덕을 넘어가고 있을 때에 아침 햇살을 타고 예수님께서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깜짝 놀란 베드로는 ‘쿠오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베드로야, 네가 버리는 양 무리를 돌보기 위하여 로마로 들어간다. 또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 위하여 로마로 내려간다. 거기서 베드로는 자신의 망명길을 돌이켜 로마로 들어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사명을 회피하고 떠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오늘도 찾아오십니다.


4. 왜 찾아 오셨을까요? 축복하시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실패한 채로 버려져 있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빈 그물 들고 살아가는 모습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그 빈 그물 채워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직도 당신의 그물이 비어 있습니까? 주님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찾아오신 예수님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번 대심방을 통해 은혜의 빈그물이 채워지고 텅빈 마음이 말씀으로 채워지고 실패했던 사업의 빈 그물이 만선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V. 오른편에 던지라(피심방 가족의 결단)


목사님의 심방에 마술적인 힘이 있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만큼 준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느냐에 따라서 많이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일이 분주해서 심방을 회피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1년에 한 시간이 그렇게도 아까우십니까? 세상일 그 한 시간도 짤라내지 못하십니까?


퍽 오래된 일입니다만 우리교회 나오지 않는 어떤 분이 부인이 저희교회 나오는 집사님이십니다.

정부에 꽤 높은 직위에 있으신 분인데 좋은 일도 있고 앞으로 두려운 일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목사님을 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담배를 많이 피우는 분이라서 집안에 담배 냄새가 찌들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심방이란 말도 모르는 분이 목사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도배를 새로 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받은 양주를 거실에 진열해 놓았습니다. 손님이 오시면 한잔씩 하시는 겁니다. 목사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양주 진열장을 모두 치웠습니다.

상을 준비하여 심방헌금을 넣고 온가족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수없는 가정을 방문했지만 교회 한번도 나오지 않은 이 불신자의 정성에 제가 그 예배를 그냥 드릴 수 없었습니다. 울컥하는 감동과 함께 깊은 임재를 겪는 나누는 대화마다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하는 은혜로운 심방을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불신자의 심방자세입니다.

주님이 우리 집에 오신다면, 성령이 오신다면, 어떤 자세로 준비를 할까요?

내가 하나님을 대신한 발걸음이라면 성령을 대신한 방문이라면 교역자들은 어떤 자세를 가지고 가정을 방문해야 할까요?


이어지는 6절 말씀 보시겠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오른편이 무엇입니까? 우선 시간적으로 다시 한번 그물을 던지라는 뜻이고 공간적으로 고기가 있는 곳을 찾아 그물을 던지라는 뜻이며, 정신적으로 보면 말씀에 순종하여 던지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최후의 심판대에서 오른편은 양의 편입니다. 왼편은 염소의 편입니다. 오른편은 구원의 편입니다. 왼편은 멸망의 편입니다.


전도서 10:2에 보면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다”고 했습니다.

시편 16:11에 보면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성경 모든 곳에서 오른편은 구원의 편, 하나님 편을 말하고 있습니다. 왼편은 세상 편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로 나아간 것은 세상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주님을 등지고 나간 것입니다. 망할 길을 간 것입니다. 오른편으로 던지라 내 인생에 주사위를 하나님편으로 던지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가 있을 때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망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할 일이 아니다. 불평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될 시간이다.

지금이야말로 네가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하느니라.

오른편으로 돌아오라 말씀하십니다.


인생 살기 힘드신 분이 계십니까? 영육이 지쳐 있으십니까?

세상살이 하는 일들마다 풀리는게 없습니까?

내힘대로 내뜻대로 내재주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쳐 보고 있습니까?

그곳이 왼편입니다.

왼편은 망하는 길이고 빈그물들고 실패하는 길이니 오른편으로 돌아오라는 말씀하십니다.


이번 대심방 기회가 대심방의 기회가 아니가 대기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큰기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낙심한 심령들은 열심을 내게 될 것입니다.

절망한 사람들은 희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할렐루야!


VI. 축복 만선! 153마리(심방의 결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순종하여 던졌더니 엄청난 고기를 잡았습니다.

얼마나 엄청난 고기를 잡았는고 하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153마리라. 153마리! 여기에 신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에 신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지요. 153마리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숫자였다는 것입니다.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기록적인 은혜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기록적인 경험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지금부터 50년전 1963년 한국 최초로 유성볼펜이 하나 만들어 집니다.

작년말까지 이 회사 제품 전체가 아니라 볼펜 하나가 35억개가 팔렸다고 합니다. 전세계에서 기록적인 볼펜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당시 송삼석회장은 녹녹찮은 문구사업에 손을 대었다 큰 어려움을 겪고 기도하는 중에 153이란 축복의 숫자를 생각했습니다. 공모에서 여직원이 모나미라는 이름을 제안합니다. 모나미 153

대박! 기록에 기록을 갱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회사 이름이 모나미 회사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본문 11절 “일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는 축복입니다.

고기가 153마리가 아니라 15,300마리를 잡았다고 하더라도 그물이 찢어지면 소용이 없습니다. 사업에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건강이 찢겨진 사람들, 출세했으나 가정이 찢겨진 사람들, 성공했으나 신앙이 찢겨진 사람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기록적인 축복을 받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할렐루야.


먼저 교역자들이 은혜를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목자 회장과 지역장, 목자들이 심방대원으로 동행하게 될 터인테

가정마다 주시는 은혜가 심방대원들에게도 함께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심방받는 가정들마다 주님이 친히 찾아가 주셔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기록적인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