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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3. 9. 나는 행복한 전도자입니다 행26:24-29

14. 3. 9.                나는 행복한 전도자입니다              행26:24-29



성공철학자 죠지 와싱톤 카버는

“성공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성공하더라.”

계속해서 “둔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을 이기지 못하더라.”

또한 지혜로운 사람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열심히 사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더랍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즐기면서 인생을 사는 사람들, 행복하게 사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뿐만 아니라 사명의 짐을 짊어지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서도 「행복」하기 원하십니다.

고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지만 고난 때문에 행복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높은 자리에서도 행복하고 낮은 자리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가져도 행복하고 잃고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건강할 때도 행복하고 병들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별히 사역자들, 전도자들은 그 어떤 자리에서도 행복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평생 행복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행복의 기름, 기쁨의 기름 부으심을 구해야 합니다. 적어도 전도자들에게는 나의 고난, 핍박, 상실을 통하여 예수님이 전파될 수 있다면 그건 확실히 행복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죽음을 통하여 예수를 전할 수 있다면 그건 최고의 행복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순교라고 합니다. 순교는 그리스도인 최고의 영광, 최고의 행복입니다.


I. 자기 행복 선언


늘 본문은 전도자 사도 바울의 자기 행복선언입니다. 바울은 참 행복했던 전도자였습니다. 바울의 이 행복선언이 고루거각에서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한 말이 아니라고 하는데에 오늘 그 귀중함이 있습니다.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죄인의 몸으로 행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평소 행복을 느끼고 살던 사람도 손에 쇠고랑을 차고서까지 행복에 겨워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내 꼴이 이래서야, 설사 내가 행복을 선언한들 누가 내 말을 믿어 주겠는가?” 내적인 갈등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재판정에 서 있습니다. 재판관은 일개 하급판사가 아니라 한 나라의 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흔히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 나도 예수 믿지 않는 저 사람보다는 잘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도 저 자리에 앉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은 “저 왕도 나처럼 되게 해 주소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선언입니까? 바울은 포박된 몸으로 재판하는 왕 앞에 서서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나처럼 행복할 수 있기를 원하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입니까?


무리 높은 행복감이나 고상한 마음의 평강도 밖으로부터의 자극이 오면 무너지기 상입니다. ① 가령 모욕을 당했을 때 그렇습니다. 강아지 한 마리는 주림을 참기 어려울지 모르나 인격을 가진 사람은 모욕을 참기가 어려운 법이지요.

“바울아 너의 많은 학문이 너로 미치게 했구나” 바울은 자신이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는 모욕 앞에서 태연자약하며 나는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② 동정을 받았을 때에도 행복감과 마음의 평정을 잃을 수 있습니다. 묵묵히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던 사람도 애틋한 동정의 말을 듣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바울아 네가 교육계로 나갔더라면 총장은 되었을 테고, 사업을 했더라면 사장 회장은 했을 테고, 정치를 했더라면 로마 총독은 했을 터인데 어쩌다 이 신세가 되어서 쇠고랑에 묶인 몸이 되었느냐?” 동정 앞에 마음이 약해질 수 있지요.


그러나 바울은 불운아로 혹은 박복한 사람으로 동정하는 사람 앞에

“당신들도 나처럼 되라”고 외칩니다. 그 사람들처럼 살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스러워 하거나 불행해 하기는커녕 자신이 하나님 앞에 복 받은 자 임을 깨닫고

“당신들도 모두 나와 같은 행복자가 되시오”라고 말합니다.


③ 사람들은 흔히 권력 앞에 위축을 당하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권력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아그립바 대왕도 베스도 총독도 만장하신 고관 대작 여러분도 모두 나와 같이 되시오” 당당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재판정에 서 있는 지금 바울을 상상해 보십시다.

두 해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있었으니 얼굴은 창백해 있을 테고 그동안 부실한 음으로 연명했으니 얼굴엔 영양실조가 완연했을 터이고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었으니 건강상태가 좋을 리 만무했습니다. 의복은 남루했고 형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속인들의 눈으로 보면 쉽게 업신여길 만도 했고 쉽게 동정할 만도 했습니다. 불행하게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은나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복 받은 행복자다.  는 복음을 받았고 나는 복음을 전하며 산다. 이것은 금생과 내생에 영광스러운 일이다.” 자신의 행복과 영광을 자신만만하게 지금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도무지 행복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는 행복한 전도자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선언합니다.

이 말씀이 바로 오늘 설교제목입니다. 「나는 행복한 전도자입니다.」


II. 나는 예수 믿고 구원 받은 행복자


무엇이 그토록 행복했을까요? 구원받은 한 가지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선 이 말은 나 바울처럼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수님을 만나기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요 천직인 줄로 알고 살았습니다. 회당마다 찾아다니며 박해의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외국의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내 죽이기 위해 다메섹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 그는 하나님을 모독하다가 죽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그가 바로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셨구나. 이 땅에 와 내 죄를 걸머지고 돌아가셨구나. 그분은 살아나셨구나. 지금도 살아계시는 구나. 선악간에 우리를 심판하러 오실 심판주가 되시는 구나.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핍박하는 일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이 사실을 깨닫게 되고, 평생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 교회를 다시 온 땅에 나누고 확장하기 위해서 생애를 걸었던 것입니다.


“아 하나님을 섬긴다는 게 하나님을 핍박하는 일이 되었구나. 저들이 내 형제 자매인줄 알지 못하고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두었고 채찍질하여 죽였구나. 나는 그분이 내 주님인줄 알지 못하고 채찍 휘둘러 때린 불효자식이었구나.”

땅을 치며 울었습니다. 음식 한 톨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자복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났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복음전도자로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전혀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의 인생사에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핍박자가 변하여 전도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원수가 변하여 예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자가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옥에 갇히고 채찍에 맞으며 피 흘리는 일을 기쁨으로 알았습니다. 고난은 그의 행복이었고 영광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24에서 말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교회를 섬기다 받는 괴로움이 기쁨이랍니다.

- 자신이 당한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견주어 표현할 만큼 모진 고난을 격어도 그것이 주님 전하다 당하는 것이라면 기쁨이랍니다.

-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이 모진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차곡차곡 채워 가겠노라 말합니다.


내 심장 속엔 구원 얻은 감격이 가득 차 있고 내 얼굴엔 이 기쁨이 흘러넘치고

내 입술엔 이 구원소식이 터져 나와야 그가 real Christian -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공산당은 당원의 성분을 나눌 때

토마토 공산당원, 사과 공산당원, 수박 공산당원으로 나눈다고 합니다.

안과 밖에 다 빨간 공산당원은 토마토 당원입니다.

겉은 빨간데 벗겨보면 노란 사과가 있는 가짜 공산당원입니다.

남반부에도 공산당원이 있는데 이를 두고 수박당원이라고 합니다.

겉은 파란데 속은 빨간 수박같은 공산당이 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토마토 신앙인입니까 사과 신앙인입니까?


III. 나는 진정한 힘을 아는 행복자


사도 바울이 그토록 행복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둘째 “다 나와같이 되기를” 이 말은 “힘의 근원”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 힘인 줄 알고 또 권력이 힘인 줄 알고 아는 것이 힘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힘은 복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그 풍요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선전에 보니까 “니네들이 게 맛을 알아?” 그럽니다.

니네들이 이 복음의 능력을 알아? 구원 얻는 기쁨을 알아?

하나님과 함께 더불어 사는 이 행복을 너희들이 알아?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나는 구원 얻어 영생 얻어 천국의 삶을 누리는 이 맛을 알아? 그 얘기입니다.

내게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힘의 근원, 신령한 세계가 있으니 나는 행복자로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대인들은 바울을 향하여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행17:6)  사도바울의 위대한 감화력에 대한 고백입니다. 변사 더둘로는 바울을 송사하여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라고 악평했습니다.(행24:5)


당시 세상을 휩쓸었던 페스트 전염병보다 사도바울의 설교가 더 두렵다는 것입니다. 반대자들은 천하를 어지럽히고 소요케 하는 전염병처럼 그를 두려워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가 전한 복음 앞에 생명의 환희와 감격을 누리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바울이라는 존재는 멸망자들에겐 전염병같이 무서운 것이었고 구원 얻은 자녀들에겐 영생에 이르는 향취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가졌다. 이 복음을 알고 있다. 이 복음을 누린다. 이 복음을 나누는게 내 직분이 되었으니 나는 행복자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믿었습니다. 이 복음을 전하면 가정이 변하고 도시가 변하고 나라가 변하고 민족이 변한다.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은 오직 예수님께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를 선포하면 구원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2)


사도바울은 복음의 능력, 복음전도의 중요성, 이 사역을 감당하며 사는 복을 알았기에 사랑하는 제자에게 강력한 명령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이 명령형의 증인으로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가 등장합니다.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가 등장합니다. 죽은 자와 산 자와 하늘의 천사가 총동원되어 이 명령을 보증합니다. 읽은 이들은 비장함을 느끼게 됩니다.

- 그리고는 무려 다섯 가지 명령으로 복음전파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쓰라,

경책하라, 경계하라, 가르치라 권하라.


IV. 세상이 내 행복 빼앗아 갈 수 없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제일 쉬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제일 천한사람이구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으로부터 자유하는 사람, 그것들이 오히려 내게 절하는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을 꾸는데 세상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나락단들이 자기 나락단에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존경받는 꿈을 꾸었습니다. 돈이 권력이 세상이 자기 자신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중동에 모든 사람들은 태양과 달과 별에게 절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자기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세계열방과 이방 잡다한 신이 자기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는 꿈을 꾸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게 절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절 받는 존재들, 부러움의 대상은 되지 않을지라도 존경받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향하여 “당신도 이처럼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즉 왕관을 쓴 노예가 되기보다는 무관의 자유인이 되고 세상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영혼의 자유자가 되란 말입니다. 바울의 몸은 투옥되어 있었고 손발은 묶여있었으나 그의 심령은 한없이 하늘을 날며 자유를 만끽하고 살았던 것이지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6:9-13)


질병도 가난도, 핍박도 죽음도, 감옥도 채찍도 쇠사슬도 바울을 얽어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거듭난 생명의 자유를 억압할 수 없었습니다.

“환경이 나의 행복을 앗아갈 수 없다. 예수 안에서 나는 무한한 행복자로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선언이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복선언입니다.


V. 미치도록 행복한 전도자


바울은 참으로 행복한 전도자였습니다.

바울! 그는 예수에 미치고 복음에 미쳤던 사람입니다. 죽을 만큼 행복했던 사람, 미칠 만큼 행복했던 사람. 행복한 전도자! 그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바울의 간증을 듣고 있던 베스도 총독이 바울을 향하여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라고 합니다.

구원받은 간증 때문에 바울은 미쳤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바울의 중생체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저들의 눈에는 바울이 미친 사람으로 보일만도 했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이 나타나 나를 불렀다니 미친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지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요 영원한 세상이 있습니다.

선악간에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옥이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저놈이 미쳤구나.


믿음 없이 세상을 보면 세상은 아주 간단합니다. 태어나 먹고 자고 싸고 그러다가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인간에게는 육체 말고 영혼이 있습니다. 이 땅의 짤막한 인생이 전부가 아니고 영원히 이어지게 될 영생의 세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을 주도하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세상을 만든 분이 계시고 이 세상을 끝내는 분이 계시고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고 날 기다리는 그분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


선생님 무엇이 선생님을 미치게 만들었습니까?

예수 사랑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버림받아 마땅하고 죽어 마땅한 나를 구원하시고 용서하셨으니 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쓰러버려 마땅하고 천백번 죽어 마땅한 나를 소중하다 귀하다 너는 나의 자녀다. 이 복음 땅 끝까지 전하라 사명 맡겨 주셨으니 내가 미치지 않을 수 있는가?

나는 힘이 없으나 성령이 나와 함께 하니 나는 성령에 미치지 않을 수 있는가?

말씀 안에 이 세상을 바꾸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 나는 성령에 미치지 않을 수 있는가? 말씀 안에 이 세상을 바꾸는 모든 것이 들어있으니 나는 말씀에 미치지 않을 수 있는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죽은 자가 살아나는데, 지옥문은 닫혀지고 천국문은 열려지는데 내가 복음에 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울은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구세주이시다. 그분은 부활하셨다 지금도 살아계시다. 나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며 여러분들을 심판하러 이 땅에 오실 것이다” 목이 터져라 외쳐댔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무엇엔가 미쳐야 살 수 있다고 합니다.

20대는 사랑에 미치고, 30대는 야망에 미치고, 40대는 일에 미치고,

50대는 소유와 건강에 미치고, 60대는 명예와 은퇴에 미치고,

70, 80대는 멋진 인생 마무리에 미친다고 합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미쳐 살아가십니까? 

교회가 좋아서 미쳐보신 분이 계십니까?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존재가치가 귀해서 미쳐 보신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미쳐 보신 분이 계십니까?

기도에 미쳐 보셨습니까?

성경 읽다가 미쳐 보신 분이 계십니까?

복음 전하는게 좋아서 미쳐 보신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독생자를 날 위해 보내 주실 수 있었을까요?


최근에 기윤실과 한목협 한미준이라는 몇 개 단체에서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 앞으로 한국교회는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 통계조사, 설문조사를 내 본 적이 있습니다. 몇 번에 걸친 조사통계를 통하여 세권정도 책을 읽어가는 가운데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식어졌구나. 오늘 신앙인들이 믿음을 잃어버렸구나.

내 교회를 사랑하고 복음에 열정을 다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네가 나를 부끄럽게 여겼으니 내가 너를 부끄럽게 여기리라.

말씀하시면 어찌할꼬.


재미있는 발견 한 가지를 했습니다.

수도권에 있는 성도들의 신앙이 침체되어졌습니다. 그것도 이제 막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예수를 믿은 40대 50대 교회 중진들의 신앙이 곤두박질쳤다는 것입니다. 성경 읽는 시간이 급속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으로 끈질긴 기도 하는 성도들이 사라졌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기쁨으로 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생 구원의 도리, 종말론, 최후의 심판, 동정녀 마리아 탄생, 복음의 본질을 믿는 신앙인이 저 높이 있다가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세상의 언론, SNS 영향력 때문에 동성애를 인정하고 음주흡연을 인정하고 윤회설을 인정하고 교회가 불평스럽고 타종교가 귀하게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머리를 내 심장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몸부림했던 세상의 온갖 언론, SNS가 심장, 우리의 뇌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열광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심장들마다 싸늘하게 식어져서 불이 식어지고 있습니다.


예수 천당을 외치다가 미친 듯이 고난당했던 최 권능이 한국교회에서 살아나야 합니다. 내 조국 스코틀랜드를 내게 주시옵소서. 이 땅을 복음으로 점령할 수 없다면 차라리 나를 재물로 삼아 주시옵소서. 장로교 창설자 죤 낙스의 열정이 되살아나야 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에스더의 기도가 우리 가운데 살아나야 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해 오시면서 언제가 행복하셨습니까?

나는 교회에 교회 부흥에 미쳐 살았던 그 때가 제일 행복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가 좋아서 복음이 좋아서 예수가 좋아서 기도에 미치고 복음전도에 미치고 성도사랑 교회사랑에 미쳐서 뛰던 그때가 제일 행복했습니다. 세상 살기 힘들다고 기쁨을 빼앗기고 살지는 마십시다.

행복을 강탈당하고 살지 마십시다.


하나님 앞에 나 자신에게 세상을 향하여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를 향하여

우리는 행복을 선언하십시다.

예수가 내 안에 계시니 나는 70억 가운데 가장 행복한 자이다.

우리 가족들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니 우리 가정은 20억 이 지구상에 가정들보다 가장 행복한 가정이다.

한국에 5만교회가 있지만 하나 된 비전으로 서로 사랑하는 우리교회 한국에서 가장 행복한 교회다.

나는 행복한 아빠다. 나는 행복한 아내다. 나는 행복한 목사다.

나는 행복한 성도다. 나는 행복한 전도자로소이다. 선언하고 살아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