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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기석목사

생의 한가운데서

생의 한가운데서
삿16:17-22
(2000/10/22)

잠수복과 나비

"단지 아주 나쁜 번호를 뽑았을 뿐 나는 장애자가 아니다. 나는 돌연변이
일뿐이다."

이 말은 세계적인 잡지 <<엘르>>의 편집장이었던 장 도미니크 보비의 말입니다. 그는 저명한 저널리스트였고, 자상한 아버지였습니다. 멋진 생활을 사랑하고 좋은 말을 골라 쓰는 유머러스한 남자였고, 앞서가는 정신의 소유자였습니다.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살아가던 그는 1995년 12월 8일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3주 후 의식을 회복했으나,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왼쪽 눈꺼풀뿐이었습니다. 절망스런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좀 지난 후 자기의 사랑스런 두 아이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책을 쓰기로 작정했습니다. 유일한 의사 소통의 수단인 왼쪽 눈꺼풀을 깜박거리면 비서가 그것을 보고 한자씩 적어나갔습니다. 그가 15개월 동안 20만 번 이상 눈을 깜박거려 쓴 책의 제목은 <<잠수복과 나비>>입니다. 그는 자기의 짧은 인생을 풍자와 유머로서 진솔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잠수복'은 전신이 마비된 그의 상황을 상징하는 말이고, '나비'는 세상 어디든 날아가고픈 그의 정신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의 글 가운데 일부를 소개하겠습니다.

"지금 현재로서는 끊임없이 입 속에 과다하게 고이다 못해 입 밖으로 흘러내리는 침을 정상적으로 삼킬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기분일 것 같다."

"갓난아이처럼 퇴행한 내 모습에서, 때로는 병적인 쾌감을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다음날에는 이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비극적으로 느껴져, 간호보조사가 내 볼 위에 발라 놓은 면도용 비누거품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릴 때도 있다."

"정상적으로 호흡하는 것만큼이나 가슴 뭉클하게 감동하고 사랑하고 찬미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내 아들 테오필 녀석은 5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를 두고 얌전히 앉아 있는데, 나는 그 아이의 아빠이면서도 손으로 녀석의 숱 많은 머리털 한번 쓸어 줄 수도, 또 부드럽고 따뜻한 아이의 작은 몸을 으스러지도록 안아 줄 수도 없다. 이런 기분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까? 극악무도한? 불공평한? 더러운? 끔찍한? 순간적으로 나는 그만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다.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목에서는 그르렁거리는 경련이 터져 나와 테오필을 놀라게 한다."

"정상인으로서 마지막 잠을 자고 눈을 떴으면서도, 그것이 행복인지도 모르는 채 오히려 툴툴거리며 일어났던 그 아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한단 말인가?"

벌써 몇 해 전에 읽은 책입니다만 저는 <<잠수복과 나비>>를 늘 가까이 두고 있습니다. 내 삶이 지리멸렬하다고 생각될 때면 가끔 그 책을 만지작거립니다. 그리고는 살아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오늘을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생각해보곤 합니다.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물론 사는 게 힘겹고 고단하지요. 중림동 시장 어귀에서 생선을 파는 아주머니들의 그늘진 얼굴을 바라보면서 안쓰러움을 느꼈습니다. 회현동 지하보도에 골판지 한 장을 깔고 추운 몸 웅크리고 있는 노숙자들을 보면서 저의 안락한 삶이 참 죄스러웠습니다. 어느 신문사 편집실에서 열심히 기사를 쓰는 기자들을 바라보면서 참 바쁘게들 사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교우들 가운데도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는 이들이 계심을 압니다. 저는 늘 교회에 있으니까 여러분이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어떠한지 잘은 모르지만 조금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힘겨우시지요? 하지만 여러분,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우리는 은총을 입은 사람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흔히 어려운 일을 만나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습니다. 만사가 자기 뜻대로 이루어질 때 사람들은 대개 의식에서 하나님을 괄호 속에 넣고 삽니다. 하나님께 여쭈어보지 않고, 하나님께 아뢰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서도 편안합니다. 그러나 호시절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인생을 苦海라 하지 않아요? 살다보면 어려운 일도 만나게 됩니다.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을 만나기도 합니다. 사방을 둘러보며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지만,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아닙니까? 그렇다고 완행열차를 타고 고래 잡으러 동해로 나갈 수도 없는 것 아니겠어요? 그쯤 되면 사람들은 노래를 바꿉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찬338장). 괄호 속에 넣고 있던 하나님을 그때야 기억해내는 거지요.

생의 한복판에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뜻을 여쭙고, 그 뜻에 순종하기가 왜 그렇게도 어렵지요? 행복할 때, 하는 일이 잘 될 때, 인생의 호시절에 하나님을 가슴에 모시고 살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것인가요? 하나님을 믿되 생의 한복판에서 믿으세요. 생의 주변부에서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되지 말란 말이에요.


본분을 망각한 삶

오늘의 주인공 삼손은 참 비극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백성들을 해방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는 산을 뽑고 세상을 덮을만한 힘을 가진 대장부였습니다. 힘센 사자를 마치 새끼 염소를 찢는 것 같이 죽일 정도로 그는 장사였습니다. 나귀의 턱뼈로 수많은 블레셋의 군인들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힘을 잘못된 곳에 썼습니다. 악동들과 어울려 혈기를 부리기도 하고, 여색에 빠져 자기 본분을 망각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들릴라라는 여자의 애교에 넘어가 그만 자기 힘의 비밀이 머리카락에 있음을 발설합니다. 들릴라는 삼손이 잠든 틈을 이용해 그의 머리카락을 자릅니다. 머리카락을 잘린 삼손은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어요.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잡아 눈을 뽑습니다. 그리고 맷돌을 돌리게 합니다. 생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대가치고는 가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데 삼손의 비극적인 전락을 간략하게 기록한 성서 기자는 슬그머니 한마디를 더해 놓고 있습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서 성서 기자는 뭔가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본분을 망각하고 멋대로 살았던 과거의 삼손은 머리카락과 함께 죽은 셈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새로운 사람으로, 은총의 새 사람으로 조금씩 자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가 뭐냐고요? 저는 여기에서 두 가지에 주목합니다.


눈멂에서 눈뜸으로

첫째, 삼손의 눈이 뽑혔다는 사실입니다. 아리따운 여인들을 바라보고 세상에서 즐길만한 것을 찾기에 분주했던 눈이 뽑힘으로써 그는 새로운 눈을 얻게 되었습니다. 밖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내면을 응시하는 마음의 눈 말입니다. 그는 눈을 잃음으로써 자기 삶을 성찰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의 모습을 돌아볼 때 그에게 남은 것은 후회뿐이었을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삶의 가능성을 가지고 그는 허망의 정열에 따라 살았던 것입니다. 밖을 향한 창이 닫히면 하나님은 안을 향한 창을 열어주십니다. 그의 영혼이 어두웠기에 그는 빛이신 주님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두워진 영혼의 창에 하나님의 빛이 서서히 비추이가 시작했던 것이지요. 자라나는 머리털은 바로 하나님의 은총인 셈이지요.

둘째, 삼손이 맷돌을 돌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십시오. 연자맷돌은 통상 짐승들이 돌렸습니다. 삼손은 짐승 취급을 받은 거예요. 그의 인격은 철저히 부정되고 있습니다. 살아있음이 너무나 욕스러운 상황이에요. 그는 그 동안 자기를 영웅으로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한계를 지닌 인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음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지요. 자기 속에서 분출하는 힘이 언제까지라도 자기를 지켜줄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그게 얼마나 허망한 믿음인가를 그는 맷돌을 돌리며 절실하게 자각했을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살게 하시는 하나님 덕분임을 그는 깊이 절감했을 것입니다. 그는 맷돌을 돌리면서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새삼스럽게 돌아보았을 거예요. 자라나는 머리털은 바로 그의 자각이 성장하는 과정입니다.

지금 눈이 뽑힌 것처럼 답답한 지경에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겪는 시련을 신앙의 눈이 밝아지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맷돌을 돌리는 것처럼 고달픈 지경에 처한 이들이 계십니까? 살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을 굳게 잡으십시오. 지금 그런대로 잘 살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생의 한복판에서 주님을 만나십시오. 여러분이 하는 일마다 사랑을 쏟아 부으십시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이 되도록 살아보십시오.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질척질척한 현실에 하늘을 끌어들이는 일입니다. 음산한 세상에서 빛나는 미소를 짓고 사는 것, 거친 말 속에서 친절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 인정이 메마른 세상에서 정깊은 존재로 살아가는 것, 이게 다 우리에게 맡겨진 소명 아니겠어요? 물론 사랑을 선택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해요. 이유없는 사랑이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고, 우리가 만만한 존재로 인식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을 선택한 사람은 이미 승리한 사람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말합니다.

"당신이 최선을 다했으면 어떤 실패에 대해서도 상심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성공과 영광에 대해서도 모두 하나님께 돌려 드리십시오. 만약 당신이 실망한다면 자신의 힘을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만심의 표현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속태우지 마십시오. 겸손하십시오. 그러면 결코 방해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살아있음에 감사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일상의 모든 순간을 충분히 누리며 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바치며 사십시오. 그것이 아름다운 생입니다. 세계화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노동과 자본의 세계화 말고 사랑의 세계화를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들판에는 이미 추수를 기다리는 익은 곡식들이 물결치고 있습니다. 주님은 추수할 일꾼을 찾으십니다. 우리가 그 사랑의 일꾼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부터라도 한 순간 한 순간을 추수하는 일꾼으로 살아가세요. 생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처럼 아름다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직 해가 있는 동안 주님의 일을 열심히 감당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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