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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기석목사

갈대의 노래

갈대의 노래
요한8:12-16
(2000/11/5)

가을 들판을 더욱 쓸쓸하게 하는 것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은 참 쓸쓸해 보입니다. 길섶에 피어 하늘거리는 키 큰 코스모스가 왠지 안쓰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길 위를 뒹구는 낙엽을 보면 마음이 제법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늦가을 풍경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갈대가 아닐까요? 지난 월요일 교회 봉사자들과 춘천에 있는 청평사에 다녀왔습니다. 경춘가도를 오가면서 만산홍엽에 넋을 빼앗기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제 눈길을 끄는 것은 수수한 빛깔로 흔들리고 있는 갈대였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은 갈대의 노래를 듣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돌아와 양목사님에게 "갈대의 노래"라는 설교 제목을 넘겨주면서 "양목사님이 '갈대의 노래'라는 제목의 시를 써주면 내가 설교 준비하기 쉬울 텐데." 했더니 껄껄 웃으면서 "저는 '갈대의 노래'는 모르지만 '갈대의 순정'은 압니다." 해서 한참 웃었어요. "사나이 아픈 마음을 그 누가 알아주랴" 어쩌구 하는 노래 말입니다. 갈대는 우리 의식 속에서 너무 홀대받아온 것이 아닌가 싶어요.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중에 나오는 "여자의 마음"이란 노래가 있잖습니까?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여자의 마음…". 여기서 갈대는 항상 변하는 것, 신의 없는 것의 대명사로 사용되고 있어요. 성경에서도 덧없는 것, 무력한 것을 이야기할 때 "상한 갈대 지팡이"라는 표현을 쓸 때가 많습니다. 십자가형을 선고받으신 예수님을 조롱할 때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오른손에 '갈대 지팡이'를 들려드렸다고 하지요?


상한 갈대의 노래

하지만 성서는 그런 상한 갈대와 같은 존재야말로 하나님의 관심과 돌봄의 대상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신다"(사42:3).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세상은 상한 것, 약한 것, 이용가치가 적은 것을 가차없이 버리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연약할 때에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 세상이 다 잊어도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든든합니까? 며칠 전 아내와 교회에 오는 길이었습니다. 어느 집에서 내놓았는지 서랍장 하나가 길바닥에 초라하게 놓여있었습니다. 나는 무심히 지나치는 데 아내가 지나가는 소리처럼 말했습니다. "너, 버림받았구나." 그 말의 울림이 어찌나 쓸쓸하던지 낡아져서 버림받은 그 서랍장이 마치 나인 것처럼 가슴이 찡하더군요. 그래요. 버림받는 것은 참 쓸쓸한 일이지요. 이 스산한 늦가을에 정부는 퇴출기업 명단을 발표했습니다. 이제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고 떠돌게 될 것입니다. 세계화라는 허울좋은 구호가 얼마나 비인간적일 수 있는지를 우리는 몸소 경험하고 있습니다. 세계화는 약육강식의 정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하나님, 얼마나 좋아요?

파스칼은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지요? 사람은 갈대처럼 한없이 약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강합니다. 생각하는 갈대니까요. 파스칼이 사람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을 때 그는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가지고 계셨기에 한없이 약하셨습니다. 하지만 진리이셨기에 한없이 강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약하셨기에 우리들의 아픔을 헤아리실 수 있었고, 진리 안에서 강하셨기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생각하는 '갈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증언이 신빙성이 없다며 시비를 걸어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증언이니 믿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참 뜻밖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안다…그러나 너희는 모른다."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경외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안다." 이런 말씀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는 누구도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내가 어디서 왔는지(woher), 곧 자기 삶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어디로 가는지(wohin), 즉 삶의 지향점을 분명히 알고 사는 사람만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갈 데'를 아는 사람

사람은 '갈대'와 같습니다. 제 아무리 큰소리쳐봐도 때가 되면 스러지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갈 데'를 알고 사는 사람은 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돌아갈 데가 하나님의 품임을 아셨습니다. 하나님 아닌 어떤 것도 주님의 삶을 뒤흔들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맥없이 사는 까닭은 '갈 데'를 확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기웃거리느라 인생을 허비합니다. 고한의 폐광을 개조해 만든 카지노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지요? 고한과 정선의 지역 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처방이라고는 하지만 정부가 꼭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競輪, 競馬가 본래의 취지대로 건전한 레저가 되지 못하고, 일확천금을 꿈꾸는 이들의 신종 도박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음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 때문에 불화를 빚은 가정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은 정처없이 떠돌고 있습니다. 룸살롱이나 단란 주점을 기웃거리고, 우리 영혼을 어지럽히는 일이 벌어지는 곳에 가서 몸과 마음을 탕진합니다. '갈 데'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현대인들이 '개'(dog)처럼 거리를 방황하는 것은 '하나님'(God)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해서 웃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갈 데'가 어디인지 분명히 알고 사셨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막힘 없이 당당하셨던 것은 가야 할 데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길 없는 곳에 길을 만들며 나아갑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을 내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인생의 갈대]라는 시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인생은 꺾인 갈대 한 토막 뚫린 피리
높은 봉 구름 위에 거룩한 숨을 마셔
처량한 곡조 한 소리 하늘가에 부는 듯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꺾인 갈대가 되셨습니다. 하지만 그 몸에 난 상처 자국을 통해 주님은 하늘을 일깨우는 피리가 되셨습니다. 거룩한 숨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몸을 어루만졌을 때 세상을 구원하는 하늘의 곡조가 울려 퍼졌던 것입니다.


'갈 때'를 아는 사람

오늘 본문에 나오지는 않지만 예수님은 '갈 때'를 알고 사신 분입니다. 요한복음은 여러 번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된 것을 아셨다'고 전합니다. 갈 때를 알고 살아야 누추함을 면할 수 있습니다. 나아갈 때와 물러갈 때를 구별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때에 맞는 처신을 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비겁이고, 물러서야 할 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만용이거나 어리석음입니다. 주님은 아무 때나 죽기로 작정하고 사신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붙잡아 죽이려고 했을 때 예수님은 몸을 피하셨습니다(눅4:29-30, 요8:59). 아직 당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다 이루셨을 때 주님은 망설임 없이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시던 예수님이 잠들어 있는 제자들을 깨우며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일어나 가자." 어디로 가자는 것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죽음의 길입니다. 주님은 그 길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비노바 바베라는 인도의 스승은 수십 년에 걸친 공적인 삶을 마무리지으면서 말했습니다. "지나온 순례의 길은 거룩하고 힘겨운 노력의 길이었습니다. 이제부터 나의 순례는 버림의 여행이 될 것입니다." 비우고 버려 삶을 단출하게 하는 것이 잘사는 길이요, 잘 죽는 길입니다. 비노바 바베는 갈 때를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나무는 스스로 잎을 떨궈 생명 활동을 최소화함으로서 겨울 날 준비를 한다지요? 많은 국민들이 때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느 정치인을 보면서 비애감을 느낍니다. 고요히 자기를 돌아보며 말을 절제하고, 얽혔던 것들을 풀어내는 어른들이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생각하는 갈대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약하셨으나 진리로 강한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갈 데를 알고 사신 분이십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을 향한 순례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는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 삶은 복잡하지 않았고, 복잡하지 않았기에 힘이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갈 때를 알고 계셨습니다. 세상에 계신 동안에, 빛이 있는 동안에는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최선을 다하셨지만, 때가 되었을 때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일에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삶이 깨끗했던 것은 바로 이런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주님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입니다. 그는 비틀거리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한없이 약한 듯 보이지만 진리로 인해 강해진 이들이 부르는 '갈대의 노래'를 통해 아름답게 변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의 삶이 갈 데와 갈 때를 제대로 알고 사는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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