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김기석목사

우리 안에서 자라는 빛

우리 안에서 자라는 빛
롬8:9-11
(2000/11/12)


성경 공부 모임에 참여하는 교우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교우들의 그 진솔한 고백에 가슴이 따뜻해지곤 합니다. 자기 자랑이라면 듣는 사람 누구나 불편함을 느낄 겁니다.

·"나는 남을 정죄하는 데 빨라요.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허물을 찾아요."
·"나는 남들에게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자신있게 드러내지 못해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친절하게 대해야지' 다짐하지만 그 사람 앞에 서면 이내 마음이 닫히곤 해요."
·"명목상으로는 기독교인이지만 기독교인답게 살려는 노력은 거의 안하고 살아요."

사람은 보통 자기의 허물은 숨기고 좋은 모습은 드러내고 싶어하게 마련입니다. 왜 안 그렇겠어요. 세상은 허물을 덮어줄 사랑의 황무지예요. 가까운 사람들끼리도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기는커녕 상처를 덧내고, 남의 허물을 부풀리지 않던가요? 그래서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남 앞에 나의 약점을 보이기 싫어해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분들을 보면서 저는 참 감사해요.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교우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의 몸짓이기 때문이에요. 신앙 공동체는 바로 그런 신뢰의 터전 위에 세워지는 것이겠지요.


내면의 메마름

그런데 현대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많은 분들이 자기 속의 메마름을 느끼며 산다는 것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아름답게, 행복하게, 신명나게 살고 싶어해요. 하지만 현실은 참 고단하지요. 갈수록 태산이라고 하나의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이 우리 앞에 당도해 있어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는 것이지요. 그게 인생이거니 생각해보아도 어려운 건 어려운 것이지요. 이렇게 살다보니 우리 삶은 날이 갈수록 윤기가 적어집니다. 피곤해 보이고, 뭔가에 짓눌려 있는 것 같고, 뭔가에 쫓기는 것 같은 강박관념 속에서 뼈가 마르지요. 에스겔이 보았다는 마른 뼈의 골짜기는 바로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의 은유가 아니겠어요? 목마른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가와 물 한 잔을 요구해도, 우리 속에는 그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생수가 부족해요. 너털웃음을 터뜨려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세요?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니까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냉담해지고, 남을 판단하고, 남을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자꾸 냉소적이 되는 것이지요. 다른 이에 대해 화를 잘 내고 공격적인 사람을 생각해보세요. 그런 이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채워지지 않은 어떤 욕구 때문에 항상 불만 속에 살아요. 감사보다는 불평 불만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어요. 불만에 잠긴 사람이 남을 배려하거나, 관대하기는 어려운 일이에요.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것만 내놓을 수 있거든요. 자기 속에 평화가 없는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평화를 줄 수 없어요. 자기 속에 기쁨이 없는 사람은 남을 기쁘게 할 수 없어요. 자기 속에 웃음이 없는 사람은 남을 웃게 할 수 없어요. 자기 속에 따뜻함이 없는 사람은 다른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 수 없어요. 자기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전할 수 없어요.


아름다운 사람

저는 우리가 다 함께 꿈꾸어야 하는 인간적인 목표가 있다고 생각해요. 돈 많이 벌어서 호의호식하는 것은 예수를 모르는 사람도 꾸는 꿈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 해요. 예수님 닮은 사람 말이에요. 예수님은 연약한 사람들을 정말 아낄 줄 알고,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웃는 이들과 함께 웃는 분이셨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었지만 온 세상의 주인인 듯 당당하셨어요. 거짓과 위선을 폭로하는 일에는 주저함이 없었고, 불의한 권력 앞에서는 조금도 주눅들지 않으셨어요. 예수님은 너무나 아름다운 인간이셨습니다. 사람이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야 할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셨어요.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데 그 고백의 의미는 바로 예수님이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싶은 우리의 결심은 현실의 장벽 앞에서 번번이 무너지곤 합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자꾸 실망하게 됩니다. 세속적인 기준에 따라 사람을 바라보는 일에 자꾸 익숙해지면서 우리 눈은 세상을 닮아갑니다. 이런저런 세상일에 시달리면서 '세상사 다 그렇고 그렇더라'는 패배주의적 정서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잘못된 것을 보면 뒤에서는 눈을 흘기면서도 정작 그 앞에 서면 외면해 버리고 맙니다. 달콤한 속삭임은 달가워하지만 쓰디쓴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을 닮지 못하고 세상을 닮은 사람이 되어 갑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은 간단히 대답합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성령이 주시는 선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시면 우리는 신명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성령은 신바람이기 때문입니다. 검불을 몰아가는 세찬 바람처럼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힌 사람은 힘찬 삶을 살게 됩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경험이 없는 성도의 삶을 어느 분은 "바람 빠진 타이어"에 비유했습니다. 바람 빠진 타이어를 갖고는 먼길을 달릴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삶을 이끌어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령 안에서 살아갈 수 있나요? 금식기도를 하고, 철야기도를 하고, 산에 올라가 소나무 뿌리를 뽑나요? 그것도 한 방법일 수는 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고 싶은 갈망입니다. 이런 갈망이 우리에게 있나요? 아이들 등수가 올라가는 것, 주식 시세가 올라가는 것에 비해서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우리의 갈망은 너무 미약하지 않나요? 우리 신앙이 맥없는 까닭은 진실한 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갈망이 있다면 성령은 우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성령체험을 뭐 이상한 증상들로 설명하는 이가 있는데, 성령은 다른 게 아니에요. 성령받으면 예수님 하신 일을 나도 하고, 예수님 하신 말씀을 나도 하게 돼요.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해 볼까요?

1) 어둠과 혼돈을 없애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빛으로 임하십니다. 어둡던 방에 불이 켜지면 그 방안에 있는 것들이 다 눈에 들어오지요? 성령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것의 정체를 똑똑히 보게 합니다. 어렸을 때 우리는 도깨비 이야기를 참 많이 들으며 자랐어요. 그런데 그 이야기의 구조가 똑같아요. 밤길을 가던 사람이 도깨비를 만나 도깨비와 씨름을 해요. 씨름에서 지면 죽을 테니까 죽자사자 용을 쓰는 거지요. 그런데 새벽닭 울음소리가 들리고 동녘에 훤한 빛이 비취기 시작하면 도깨비는 얼른 도망쳐버려요. 그런데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기가 밤새 씨름했던 것이 몽당빗자루였다지요? 도깨비라는 게 뭐예요? 우리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이 만들어낸 허깨비 아니에요? 지금은 도깨비에 홀릴 일이 없다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백주에 도깨비에 홀려서 살아요. 우리는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죽기살기로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참 많아요. 놓아버리면 편할 것을 움켜쥐고 기력을 탕진하는 거지요. 하지만 성령이 우리 속에 임하시면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바로 보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서 두려움을 몰아내고, 꼭 해야 할 일을 하도록 우리를 바른 길로 이끌어 줍니다.

2) 사람들에 대한 호전성과 두려움을 버리게 하십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기 마음속에 기쁨의 샘이 하나 마련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 속에 기쁨이 있는 사람은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합니다. 성령의 역사 안에 사는 사람은 따라서 다른 이들을 아프게 하고, 외면하고, 짓밟고, 비판하고, 비웃으려는 열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 있는 분열의 씨앗을 없애 주십니다. 오히려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십니다. 남들과 대화를 거부하던 편협했던 마음을 넓혀주십니다.

3) 깊은 평화를 줍니다
성령의 역사 안에서 허망한 정열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다른 이들에 대한 두려움과 적대감을 극복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평화가 임합니다. 그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자책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앞날에 대한 염려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공부는 예습 복습을 안 해도 걱정과 근심은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하면서 삽니다. 하지만 성령 안에 사는 사람은 오롯이 현재에 삽니다.

한 사람이 서 있는 기차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습니다.
"루빈스타인! 루빈스타인!"
그러자 한 유다인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던 사람이 그의 뺨을 한 대 갈기고 나서 말했습니다.
"루빈스타인, 이 망할 녀석!"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뺨을 맞은 유다인도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웃고 있는 거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하하하, 저 바보 같은 친구가 나한테 속아 넘어갔지 뭡니까? 나는 루빈스타인이 아니거든요."

그 유다인은 루빈스타인이 아닌데 매를 맞았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이미 매는 맞았고 자기를 때린 사람은 저만큼 멀리 있고, 기차는 떠나고. 앙갚음을 할 수 있다 해도 맞은 것을 안 맞은 것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욕설을 해대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런데 그는 앙갚음을 하거나 욕설을 퍼붓는 대신 웃어 버립니다. 이 웃음은 내적인 깊은 평화에서 오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은 자기 속에서 점점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밝아오는 것을 느끼며 삽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쯤 계십니까? 아직 어둠 속에 살고 있다면 마음을 다해 성령을 사모하십시오. 성령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성령 안에 거할 때 우리의 메마름이 극복됩니다.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살아있는 존재가 됩니다.

'추천 설교 > 김기석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돋는 해 아침 빛 같이  (0) 2018.11.21
감사는 인생관이다  (0) 2018.11.21
갈대의 노래  (0) 2018.11.21
생의 한가운데서  (0) 2018.11.21
관용을 넘어롬15:1-7  (0) 2018.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