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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선택

유다의 선택
창44:30-34
(2000/12/3)


촛불 하나 기다려 온 듯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待降節 첫 번째 주일인 오늘 제게는 러시아에 살고 있는 조선족 시인 리진의 <촛불>이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뜻밖의 정전으로 여투어 둔 꽁다리 초를 찾아
책상머리에 켜 놓았더니
난데없는 부나방이 성급히 창문을 두드린다
평생 촛불 하나 기다려 온 듯

굳이 내용을 설명할 필요는 없을 줄 압니다. 어쩌면 과거에 우리도 한 번쯤 경험했음직한 일을 그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이 경험이 시가 되는 대목은 마지막 구절입니다. "평생 촛불 하나 기다려 온 듯". 시인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부나방 하나가 불켜진 창문을 향해 온 몸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일종의 경외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우리는 "평생 촛불 하나 기다려 온 듯"이라는 말에서 생애를 걸만한 일을 찾지 못한 이의 비애를 느낍니다. 여러분, 잡다한 삶을 꿰뚫는 하나의 목표를 찾으셨습니까?

기다림의 절기인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 계절에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유다의 마음 하나를 배울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편애는 독이다

여러분, 요셉 이야기 잘 아시지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다가,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고, 우여곡절 끝에 애굽의 총리까지 된 사람 말이에요. 저는 요셉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요셉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의 형들이 더 불쌍하다는 생각을 해요. 문제의 발단은 아버지 야곱의 편애였어요. 같은 자식이라도 더 정이 가는 자식이 있나봐요.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아준 요셉을 애지중지합니다. 하지만 편애는 사랑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소외감을 줍니다. 소외감이란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 듯한 느낌이잖아요? 다른 이는 따뜻한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행복한데 나는 바깥 추운 데 있다고 생각하면 이가 갈리겠지요?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것을 어떻게든 풀어야 하는 데, 아버지한테는 풀 수 없고, 그러니 원인 제공자인 동생에게 풀 수밖에요.

아버지의 편애에 상처를 입은 요셉의 이복 형제들은 동료 의식을 느꼈나봐요. 물론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에 마음이 하나 된다는 것은 좀 저열한 일이에요. 하지만 그들은 요셉을 미워하는 일에 하나가 됩니다. 좀 유치하지요? 그런데 현실 속에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요. 혼자서는 저지를 수 없는 일도 여럿이 모이면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 게 사람이에요. 죄책감을 전가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얼마 전 신문에서 끔찍한 기사를 보았어요. 1997년 독일의 어느 풀장에서 요제프 압둘라라는 여섯 살 난 소년이 죽었는데, 그 아이의 죽음의 내막이 이제서 밝혀졌대요. 50여명의 신나치주의자들이 나타나 요제프를 둘러싸고 "더러운 외국놈"이라고 욕하며, 억지로 근육마비제를 삼키게 한 후에 전기충격기로 아이를 기절시켜 수영장에 던져버렸던 것입니다. 주변에는 300여명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기세에 눌려 아무도 만류하지 못했다지요. 인간에게는 기회만 되면 터져 나올 수 있는 이런 폭력성이 있어요.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에게 한 일도 이와 비슷해요. 맏형인 르우벤이 나서서 요셉을 굳이 죽일 필요가 있겠느냐고 형제들을 만류해서 요셉은 생명을 건질 수 있었어요.


각성은 언제나 늦게 마련

미디안 상인들을 통해 애굽에까지 팔려간 요셉의 파란만장한 삶은 지금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것은 묻고 싶어요. 그 눈엣가시같던 요셉이 사라진 후에 형들은 과연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 되었나요? 아니지요? 또 요셉에게 미움을 쏟아붓고 나서 그들은 후련했을까요? 죄짓고는 못산다지 않아요? 미움을 통해 행복해지는 길은 없어요. 남에게 몹쓸 짓을 하고 내 마음이 편할 수는 없어요. 동생을 팔아버린 형들의 가슴에는 짙은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을 거예요. 멍울이지요, 풀리지 않는, 풀릴 수 없는.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은 자기 가슴에도 상처를 입히는 거예요. 남을 찌르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뾰족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뾰족한 그 마음은 자기 속도 찌르게 마련이에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부질없는 짓을 해요. 어리석은 것이지요. 각성은 언제나 늦게 마련이라지요?

자, 다시 요셉과 그의 형제들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요. 막힌 것은 뚫려야 하고, 얽힌 것은 풀어야 하잖아요. 형제들이 오랜 미움과 갈등을 풀 수 있는 계기는 뜻밖의 일을 통해 옵니다. 그것은 일곱 해나 계속된 흉년이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거의 그랬던 것처럼 야곱의 아들들도 곡식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가게 되었어요. 그 사이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었구요. 기가 막힌 인생유전입니다. 세월 때문이었을까요? 형들은 식량을 관리하고 있는 총리가 동생 요셉임을 알아보지 못해요. 당연한 일이에요. 그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요셉을 기억속에서 지우려고 애쓰고 살았을 거예요. 하지만 요셉은 달라요. 그는 형들의 얼굴 하나 하나를 잊을 수 없었을 거예요. 어떻게 잊겠어요. 요셉은 형들을 즉각 알아보았어요. 하지만 그는 딴 사람인 척하며 형들을 떠봅니다. 그들이 이전에 자기를 팔았던 그 사람 그대로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것이지요. 요셉은 형들에게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온 정탐꾼이라는 혐의를 뒤집어씌우기도 하고, 감옥에 가두기도 합니다. 식량 자루에 돈을 집어넣어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유다의 선택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자꾸 일어나자 그들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기들의 죄를 기억해냅니다. 자기들이 이런 시련을 겪는 까닭은 20여년 전 요셉에게 저지른 죄 때문인 것 같다는 것이지요. 사람은 그래서 가끔은 어려움을 겪어야 하나봐요. 그래야 자기 뱃속을 들여다보거든요. 간첩죄를 벗기 위해서는 그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시므온이 인질로 옥에 갇혀있는 동안 형제들은 가나안에 가서 막내 동생인 베냐민을 데려왔습니다. 그를 데려와야 그들의 말을 믿겠다는 요셉의 강요 때문이었습니다. 친 동기인 베냐민을 보면서 요셉은 형제의 정을 억제하지 못하지만 애써 본색을 숨기고 마지막으로 형제들을 시험합니다.

그는 형제들의 곡식 자루에 각 사람이 가져온 돈을 넣고, 특히 베냐민의 자루에는 점을 치는 데 쓰는 은잔을 넣어두도록 지시합니다. 마침내 식량을 구한 형제들이 가나안을 향해 돌아갈 때 요셉은 사람을 보내 형제들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곡식 자루를 검사합니다. 물론 곡식을 살려고 가져갔던 돈이 나왔고, 베냐민의 자루에서는 은잔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도둑이 된 것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베냐민의 죄는 특히 심각했습니다. 점치는 데 사용하는 은잔을 훔친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들이 빠닌 곤경을 알아차린 유다는 자기들 모두 종이 되겠노라고 벌을 자청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아니라고, 오직 은잔을 훔친 자만 종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유다가 나섭니다. 그는 아주 열정적으로, 하지만 겸손하게 자기들의 불행한 가족사를 총리 앞에 털어놓습니다. 물론 동생을 팔아먹었다는 말은 하지 않아요. 아버지가 사랑하던 아들이 사라진 일과 그 일로 상심한 아버지의 고통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 성물 절도사건에 연루된 베냐민이 자기 아버지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말합니다. 인간적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지요. 자기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못한다면 아버지는 결국 슬픔속에서 죽고 말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난다면 우리가 굳이 유다에 대해 언급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것은 유다가 아니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호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다의 마지막 말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
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진정을 회복하라

이것입니다. 그는 배다른 동생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는 이제 질투심 때문에 형제를 죽이려 했던 과거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제 유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의 안전이 아닙니다. 그는 아버지의 고통을 예감하고,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려는 것입니다. 이전에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그 아들이 아닙니다. 그의 이런 변화는 세월이 흘러간 덕분일까요? 그런 부분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유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聖 프랜시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겨울에 편도나무가 활짝 꽃을 피우자, 그 주위의 모든 나무들이 조롱
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허영이지?' 그들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렇
게 교만할 수가! 생각해 봐, 그렇게 해서 봄을 오게 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지!' 편도나무의 꽃들은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용서하
세요, 자매님들' 하고 나무는 말했습니다. '맹세코 나는 꽃을 피우고
싶은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갑자기 내 가슴속에서 따뜻한 봄바람을
느꼈어요."

"그를 대신하여 내가 종이 되겠습니다." 유다가 한 이 말은 유다의 말이 아닙니다. 편도나무가 활짝 핀 것이 편도나무의 공로가 아니듯이 말입니다. 그가 지난날의 잘못을 진정으로 아파할 때 하나님이 그 마음을 치유하셨습니다. 치유함 받은 그의 가슴에는 다른 이의 고통을 헤아리는 사랑의 샘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 지은 죄의 용서함을 받았을 때 그는 다른 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해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眞情'입니다. 유다의 진정은 곧 요셉의 마음속에 있던 응어리를 녹였고, 형제들은 마침내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잘못은 덮어버린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나의 죄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릴 때 주님은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십니다. 지성도 소중하고, 강한 의지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진정한 마음입니다. 진정한 마음을 회복할 때 우리는 따뜻한 봄기운을 느낄 것이고, 그 기운을 느껴야 우리 삶은 아름답게 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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