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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기석목사

평화 만들기

평화 만들기
벧전3:8-17
(2000/12/17)


상생의 지혜

오늘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형제 자매의 복을 빌기 위해 부름 받은 이들"이라고 합니다. 즉 남의 유익을 위해 마음 쓰며 사는 것이 부름 받은 이들의 삶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참 좋은 말씀이지요? 하지만 말이 쉽지, 그것을 삶 속에서 구현하기란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의 소망보다는 '내 좋을 대로' 살려는 몸의 욕망이 항상 재빠르기 때문입니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지요? 우선 내 배가 불러야 남의 배고픈 사정을 헤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온통 '나의 사정'을 들어달라는 이들의 외침으로 가득합니다. '나의 상처'를 먼저 어루만져달라는 요구로 부산합니다. '나' 다음에 '남'입니다. 이것이 자연스럽고, 본능적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순서를 뒤집습니다. '남' 다음에 '나'라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삶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다른 이들의 형편을 살뜰하게 헤아려보고, 보살펴주려는 마음의 여백이 있다면 세상은 한결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노동자와 사용자가 서로를 염려하고, 정부와 기업이 서로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려고 애쓰고, 여당과 야당이 창조적 긴장을 유지하되, 더 큰 유익을 위해 상호 협력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공존의 윤리', '상생의 지혜'가 부족한 듯합니다. 남을 어떻게든 깎아내려야 내가 올라가는 줄 압니다. 그러다 보니 함께 살아야 할 이웃들은 잠재적인 적이 되고 맙니다.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습니다. 어느 순간 당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긴장과 스트레스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바람을 조금만 빼라

지난 주일에 보았던 광경이 떠오르네요. 성탄절 장식을 준비하느라고 한 교사가 풍선에 바람을 넣고 있었어요. 그런데 풍선이 점점 커지면서 둘러선 사람들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지 시작했어요. 상체는 뒤로 젖혀지고, 미간을 잔뜩 찌푸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더군요. 언제 터질는지 모를 풍선을 보고 있으려니까 괜히 마음이 불편해져요. 결국 저는 그 교사에게 바람을 조금만 빼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가 바람을 빼자 비로소 다른 이들의 표정이 펴지더군요. 바람이 가득 찬 풍선은 안팎의 작은 자극에도 '펑' 하고 터져 버릴 수 있어요.

저는 빵빵하게 부풀어오른 풍선을 보면서 우리 마음이 이 지경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우리는 언제든 터질 준비를 하고 살아요. '누가 건드리기만 해봐라. 내가 가만히 있나!' 풍선이 부풀어오를수록 주위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과 같이, 과도한 긴장과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남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자기를 위해서도 그렇고, 남을 위해서도 그렇고, 자기 속에 여백을 만들면서 살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도 상처를 입고, 남에게도 상처를 입히게 마련이에요.

남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는 섬세한 마음 씀, 그것이 바로 남을 위해 복을 빌어주는 삶의 출발점이 아니겠습니까? 베드로는 어려운 처지 가운데 있는 형제 자매를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아시지요? 우리는 남에게 주는 대로 받아요. 따귀를 한 대 맞고 싶다면 지나가는 사람의 뺨을 한 대 때려보세요. 즉시 받고 싶은 것을 받을 겁니다. 질펀하게 욕을 먹고 싶은가요? 그러면 아무나 붙잡고 욕설을 퍼부어 보세요. 응답이 즉각적으로 올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호의를 가지고 하는 일에는 반응이 더디게 와요.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서 그래요. 하지만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진심으로, 그리고 겸손하게 사랑을 선택하면 사랑의 응답은 반드시 와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말했어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11:1)


남 좋은 일이 곧 나 좋은 일

베드로는 삶의 비밀을 푸는 아주 중요한 열쇠 하나를 우리에게 줍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 마음 쓰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복을 이어받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하기 때문에 소홀히 취급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복 받기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복 받는 비결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우리는 맞지 않는 열쇠를 가지고 복의 문을 열려고 허둥거리고 있는지도 몰라요. 집안으로 들어가려면 문을 통해 들어가야지요. 담벼락을 통해 들어가려고 머리를 디밀다 보면 머리가 깨지게 되어 있어요. 이제 꼭 알아두세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직접 우리에게 오기도 하지만 대개는 남을 통해 우리에게 와요. 남 좋은 일 하는 것이 자기에게 좋은 길이에요.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못된 게 하나 있어요.

"에이, 남 좋은 일 시켰네."

사람은 남 좋은 일 하도록 지음 받은 존재예요. 내가 행복하려면 내 주위가 행복해야 해요. 지금까지 우리는 '나'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아왔어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 더 마음을 쓰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존재론적 삶'에서 '관계론적 삶'으로의 전환이라고 하더군요. 말은 어렵지만 뜻은 분명합니다.

거지 나사로가 문간에서 굶주린 채 떨고 있는데, 자색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운 잔치를 벌였던 부자는 삶을 모르던 사람이에요. 그는 죽어 지옥에 갔는데, 그의 죄는 관계를 맺을 줄 모른다는 것이었어요.


화평을 구하고 따르라

베드로는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이들', 다양한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 시편34:12-16절을 인용하여 몇 가지 삶의 지침을 줍니다.

첫째, 혀를 금하여 악한 말, 거짓말을 하지 말라.
둘째,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화평', 곧 '평화'를 구하고 따르는 것이에요.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마5:9)이라고 하셨어요. 그러면 우리가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평화를 만들려면 먼저 우리 속을 어느 정도 비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남들이 들어와 쉴 수 있을 만큼의 여백을 마련하고 살아야 해요. 빵빵한 풍선에서 바람을 뺄 때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졌던 것처럼, 우리 속에 여백이 있을 때,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은 평화를 맛보게 될 겁니다. 마음의 여백은 물론이고, 우리는 시간의 여백도 마련하고, 물질의 여백도 마련하고 살아야 해요.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할 때마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의 곁에 있어줄 수 없다면 그 관계는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 자식간의 갈등도 사실은 서로를 위해 틈을 만들지 못한 데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물질의 여백도 마련하고 살아야 합니다. 남을 대접하고, 어려운 분들과 좋은 것을 나누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위해서는 덜 쓰는 생활의 절제가 필요하겠지요?

빈틈없는 사람은 완벽해 보이지만 왠지 가까이 하기 싫습니다. 실수해보지 않은 사람은 남의 실수를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실패해보지 않은 사람은 실패한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대체로 틈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빈틈없는 가정, 빈틈없는 사회는 감옥입니다. 숨쉴 여백조차 없이 교리와 제도로 얽어매놓은 교회도 감옥입니다.

다소 빈틈이 있는 사람, 그리고 제도가 건강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래야 자기 속에 있는 찌꺼기를 밖으로 배출하고, 밖의 신선한 것을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촘촘한 관계의 그물망들을 조금씩 벌려 '사이'를 만들 때 세상은 평화롭게 될 것입니다.

평화 없는 세상에서 평화를 만들려는 사람의 삶은 참 고단합니다. 스스로를 희생하고, 모욕을 짊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나쁜 일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는 것보다 좋은 일을 하느라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다지 나쁠 것은 없어요. 그것은 몸은 괴롭게 하겠지만, 영혼은 더욱 깊고 맑게 만들 테니까요. 베드로는 그래서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라고 했어요. 이 말은 예수님이나 바울 사도의 가르침에서도 핵심에 속하는 말씀이에요.


소망의 증인

베드로는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소망의 증인이 되라고 당부합니다(15). 오늘 우리의 현실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실업자가 늘어나면서 생존의 위협을 받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자살하려는 이들을 위해 정보를 제공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말 사람을 죽이고 죽음을 방조하는 데까지 나갈 줄은 몰랐습니다. 외적인 풍요로움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낙심합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소망의 증인이 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예수님께 소망이 있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 말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먼저 아름답고, 매력적이어야 합니다. 삶이 먼저이고 증언은 나중입니다.

가진 것 없어도, 건강하지 못해도, 배우지 못했어도, 자기 삶을 긍정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감동합니다. 특히 그분들이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의 소중한 것들을 아낌없이 내놓는 모습을 보면 숙연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됩니다.

어려운 세상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자기의 본분을 잃지 않고, 작은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 여백을 만드는 사람들, 감동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성도는 바로 이런 일을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곧 남에게도 유익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하도 좋아서,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계절에 삶의 속도를 조금만 늦추시고, 하나님을 위한, 그리고 이웃들을 위한 여백을 마련하며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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