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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기석목사

님이 오신다

님이 오신다
삼하 6:12-19
(2000/12/10)


방편적 신앙의 위험

대강절 두 번째 주일인 오늘 저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임금이었던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 주님을 영접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할지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다윗은 사울 가문과의 오랜 권력투쟁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왕위에 오른 그는 이런 저런 정치적인 위험 요인들을 제거하고, 시온 산성을 빼앗아 그 성을 다윗성이라 명명해요. 그는 그 성에 살면서 성벽을 쌓아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고, 두로 왕 히람이 보낸 목수와 석수들로 하여금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게 했어요. 또 혼인 정책을 통해 예루살렘 호족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오랫동안 적대 관계를 맺어온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왕임을 백성들에게 각인시켰습니다.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을 나타내는 것이거든요. 이 정도면 됐다 싶은데, 그는 아직 불안했던 것 같아요. 사실 그는 사울의 권력 기반이었던 팔레스타인 북부 지방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했거든요. 남북을 아우르는 한 나라의 임금이 되기는 했지만, 아직 사울 가문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얻지는 못한 것이지요.

뭔가 획기적인 게 필요했어요. 그는 생각 끝에 하나님의 궤를 생각해냈어요. '그래,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자. 그러면 백성들의 마음이 내게로 돌아오겠지.' 왜 이런 판단을 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어요. 그 속에는 모세에게 주셨던 십계명 돌판이 들어있었습니다. 히브리서 9장 4절에는 그 속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이 있다고 했습니다만, 구약의 전통에 의하면 십계명 돌판만이 들어있었습니다. 어느 경우이든 하나님의 궤는 한마디로 '정통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의 궤를 모시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인 것이지요.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일을 서둡니다. 그리고 그 행사를 대대적으로, 거창하게, 멋있게 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하나님의 거절

그는 정병 삼만 명을 뽑아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궤가 있는 바알레유다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갑니다. 하나님의 궤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두 아들인 웃사와 아효에게 수레를 모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로운 듯이 보였어요. 화려한 복장을 한 삼만 명의 군대가 행진을 하고,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 각종 악기를 연주하면서 행진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세요. 대단한 장관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은 그 광경에 압도당했겠지요. 그런데 갑자기 예기치 않았던 사건이 벌어졌어요. 수레가 나곤의 타작마당을 지날 무렵 소들이 날뛰기 시작했고, 수레에 실려 있던 하나님의 궤가 떨어지려고 했어요. 수레꾼이었던 웃사는 깜짝 놀라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습니다. 수레꾼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셈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궤에 손을 댄 죄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이 느닷없는 사태에 놀랐습니다. 복덩이인 줄 알고 모셔 가려던 하나님의 궤가 오히려 화의 근원이 될 수 있음을 그는 절감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두려웠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궤를 모셔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말았어요. 하나님의 궤는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졌습니다.


왕관을 벗으라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다윗을 택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왕으로 삼으신 분도 하나님이신데, 어째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체면을 구기게 만든 사건이 바로 하나님을 통해 일어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찬찬히 생각해 볼까요?

먼저 하나님의 궤를 모시려는 다윗의 동기가 불순했습니다. 그는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영접하려 한 것이 아니라, 자기 권력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의 궤를 모시려고 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이 삼만의 정병을 데리고 갔다는 데서 우리는 그의 동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를 근사하게 보이고 싶었던 것이에요.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을 모시러 간 것이 아니고 체포하러 간 셈이에요. 하나님이 화가 나실만하지요?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어요.

"바빌론의 느브갓네살 임금이 하나님을 찬양코자 했을 때 한 천사가 오더니 그의 얼굴을 때렸다."
이 말을 읽은 유다인 랍비인 코츠커는 물었습니다.
"그의 의도는 하나님을 찬양하려는 것이었는데 어째서 얼굴을 맞아야 했는가?"
그는 스스로 이렇게 대답했어요.
"너는 한편 왕관을 쓰고 있으면서 찬양하겠다는 것이냐? 어디 얼굴을 맞은 다음에 어떻게 찬양하는가 들어봐야겠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진리를 향한 열정], 153쪽)

왕관을 쓴 채 하나님을 찬양할 수는 없어요. 하나님을 찬양하려면 왕관을 벗어야지요. 도대체 왕이라는 게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지요? 우리들이 벗어야 할 왕관은 무엇일까요? 남들에게 근사하게 들리는 허울좋은 호칭들, '한다' 하는 자부심, 지식인의 허위의식…이런 것들을 버리지 않고는 참으로 예배드릴 수 없어요. 하나님은 다윗의 그런 태도를 받아들이실 수가 없으셨던 거예요. 웃사는 다윗의 못된 동기를 책망하시기 위해 수레에서 내려오려는 데 그것을 막으려 했기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구요.


오벧에돔의 역할

얼마 후에 다윗은 하나님이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전해 듣게 되었어요. 그가 어떤 복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해요. 하나님의 궤는 성가신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불순한 동기 없이 당신을 모시는 이들에게 복을 주세요. 오벧에돔은 바로 그런 순수한 신앙인이었던 모양이에요. 다윗은 그 소문을 듣고 다시금 하나님의 궤를 자기 성으로 모실 생각을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다윗입니다만 저는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면, 하나님께 복을 받을 것이고, 우리가 복 받은 모습이 좋아 보이면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제대로 모시려고 할 것 아니에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복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삶을 통해 증언해야 할 소명이 주어졌어요.


갑옷을 벗고, 춤추며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모시기 위해 오벧에돔의 집으로 갑니다. 그러나 전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입니다. 이전에는 새 수레에 하나님의 궤를 싣고 가려 했었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심스럽게 메고 가도록 합니다.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옮겼을 때, 다윗은 소와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자기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속죄의 제사를 올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작음을 고백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여섯 걸음은 당시의 의례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었던 모양인데 지금은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어요.

이전에는 삼만 명의 정병을 데리고 갔는데 이번에는 상당히 조촐한 행렬입니다. 다윗은 위풍당당한 군인의 갑옷을 벗고, 베로 만든 에봇을 입었습니다. 에봇은 제사장들이 입는 옷이긴 합니다만 다윗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옷이었습니다. 사무엘상 30장 7절에 보면 다윗이 아말렉과의 전쟁에 참여하기 전에 아비아달 제사장에게 에봇을 가져오게 하고는 그 전투에서 승리할는지를 하나님께 여쭈어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가 에봇을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인정하고, 깊이 신뢰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그는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고 말합니다. 격식에 맞는 춤이 아닙니다. 배워서 추는 춤이 아닙니다. 마음의 움직임에 자기를 맡기고 온 몸으로 추는 춤입니다. 남을 의식하면서 추는 춤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추는 춤입니다. 왕이라는 자의식을 말끔히 걷어내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된 사람의 춤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恣意的으로 이용하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내침을 받았던 경험이 있기에, 하나님을 모시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은 왕의 그러한 행위가 못마땅했습니다. 왕의 체면에 그게 무슨 꼴이냐는 것이지요. 나중에 다윗이 집에 들어왔을 때 미갈은 못마땅한 심사를 숨기지 못하고 다윗의 경거망동을 책망합니다. 그때 다윗은 확고하게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홧김에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술김에 하는 소리도 아닙니다. 그는 비로소 자기 삶의 자리를 찾았습니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 그것은 바로 여호와 앞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자기 성에 모시고 나서 번제와 화목제를 바쳐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그리고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했습니다. 하나님을 모신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다른 이를 축복하며 삽니다. 자기 속에 기쁨의 샘이 있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 기쁨의 샘물을 나누어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내면에 평화가 있는 사람만이 다른 이를 평화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님이 오신다

지금은 우리 곁에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시간입니다. 나를 근사하게 보이게 하려는 마음의 허영을 버려야 합니다. 교만의 갑옷을 벗고 겸손의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뒷짐 지고 주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전심전력을 다하여 주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온 힘을 다해 춤추었던 다윗처럼 우리도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사랑과 용서와 화해와 일치의 춤을 추어야 합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이제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어나 오실 주님을 위해 우리 마음의 방을 쓸고 닦아야 합니다. 수상한 세월을 살아가면서 우리 마음에 먼지처럼 스며든 불안감의 때를 닦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모시고, 주님을 모신 이의 아름다운 삶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모시고 있었던 오벧에돔이 복 받은 것을 보고 다윗이 하나님을 모실 생각을 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이 아름다운 기다림의 계절에 우리 모두 주님을 모신 이의 행복을 충만히 맛보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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