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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기석목사

한 꽃송이

한 꽃송이
마1:16-17
(2000/12/25, 성탄절)


무관한 이름, 중요한 이름

온 누리에 눈이 내려 세상이 환해진 듯한 아침입니다. 성탄절 아침 교우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 저는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한 마태복음 1장의 본문을 택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사실은 1절부터 17절까지 읽고 싶었는데, 여러분들의 난감한 표정을 떠올리며 16-17절만 읽었습니다. 사실 족보 이야기는 좀 지루합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뭐 그리 중요하길래 성경의 앞머리에 나와 있지요? 아는 사람이 자기의 족보나, 자기가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죽 읊어댈 때는 슬그머니 자리를 뜨는 게 상책입니다. 자기와 관련도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세세히 들어줄만한 여백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성가 가운데서 재미있는 것이 있더군요. 늘그막에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할아버지께서 어느 날부터인가 성경책을 열심히 읽으셨습니다. 손자가 가만히 보니까 마태복음 1장만 계속 읽으시더래요. 손자는 궁금했어요. 왜 그 재미없는 부분을 읽고 계신지. 그래서 넌지시 여쭈어보았어요. "할아버지, 왜 재미없게 족보 이야기만 읽고 계세요?" 할아버지가 대답하셨습니다. "얘야, 내가 하늘 나라에 갈 날이 이제 멀지 않았는데, 이분들 이름쯤은 알고 가야 하지 않겠니. 그래야 하나님 나라에 가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지." 뭐 대개 이런 내용입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저는 그 가사를 보면서 가슴이 찡했습니다. 할아버지께 그 이름들은 당신과 무관한 이름이 아니라, 아주 중요한 이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족보 이야기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서 우리는 몇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 이야기를 족보로 시작하는 까닭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인간 역사의 한 부분이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연히 이 세상에 오신 분도 아니고, 그렇다고 역사적 맥락과 관계없이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존재가 아니라, 인간 세계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족보에 네 명의 여성들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가 그들인데요, 가부장적인 이스라엘 사회에서 족보에 여성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특히 그들 가운데에는 유대인이 아닌 여인도 있고, 사회에서 천대받던 계층의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의 눈물과 한, 그리고 아픔까지도 부둥켜안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셋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세 시기, 즉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다윗에서 바벨론 포로기까지, 바벨론 포로기에서 그리스도까지를 각각 열 네 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빠진 이름들도 있어서 열 네 대라는 것은 매우 인위적인 설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히브리어의 알파벳에는 고유한 숫자가 부여되어 있는데, 다윗이라는 이름을 풀어보면 14가 된답니다. 그러니까 열 네 대는 다윗 왕가를 상징하는 숫자인 것이지요. 마태는 예수님을 다윗왕의 계보를 잇는 왕적인 존재로 소개하는 것이지요.

넷째는 족보 이야기가 시종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았다'고 되어 있지만,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한 부분에서는 표현이 다릅니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이것은 물론 예수님이 이전의 어떤 존재들과도 구별되는 새로운 존재이고, 그 태어남은 인간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의도적인 표현입니다.


한 꽃송이

이야기가 좀 어렵고 지루하지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는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를 볼 때마다 인류라는 나무의 아스라한 가지 끝에 아름답게 피어난 한 송이 꽃을 떠올리곤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그런 이미지에서 나왔습니다. 어법상으로는 '꽃 한 송이' 해야 옳겠지만 예수님의 독특성을 표현하기 위해 '한 꽃송이'라고 바꾸었습니다. 사실 이 표현은 정현종 선생님의 시 제목이기도 합니다. 저는 예수님이야말로 46억년 지구의 역사가 피워낸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꽃은 다른 어느 꽃과도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습니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기에 사람들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누구든 그분의 향기를 맡은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구세주'라고 부릅니다.


전환점과 목표

하나님께 죄를 짓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의 인간 세상은 죄와 어둠이 지극한 세상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 늑대가 되는 세상이었습니다. 물론 선의를 가지고 살아간 이들이 없지 않지만, 역사가 진행될수록 죄의 밤은 깊어만 갔습니다. 뭔가 전환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절망의 나락을 향해 나아가던 역사의 방향을 하나님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바꾸어놓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역사의 전환점이십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의 연도는 예수님이 오신 해를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서력 기원을 뜻하는 A.D는 "Anno Domini"의 약자인데, 그것은 "우리 주님의 해"를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역사의 전환점이면서 동시에 역사의 목표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어둠의 세력이 가장 왕성한 冬至 무렵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잡은 것은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둠을 물리치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마다 미움과 절망과 의혹의 어둠이 물러갔습니다. 사랑과 희망과 확신의 빛이 꽃처럼 피어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의 어둠을 밝히시기 위해 당신의 몸을 바치셨습니다. 초가 자신을 태워 빛을 발하듯이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신 애태움을 통해 세상을 환히 밝히셨습니다.


12월의 장미

얼마전 영국에 계신 장혜숙 집사님이 홈페이지에 남긴 글이 제게 두고두고 여운을 남겨주었습니다. 12월의 정원에 장미가 피었다는 소식이었는데요, 초겨울 날에 피어난 꽃을 보면서 생명의 신비를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여름과 가을 내내 장미나무는 나팔꽃 넝쿨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았답니다. 하지만 쌀쌀한 날이 며칠 계속되자 무성했던 나팔꽃 넝쿨은 폭삭 사그라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황량한 풍경 가운데서 집사님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팔꽃 넝쿨이 스러지자 꽃망울을 매달고 있던 장미나무에서 망울이 터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나팔꽃 덩굴에 짓눌려 두 계절을 파묻혀 지낸 장미는 초겨울 날씨 가운데 기어코 꽃을 피워내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나팔꽃 덩굴이 찬 서리로부터 장미나무를 보호해주었던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집사님은 장미꽃을 보면서 장미의 고통스런 기다림을 아프게 자각합니다. 그리고 대견해합니다. 꽃피우고자 하는 몸부림이 없었다면 장미꽃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장미는 나팔꽃 넝쿨에 갇혀있는 동안에도 꽃 한송이 피우고자 망울을 맺고 햇빛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희망이었습니다. 희망이란 그렇게 눈물겹고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희망의 표징

희망을 버리지 않고, 아름다운 날 보기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주님은 12월에 피어난 장미꽃처럼 다가오십니다. 우리 주위에는 희망이란 말조차 잊어버리고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거리를 떠돌고 있는 실업자들, 노숙자들,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장애우들, 병들어 고통받는 이들, 끼니를 거르는 이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근로자들, 외국인 노동자들…헤아려 보면 너무나 많은 고통과 아픔이 우리 시대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기를 기다리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쓰레기가 넘쳐나는 이 과잉소비의 시대에 주님은 소박한 삶을 선택하려는 이들을 통해 이 땅에 오십니다. 주님은 바로 이 현장, 눈물과 고통이 있는 현장에 오십니다. 오늘 우리가 정성껏 드리는 헌금은 전액 불우한 우리의 이웃들을 위해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어려운 이들과 물질을 나누는 것도 소중하지만 이제 삶을 함께 나누는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 대접'이고, 이웃과 나누는 '정'이고, 상처입은 몸과 마음을 사랑으로 어루만지려는 '따뜻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삶이 조금 더 성숙한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존재 전체를 주셨습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기도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우리가 거듭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삶이 한 순간에 변화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거룩의 길을 향해 단호하게 한 걸음씩 내딛는다면 우리는 어느새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이들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성탄절은 그래서 출발점입니다. 한 해를 마감하고, 새로운 한 해를 예비하는 이맘 때에 성탄절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축복입니다. 겨울 한복판에 피어난 장미꽃처럼 성탄절은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희망의 불빛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가슴에 예수라는 꽃 한송이를 안겨주셨습니다. 그 꽃은 생명입니다. 희망입니다.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그 꽃은 한 송이 꽃이 아니라, '한 꽃송이'입니다. 우리 모두 그 꽃을 가슴에 품고 그 향내에 취해 살기를 바랍니다. 그 향기로 세상을 가득 채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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