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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린 옛 생각, 달라진 인생 / 신우인 목사누가복음 24:44~53

버린 옛 생각, 달라진 인생 / 신우인 목사



누가복음 24:44~53






저격병이 총구가 긴 총으로 적군을 겨누고 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전투기가 적군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는 사진이 있습니다.
이 사진을 둥근 기둥에 붙였습니다.
그러자 총구는 저격병 자신의 뒤통수를 겨누고 있고,
자신이 발사한 미사일은 자신의 전투기 뒤를 따라오고 있습니다.
기발하지 않습니까?

이제석이란 청년이 만든 이 광고로 그는 국제 광고전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였습니다.
이제석은, 뉴욕 언쇼 페스티발 최우수상, 광고계의 오스카상으로 알려진 클리오 어워드 동상,
미국 광고 협회의 애디 어워드 금상을 비롯, 국제 광고제에서 50여개의 상을 받은,
세계 광고계가 주목하는 젊은이입니다.

그는 천재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전형적인 ‘루저’였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만화만 그렸고,
중고등학교 때는 대학교는 일찌감치 포기한 불량학생으로 부모조차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4년제 대학은 나와야 할 것 같아 입시준비를 하였는데,
선택한 과목은 미술.
그래서 들어간 곳이 한 지방대학의 디자인과였습니다.
졸업은 하였으나 지방대학 출신에다 수상경력이 전무하므로 받아주는 회사가 없었습니다.
결국 동네에서 간판이나 현수막을 만드는 일을 하였습니다.
동네 이미지를 바꾸는 일도 의미 있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일하고 있는데
그의 자존심이 박살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동네 국밥집 간판 수주가 동네 명함집 아저씨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순간 창피함과 함께 그의 마음을 찾아온 것은
“그래 아무한테도 무시당하지 않는 사람이 되자”는 결심이었습니다.

2006년 8월 가방 하나에 5백 달러만 달랑 들고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거장을 만나 한수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입학한 곳은 실용미술을 가르치는 한 시각 디자인 학교였습니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가까스로 마련하고, 가장 싼 방을 빌렸는데,
집주인은 명색만 집주인일뿐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이었고,
그에게는 무료급식소 리스트가 있었습니다.
거길 따라다니며 끼니를 해결하였습니다.
그런데 무료급식소에서 또 한방을 맞습니다.
“멀쩡한 청년이 왜 이런 곳에 드나드느냐?”는 자원봉사자의 말이었습니다.
그 이후 거길 가지 않았습니다.
굶으며, 핫도그로 끼니를 때우며 줄기차게 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공모전에 응시하는 일입니다.
돈도 줄도 빽도 없는 그가 뉴욕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하나가 걸려들었습니다.
2007년 수업시간에 만든 ‘굴뚝총’이라는 작품으로 원쇼 광고제에서 최고상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학교당국은 지금까지 이렇게 큰 상을 받은 학생이 없었다며
앞으로 공모전 비용은 모두 학교가 부담하겠다는 제안을 받았고,
마음 놓고 공모전에 출품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줄줄이 큰상을 받은 그는 유학 온지 10개월 만에
미국에서 가장 큰 광고회사에 스카웃되었습니다.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중역들까지 모이는 회의에 참석한 직후였습니다.
틀에 박힌 따분한 이야기만 오고갔습니다.
중간에 전화가 온 양 가장하고 그 길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러브콜이 쇄도하였습니다.
단돈 5백 달러를 들고 찾아온 뉴욕에서 1년 반 만에 7만 달러를 받는 직장인이 된 것입니다.
아무리 운이 안 따라 준다고 하여도 10년 안에 전용기를 타고 다닐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줄기차게 따라다니는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정말 행복하니? 네가 원하는 가치가 이거니?”
그는 그 질문에 답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회사를 또 그만두고 이제석 광고 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좋은 광고를 만들고 싶어요.
좋은 광고란 사회와 개인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광고입니다.”
광고를 하는 이유를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눠주는 것이라 생각하는 그는 적십자사,
사랑의 열매, 월드 비전, 풀뿌리 시민운동단체들의 광고기획을 돕고 있습니다.

이제석 씨는 가장 자신다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의 표본입니다.
그리고 그는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고, 그의 삶은 언제나 발전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 말씀 중에 가장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구절은,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24:48-49)

이 구절 중 키워드는 ‘증인’입니다.

우리더러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입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봐야 합니다.
무엇을 보라는 말씀일까요?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당부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인인데,
부활을 보지도 믿지도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내 전체 기반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증인으로 만들기 위한 첫 단계로 하신 일이 있습니다.
45절 말씀입니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성경은, 1,500년 동안 40여명의 저자에 의해서 기록된 방대한 책입니다.
아무리 성경이 방대해도 꿰뚫는 맥과 중심 주제는 있게 마련입니다.
성경은 그 어떤 책보다도 분명한 목적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성경이 전하는 한 가지 주제는,
온 우주 만물은 하나님께서 지으셨으며,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예수님은 어떤 고난과 위협 가운데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사실에 추호의 흔들림이 없으셨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셨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설득하고 위협하고 사정없이 흔들 것이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세상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오늘도 변함없이 운행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기죽지 말아라.
흔들리지 말아라.
겁먹지 말아라.
내가 큰 형으로서 어떻게 세상을 이기는지 온몸으로 보여줄 것이다.

정말로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강력한 세상의 힘에 의해 짓이겨졌지만,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을 아셨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기 전에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제석 청년은 아마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란 사실을 모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야 할 길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재능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고난이 와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배짱 있게 밀고 나갔고, 성공했습니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자신의 재능과 성공을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크게는 인류를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은
이제석 청년보다 더욱 열심히 더욱 신나게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을 이긴 증거입니다.
진정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때 담대해집니다.

‘담대하라’는 세 가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당당하라. 단단하라. 담담하라.

아버지가 돈 좀 있어도 당당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십시오.

단단하십시오.
단단히 준비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부족한 것입니다.
준비하면 두려울 게 없습니다.
준비하는 대신 끌탕하고 원망하고 절망합니다.
그래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악을 이기고 제대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단단히 준비해야 합니다.

담담하십시오.

숲에 사는 다람쥐가 머리에 떨어진 큰 도토리에 맞고는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모든 동물들이 난리를 치며 숲을 떠난 우화가 있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세상사에 울고 웃고 스스로를 지지고 볶으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너머의 세계를 증명하신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은 죽음너머의 세계를 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일에도 호들갑 떨지 않습니다.
담담할 수 있습니다.

스캇 펙 박사는 그의 책 ‘거짓의 사람들’에서 ‘무지’와 ‘게으름’을 최대 죄악으로 꼽습니다.

무지 중 최고의 무지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영적 무지’입니다.
또한 게으름은 최선을 다하지 않고 적당히 넘어가려는 태도입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정직과 성실로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데, 그러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종교행위로 액운은 피하고 행운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사탄의 올무에 걸려듭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탄의 조종을 받는 ‘거짓의 사람들’이 될 가능성이 너무나 큽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란, 땅의 존재가 종교행위를 통하여 신으로부터 복을 받으려는 모든 시도를 말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사람들에게 알려 영적무지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종교행위로 포장된 영적 게으름을 폭로하고,
영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당당하게, 단단하게, 담담하게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고, 단단하고, 담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단계를 말씀하십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여기서 키워드는 ‘회개’입니다.
헬라어로는 ‘메타노이아’.
돌아서다는 뜻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가 쓴 ‘메세지 신약’이라는 아주 좋은 책이 있습니다.
일상의 언어로 쉽게 쓴 성경입니다.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죄 용서를 통한 전적인 삶의 변화가,
이 곳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모든 민족에게까지 그 분의 이름으로 선포될 것이다”

회개는 단순히 입으로 행하는 종교행위가 아닙니다.
“죄 용서를 통한 전적인 삶의 변화”가 진짜 회개입니다.
삶의 전적인 변화가 없다면 회개가 아닙니다.

상태도 신통치 않은 내가 나의 주인으로서 힘겹게 세상을 사는 길에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내 욕심 차리며, 좀 있다고 이웃들을 하대하는 삶에서, 없다고 절망하는 삶에서
완전히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삶을 준비하지 않고는
종교행위에 열중하여 액운을 피하고 행운을 얻으려는
가장 오래된 길에서 완전히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옛 세계에 대한 종언이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선언입니다.
부활의 증인들의 삶의 주인은, 상태 나쁜 내가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있으면 베풀고 살립니다.
없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운세 따윈 보지도 않습니다.
액운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행운을 독으로 여깁니다.
예수님처럼 자유롭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으라”는 말을 남기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새기며 늘 성전에 거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전에 머무는 것, 이것이 최종목적이 아닙니다.

최종목적은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예, 맞아요. 성령을 받는 것이 최종 목적이예요.”
우리도 교회 중심의 생활을 하며 성령 받기를 간구하고 있어요.

그런데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자, 가장 먼저 튀어나온 말이 무엇입니까?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사행 2:17) 였습니다.

예언, 환상, 꿈은 절대로 종교현상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내로우 비유narrow view를 갖고, 교회에 묶여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는 이유는, 종교 규칙과 복 받는 비결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성령을 받으면 부활의 증인이 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의 꿈을 꾸고,
하나님의 비전을 보며,
죽은 것을 살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덧입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계,
우리 모두에게 주신 이 신비한 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신나고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성령충만한 부활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최고의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알게 되고 그 길을 천천히 걷는 것입니다.
제임스 베리의 말입니다.

부활하심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열어주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제 나만이 갈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을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며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