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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신우인목사

예수님의 지문이 찍힌 책 / 신우인 목사이사야 1:1~4 / 로마서 3:1~2

예수님의 지문이 찍힌 책 / 신우인 목사



이사야 1:1~4 / 로마서 3:1~2






1947년 어느 화창한 봄날,
타아미레 부족 출신 유목민 목동 모하메드 딥은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사해 북쪽 해안 바위 계곡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계곡과 골짜기를 몇 시간 째 소득 없이 오르내리던 그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습니다.
머리 위 암벽에 나 있는 시커먼 바위틈새였습니다.

순간 한 예감이 스쳤습니다.
‘잃어버린 양이 분명 저 안에 있을거야.’
바위 틈새 입구로 올라간 소년은 그 곳이 깊은 동굴임을 알고 선뜻 들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돌멩이를 동굴 속으로 던져 보았습니다.
동굴 벽에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뭔가 둔탁한 울림이었습니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엄습했습니다.
한걸음에 산 아래로 달려 내려온 소년은 친구 두 사람과 함께 다시 그 동굴을 찾았습니다.

살금살금 동굴 쪽으로 다가간 그들은 용기를 내어 좁다란 입구에 몸을 디밀고 내부를 살펴보았습니다.
희미한 빛 사이로 뭔가 보였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여러 개의 항아리였습니다.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항아리 안에는 분명 귀중한 것이 들어있을 것이라 생각한 그들은 달려가 항아리를 깼습니다.
그런데 그 항아리 안에는 낡은 가죽과 파피루스 두루마리들 들어 있었습니다.
맥이 탁 풀렸고 이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내용물들을 마구 짓밟고 내동댕이 쳐버렸습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잠깐!’하고 소리쳤습니다.
행동을 멈춘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혹시 이것들이 돈이 될 수도 있을거야.”
그 말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럴 것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상태가 비교적 깨끗한 두루마리 몇 개를 추려 동굴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들고 있는 그 두루마리들의 진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발견한 것은 가장 오래된 성경 필사본이었고,
이것은 성서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베들레헴 암시장에 헐값을 받고 넘져진 그 물건들은
여러 경로를 거쳐 그 가치를 아는 전문가의 손에 들어갔고,
이어서 대대적인 발굴이 이루어졌습니다.
엄청난 양의 성경 필사본들과 당시 기록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길이 7미터에 달하는 이사야 원본도 끼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이사야서는 기원전 100년 경에 기록된 것으로 판명이 났는데,
당시 가장 오래된 성서 원본 ‘마소라 본문’보다 무려 1,000년 이상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학자들은 흥분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성경과 대조해 보았고 경악했습니다.
완벽하게 일치하였습니다.
이로서 그동안 수없이 제기되었던 조작설 문서설 편집설들이 입을 다물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의 세례와 광야에서의 사탄의 시험을 거쳐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안식일 날 고향 나사렛 한 회당에 들어가 회중들 앞에서 성경 두루마리를 펼치셨습니다.
그리고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게 읽으신 다음,
이어서 그 두루마리를 말아서 성경을 보관하는 사람에게 넘겨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읽으셨던 그 말씀이 바로 이사야서 61:1 이하에 기록된 것입니다.

목동들이 발견한 이사야서를 연구한 앙드레 파로 교수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손동작 하나하나가 더욱 가깝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양피지에는 아직도 두루마리를 들고 읽던 사람들의 지문이 남아 있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파로 교수의 말에 제 가슴이 떨려왔습니다.

이사야서는 예수님의 첫 지문이 찍은 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마저도
700년 전에 예언자 이사야가 전한 하나님 말씀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인용하시며 세상을 향한 구원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이사야가 전한 말씀은 정말 옳은 것이며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이사야서를 바로 이해하면,
나를 억압하고 내 눈을 멀게 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 맹목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
사랑하는 우리들에게 주고 싶어하신 그 자유와 은혜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디로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 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떼돈을 벌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만사형통하는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향유하며 제대로 의미있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중요한 말씀을 전한 예언자 이사야는 누구일까요?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예언자들에 대한 자료는 대단히 부족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예언자)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예언)이 가려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사실을 예언자 자신들이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받았으며, 제대로 전했으며,
이 말씀을 믿어야 하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우리들은 얼마나 나를 드러내려 합니까?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또한 한사코 드러내려는 내 자신은 얼마나 보잘 것 없습니까?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무력합니까?
볼 거라고는 하나 없는 내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맥없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수없이 목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습관처럼 듣습니다.
내 이익을 위하여 교묘히 왜곡시킵니다.
나를 정당화시키는 도구로 악용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신통치 않은 논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반박합니다.
그러다가 행여 그 중 하나라도 마음에 들어왔다 싶으면, 은혜 받았노라고 떠벌입니다.
그리고는 얼마 후에 그 은혜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예전의 나로 돌아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언자들은 달랐습니다.
예언자치고 부귀영화나 화평을 누린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이유로 한결같이 비판과 핍박을 받고 고난 가운데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가려질까봐, 자신을 철저히 가렸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도 그랬습니다.

이사야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유다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본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사 1:1)

랍비자료들은 이사야는 웃시야 왕(B.C 792-740)의 사촌이라고 전합니다.

사촌은 이모나 고모의 자녀들로서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 형제들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웃시야 왕은 남왕국 유다를 52년 동안 다스리며
솔로몬에 버금가는 번영을 이룩했던 대단한 군주입니다.
그런 왕의 사촌인 이사야는 왕자에 버금가는 신분으로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자신의 특권을 기꺼이 버렸습니다.

훗날 이사야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성경에 이사야가 당한 순교에 대한 한 줄의 암시가 있습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히 11:37)

랍비자료에 따르면 이사야는 두 널빤지 사이에 놓여 톱으로 썰려서 죽었습니다.
므낫세 왕에 의해서입니다.
므낫세는 남왕국 유다를 회복할 수 없는 영적 타락으로 이끈 최악의 왕으로,
고조 할아버지뻘 되는 이사야의 입을 잔인한 방법으로 막아버렸습니다.
므낫세 왕 이후 얼마 못가 유다는 멸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은 사람들의 당연한 말로입니다.

므낫세 왕이 할아버지 이사야의 입을 막았던 이유나,
이사야가 영화를 버리고 하나님께서 가라하시는 길을 택한 이유나 모두 동일합니다.
모두 “예언” 때문입니다.

도대체 예언이 무엇이길래, 할아버지마저 죽일 수 있으며,
그 어떤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예언’이라고 하면 흔히 앞날을 내다보는 것을 연상하고, 점쟁이나 복술가등을 떠올립니다.
요즈음 많은 교인들도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기도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앞날을 묻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이 그런 것이라면,
예언자를 죽일 필요가 전혀 없고, 오히려 복채 들고 줄을 서서 그들을 찾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예언은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찌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라”(신 13:1-3)

신명기는 최초의 기독교의 원칙들을 천명한 중요한 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탄의 시험을 모두 신명기의 말씀을 정확히 인용하시며 물리치셨습니다.

그런 신명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네 앞날에 대한 그들의 말이 맞았다고 하더라도),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예언자 예레미아도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 (중략)
그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으로 멸망할 것이요,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인하여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입을 것인즉” (렘 14:14-16)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이 거짓 예언자들, 소위 기도하는 사람들에 의해 놀아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언하십니다.
“그들은 멸망할 것이요, 그 백성들은 예루살렘 거리에 던져질 것이라.”
소위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놀아나는 한국교회나 교인들이 당하고 있는 현실 그대로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세상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조롱합니다.
그래서 이사야를 보내고 예레미아와 예언자들을 보내셨고,
이 말씀에 오늘도 귀를 기울여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예언은 ‘내다볼 예豫’가 아니라, ‘맡길 예預’자 예언預言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예언預言은 신탁神託이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 3:1-2)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셨다는 것이 가장 큰 유익이며 특권이라는 뜻입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 하지 말고, 앞날이 어떻게 될지 염려하지 말고,
“네게 맡긴 말씀을 의지하고 열심히 살면 너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난단다.”는 뜻입니다.
네가 살아난 다음, 네가 체험한 그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살리라는 뜻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패망의 길을 가고 있는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그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읽어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자 호세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으니 벌을 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원칙으로 온 우주만물과 피조물들을 운행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버리고 자신의 원칙이나, 소위 기도하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따릅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쌓아놓았다고 하더라도 무너져 버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치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사망내지는 부상인 것과 같습니다.
다만 그 결과가 서서히 나타난다는 것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를 보내신 이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들이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생명이 더욱 풍성해진다는 것은,
죽음너머의 세상도 영이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관장하고 계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 때,
죽음의 공포로부터 위축되지 않고,
세상일에 코를 박고 일희일비 하지 않으며,
마음껏 신나고 행복하게 의미 있고 보람 있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 이사야는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도 하나님의 예언자가 되어 죽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전한 말을 마음에 새기고 진짜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내 미래에 대한 엉터리 예언을 단호히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내 삶이 더욱 풍성해지라는 것이며,
그 풍성해진 생명을 나눠주며 살라는 것입니다.
유홍이 님 댓글입니다..에러가 있어 다시 올립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상한 심령이 느껴져요..
하나님은 항상 더 좋은것으로 채우시잖아요.
사랑하는 목사님.
목사님 보시기에 부족한 저희들이지만요
저희들 가슴에 하나님을 가장 깊이 심어주시는 분이 목사님이시니 부족한 저희의 감사로
또 저희안에 심겨진 하나님으로 목사님의 맘이 만져지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