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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 신우인 목사이사야 1:4~12

슬프다 / 신우인 목사



이사야 1:4~12





이사야에만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슬픔’입니다.

슬픔이란 단어가 왜 다른 책에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사야서에 나오는 슬픔은 인간의 슬픔이 아니라,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하나님의 슬픔? 하나님도 슬퍼하시나?

우리들은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서는 익숙하지만 하나님의 슬픔은 대단히 낯이 섭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슬픔은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슬픔은 언제나 사랑과 연결되어 있고 사랑에 비례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슬프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슬퍼하지만 사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깊으면 슬픔도 깊어집니다.

분노도 슬픔을 이기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억울한 죽음에 분노하지만 죽은 사람의 어머니는 그저 슬퍼할 뿐입니다.
어떤 큰 분노도 슬픔 안에서는 그 자취를 감춥니다.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동네 친구 둘이 전쟁터로 징집됩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최전선, 친구가 날아온 직격탄에 산산이 부서져 버립니다.
남은 친구가 산화하여 형체가 없는 친구의 시신을 수습합니다.
잠시 고향으로 돌아온 청년에게 친구어머니가 묻습니다.
“우리 아들은 편하게 죽었니?” 그 청년이 대답합니다.
“네 어머니, 한스는 제 품에서 평안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말에 친구 어머니의 슬픔은 약간 가벼워집니다.

기쁨도 슬픔을 이기지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그 기쁨은 잠시,
먼저 떠난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더욱 슬퍼합니다.

슬픔은, 너무나 사랑하였기에 그 어떤 감정도 끼어들 수 없는 마지막 감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빌어 말씀하십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 물러갔도다.”(이사야 1:4)

하나님께서 슬퍼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며,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만홀히 여긴다는 것은 우습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하나님을 우습게 여겼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의 신 바알을 섬긴 것으로 흔히들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풍요의 신 바알이나 다른 신들을 섬긴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여전히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 증거가 11절 이하에 잘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기 규정에 따라,
여호와 하나님께 무수한 제물로 정성껏 제사를 드려 하나님을 배부르게 하였음을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셨습니다.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월삭은 매달 첫날을 의미합니다.
이날 온 백성이 모여 나팔을 불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안식일은 물론이요, 규정에 따라 시마다 때마다 모여서 열심히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하나님을 그토록 슬프게 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문제점을 보다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의 사촌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사람과의 나이차가 상당히 날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 말년에 태어나고 자랐으리라 추정합니다.

웃시야(BC 792-740)는 남왕국의 군주로, 16세에 왕위에 올라 장장 52년간을 통치하였습니다.
그가 제위에 오를 때 남왕국 정황은 형펀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아마샤 왕의 패배로 인하여 백성들은 포로로 붙잡혀 가고, 수도는 불타고,
국가 재정은 바닥났으며, 요새들은 황폐화되고 백성들은 절망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웃시야는 어린 나이임에도 예루살렘을 요새화하고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여
이스라엘의 영원한 숙적 블레셋에 대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막강하던 블레셋이 웃시야의 공격으로 핵심 지역을 빼앗기고
그 이후 블레셋은 다시 회복하지 못합니다.
또한 동으로는 암몬 족속과 아라비아와 마온 부족들을 굴복시켜 조공까지 받을 정도였습니다.
농업과 목축을 장려하여 백성들이 굶주리는 일이 없도록 하였으며,
사해 남단 아카바만 항구도시 엘롯을 재건하여 국제무역의 허브로 삼아 무역에도 힘을 썼습니다.
엘롯은 오늘날의 싱가포르나 홍콩 두바이 같은 곳으로
일찍이 솔로몬이 개발한 무역 중심지였습니다.
웃시야는 척박한 남왕국 유다에게
솔로몬의 영화에 버금가는 영화를 가져다 준 대단한 군주였습니다.

성경은 웃시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대하 26:5)

“그(웃시야) 이름이 원방에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더라”(대하 26:15)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
도무지 불가능해 보였으나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기적적인 부흥을 이룩하였다는 것입니다.
웃시야는 그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온몸으로 체험한 왕입니다.

그런 왕이 통치하는 남왕국 유다에서 하나님의 제사를 소홀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1970년대 이후,
“새벽종이 울렸네”,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삼천리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습니다.
온 백성이 힘을 합쳐 5,000년의 가난을 물리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더불어 교회도 비약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십자가만 세워놔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새벽기도의 불이 붙었고, 마을마다 교회, 산골짜기마다 기도원이 들어섰으며
찬송과 기도소리가 전국 방방곡곡을 메아리쳤습니다.
수만 명이 모이는 초대형 교회들이 등장하고 세계는 한국 교회를 주목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섬겨 복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습니다.
너도 나도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하여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교회는 대한민국 번영의 선봉장이었습니다.

그 때 모두 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왕국 유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라는 일찍 보지 못한 번영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웃시야 왕뿐만 아니라, 온 백성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모여들었고
하나님께 드리는 정성을 다한 제사의 연기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피어올라 하늘을 뿌옇게 만들었습니다.
웃시야 왕을 칭송하는 백성들의 소리역시 연기를 타고 하늘 높이 오릅니다.

그런데 유다 전역을 뜨겁게 달구는 종교의 불길에 찬물을 끼얹는 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누구야? 왕이하 모든 백성들은 양미간을 찌푸리며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그것은 웃시야 왕의 사촌 이사야였습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그인들, 그런 말을 하고 싶었겠습니까?
그럼에도 어느 날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에 압도당했고,
그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예언자들이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말,
누구도 듣기 싫어하는 말을 목숨을 걸고 전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우리들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성을 다한 예배와 열심을 다한 전도와 봉사와 헌금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며,
하나님의 복을 허락하시는 것을 당연히 생각합니다.
문제가 있다면 믿음이 약하고 정성을 다하지 못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그런 생각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틀린 정도가 아니라, 범죄 하였으며 행악하였으며 부패한 행악의 종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행동심리학자 스키너만큼 종교행위의 허구성을 드러낸 사람도 없습니다.

커다란 유리 상자를 만들어 그 안에 비둘기를 한 마리 넣었습니다.
그리고 중앙에 커다란 원을 그려놓고는 그 원안에 발을 들여놓으면 먹이가 쏟아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리저리 다니던 비둘기가 그 원을 밟으면 먹이가 떨어진다는 것을 드디어 알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원을 밟았습니다.
그 때마다 먹이가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일정한 시간이 되어야 먹이가 나오도록 장치를 변경하였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비둘기는 열심히 원을 밟았지만 그전과는 달랐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먹이가 쏟아졌습니다.
허겁지겁 먹이를 삼켰습니다.
이 어찌된 노릇인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비둘기가 어느 날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일정한 형식을 갖춘 행동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먹이가 쏟아졌습니다.
비둘기는 자신의 그 일정한 형식의 행동이 먹이를 가져다준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스키너 박사는 그 행동을 ‘종교적 행위’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심히 하나님께 드렸던 제사가 바로 종교적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2)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열심히 행하여 복만 잔뜩 받으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행위가 바로 ‘종교행위’입니다.

자녀들이 왜 그토록 전화 열심히 하고, 선물을 열심히 보내며,
시간이 날 때마다 뻔질나게 찾아뵙는 지 부모는 다 알고 있습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 할 자녀들이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효도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 때 부모님의 마음은 슬픕니다.
그 때 슬픔은 그 어떤 감정보다 참담한 비통함입니다.

종교행위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는 시도만큼 하나님을 비통하게 만드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에서,
오히려 열심을 다해 하나님 보좌를 움직이라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빈손으로는 절대 안 된다고,
“어허 정성이 부족하구나” 망칙스런 외침이 목사 입에서 거침없이 튀어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외롭고 슬픕니다.

아브라함 헤셀이 마음에 새겨야 할 말을 하였습니다.

“종교가 멍에로, 도그마로, 두려움으로 군림할 경우,
인간의 영혼을 기르기는커녕 오히려 능욕하게 된다.
종교는 마땅히 영혼의 불이 거룩하게 타오르는 제단이어야 한다.”(사람을 찾는 하나님 p387)

여기서, 멍에란 ‘종교 의무’를, 도그마란 종교적 규칙들을 말합니다.
예배와 전도와 기도와 구제가 멍에가 되고 도그마가 되고, 종교적 의무와 규칙들이 될 때,
그래서 그것들을 무시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다고 가르칠 때,
하나님은 엄청난 두려움으로 다가오게 되고,
그때 사람들의 영혼은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출구조차도 없는 감옥에 갇혀 죽어가게 됩니다.
사람이 만든 감옥은 기약이라도 있지만,
종교의 감옥은 죽어서도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지옥입니다.

유대교 한 랍비 문헌에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인데(Rabbenu Yonah, Berachot 12a),
귀담아 들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그 제사의 의미를 잘 알고 있어야 하며,
제물을 바치는 사람 역시 그 제사의 의미를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 제사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다른 의도로 드린다면
그 제사는 무효가 된다는 것입니다.”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뇌물로서 열심히 바쳐 복을 받을 생각만 했습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눈도장을 찍지 않으면 벌 받을 것 같으니까 그래서 왔다는 것입니다.

복 받기 위한 제사와 예배는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모두 무효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외칩니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6)

생각 없이 맹종하는 종교행위에 지친 심령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지친 심령들을 위로하고 새롭게 하지는 못하고
더욱 독려하는 종교지도자들의 행태에 대한 통렬한 비판입니다.

“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중략)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에워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잘못된 종교행위가 계속될 때 필연적으로 닥칠 재난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미 한국교회가 겪고 있습니다.
교회들이 세상 사람들의 비판과 외면을 받으며 포도원의 망대같이 외로이 서있습니다.

유대교 랍비들은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된 이유를
“율법에 따라서 살았지 율법의 요구를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을 따라 살기란, 아무 생각 없이 규칙에 따라 행하는 종교행위를 뜻합니다.
율법의 요구를 넘어선다는 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11:45)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는 벌벌 떨지어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여러분.

거룩은, 빛나다, 따뜻하다, 새롭게 하다, 헌신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빛나게 따뜻하게 새롭게 창조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존귀한 뜻에 따라 빛나는 새로운 존재,
따뜻하게 헌신하는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그 때 하나님의 슬픔은 걷히며 하나님의 입가에선 미소가 번져갈 것입니다.
월요일만 되면 회사로 나와 먼저 포이에마로 들어옵니다.
오늘은 어떤 말씀으로 나의 메마른 심령을 체워 주실까 하고 기대하면서 말씀을 듣습니다.
10년이란 세월동안 정말 제가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의 말씀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저의 목사님의 말씀도 깊이가 있으셔서 저의 삶이 많이 변화되었지요.
절망에서 희망으로 옮겨 살았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종교행위에 머무르는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깨닫게 해주시려고 포이에마교회의 신 목사님을 만나게 해 주셨나 봅니다.
이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제부터 자유롭게 사랑을 누리겠습니다.
종교행위의 율법에 따라 살기보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사랑으로 사랑하면서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