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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70305]불량하고 미련한 나발/ 사무엘상 25:25

불량하고 미련한 나발

사무엘상 25:25(설교자: 마경훈 목사 비전교회)

 

사람은 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물 상자 안에 온갖 보물이 있는 것처럼 지혜안에 온갖 복들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미련하게 살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소를 묶고 있는 줄을 잡아당기면 소가 따라오는 것처럼 미련함에는 온갖 저주가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대표적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나발입니다. 그는 불량한 사람이었습니다. 삼상 25장에 보면 나발은 불량한 사람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17절에 보면 나발의 하인들이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나발에 대하여 말하면서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불량했으면 주인의 아내에게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25절에 보면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자기 남편 나발에 대하여 말하면서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발이 불량했던 이유는 그가 미련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25절에 보면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자기 남편 나발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나발은 그의 본명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로 나발이라는 단어는 어리석은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부모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바보라고 짓겠습니까. 나발은 별명일 것입니다. 그런 별명을 얻을 만큼 나발은 미련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5장의 내용을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발은 마온에 살던 큰 부자였습니다. 그에게는 양이 3천 마리, 염소가 7천 마리였습니다. 어느 날 나발이 자기의 양털을 깎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양털을 깎는 날은 잔치하는 날입니다. 마치 농사꾼이 추수를 하는 날과 같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서 도망 다니던 중이었습니다. 양식이 궁핍했던 다윗은 나발이 양털을 깎는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 10명을 보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나발에게 다윗이 자기의 부하들이 먹을 양식을 받기를 원한다고 정중하게 부탁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요구했던 이유는 그동안 나발이 다윗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나발의 하인들이 들판에서 양을 치면 다윗의 부하들이 나발의 양떼를 지켜주었습니다. 그런데 나발은 다윗의 도움을 받아놓고도 다윗이 도움을 요청하니 안면을 바꾸었습니다. 나발은 다윗이 누구냐? 나는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다윗을 조롱까지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화가 났습니다. 다윗은 자기 부하 400명을 데리고 나발을 죽이려고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이 일을 알고 자기 남편 몰래 다윗을 만났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잘 대접하고 지혜로운 말로 설득했습니다. 다윗은 아비가일 때문에 나발에게 보복하려고 했던 뜻을 철회했습니다. 그런데 나발은 아비가일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후에 마음이 낙심되고 몸이 굳어졌습니다. 그리고 10일 정도 지난 후에 죽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나발이 죽은 후에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부자라고 하나님 앞에서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라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나발은 큰 부자였으나 다윗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큰 부자였으나 하나님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미움을 받았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37-38절에 보면 나발이 죽을 때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굳어졌습니다. 그리고 마비상태에서 약 10일 정도 된 후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관해서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고 기록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불량자 나발, 미련한 자 나발을 치셨습니다.

오늘 설교는 나발의 미련함에 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저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감동이 있어서 이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성경에 좋은 내용도 많은데 악한 자의 미련함에 관해서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사람이 거울을 보는 것처럼 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보라는 것입니다. 또 거울을 보고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고치듯이 말씀의 거울 앞에서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라는 뜻입니다.

고전 10:11에 보니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왔지만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 기록했습니다. 왜 그런 부정적인 내용을 성경에 기록했습니까? 그런 일은 본보기입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량하고 미련한 사람 나발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1. 완고하지 말라

3절에 보면 나발은 완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완고한카셰라는 단어인에, ‘목이 곧은이라고 할 때 곧은과 같은 단어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목은 곧은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완고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해하기 싶게 몇 가지 비유를 통해서 완고함을 설명해보겠습니다.

완고함을 이해하려면 기브스한 상태를 연상하면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 기브스를 해보셨나요? 저는 뼈가 튼튼한가 봐요. 저는 평생 한 번도 기브스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기브스를 해본 사람 손 들어보세요. 목에 기브스를 해본 사람 손 들어보세요. 기브스 하면 편한가요? 자유롭나요? 불편하죠. 부자유하죠. 저는 해보지 않았어도 불편하고 부자유하다는 정도는 알 것 같습니다. 목에 기브스를 하면 얼마나 불편할까요? 저는 목에 기브스하고 어떻게 자는지 궁금합니다. 마음이 완고한 사람은 마음에 기브스를 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늘 마음이 불편합니다. 늘 마음이 부자유합니다.

완고함을 이해하려면 근육이 뭉쳐있는 상태를 연상하면 도움이 됩니다. 근육은 강해야 하지만 부드러워야 합니다. 제가 볼 때 제 아내는 근육이 강한데 부드럽지는 않습니다. 늘 뭉쳐있습니다. 전에는 왜 제 아내는 근육이 그렇게 단단하게 뭉쳐있는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뼈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고나니 제가 이해가 되었습니다. 제 아내는 근육이 뭉쳐 있으니까 늘 힘들어합니다.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 등 근육입니다. 등근육은 늘 몽쳐있어요. 그래서 고통스러워합니다. 전에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마음이 완고한 것은 마음이 뭉친 근육처럼 단단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완고해지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이 불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완고한 사람은 인생이 괴로운 것입니다.

완고함을 이해하려면 가죽 잠바가 딱딱해진 상태를 연상하면 도움이 됩니다. 가죽 옷이 딱딱하게 굳었으면 입을 수 있습니까? 입을 수 없어요. 불편해서 못 입어요. 가죽 옷이 딱딱해지면 그건 버려야 합니다. 재생하는 방법이 있다면 재생해서 입을 수 있겠지만 재생의 방법이 없다면 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완고해진 사람은 영적인 대수술을 받아 재생해야 합니다. 재생이 불가능하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습니다.

고집이 센 사람은 완고한 사람입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이 완고한 사람입니다. 절대 남의 말을 듣지 않아요. 17절에 보면 나발의 하인들이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나발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나발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 센 사람이었습니다.

고집이 센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자기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완고하여 고집이 센 사람을 쓰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2:5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사람은 완고한 사람입니다. 자기 고집이 센 사람이 심판을 받습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마음이 완고한 사람은 자기 고집을 피우고 절대로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지막 심판대에서 받게 될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을 쓰십니다. 1:7에서는 하나님의 종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말씀합니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감독의 조건 두 번째가 제 고집대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제 고집대로 하지 않는다는 말은 마음이 부드럽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완고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마음이 부드러웠습니다. 베드로는 마음이 완고하지 않았습니다. 10:28-29을 보겠습니다.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유대인인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한 말입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상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위법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자기의 고정관념과 유대인의 법을 초월해서 이방인인 고넬료를 찾아갔습니다. 보통 유대인들 같았으면 그렇게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베드로를 대표적인 사도로 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을 쓰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람에게 완고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향해서도 완고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부드러워야 합니다. 언제나 열려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거나 사인을 주시면 자기 고집대로 하면 안 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계산하고 따지는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알아지면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순종하는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완고하지 말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2. 은혜를 아는 사람이 돼라.

16절에 보면 다윗이 나발의 하인들이 짐승을 돌볼 때 담이 되어주었습니다. 이 말은 보호자가 되어주었다는 말입니다. 나발은 다윗 때문에 짐승들을 잃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나발에게 도적들로부터 담이 되어주었고, 사나운 짐승들로부터 담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도움을 구하자 나발은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발은 받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37:21에서는 의인과 악인의 차이점을 말씀합니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그동안 나발은 다윗에게 빚을 졌습니다. 다윗은 나발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나발은 다윗이 베푼 은혜를 모른 척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우들과 물질적으로 역기지 않는다는 철칙을 세웠습니다. 이런 철칙을 세운 것은 10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여러 교우들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가 받지 못했습니다. 별 사람 다 있었습니다. 두 사람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예전에 교회 재정을 보는 집사님이 전도한 여자 분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간경화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이분이 제가 사례비를 받는 날만 되면 제 사무실로 찾아와서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고 사정을 했습니다. 제가 사례비를 받는 날을 기가 막히게 알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사례비를 받는 주일이 있는데 그날 받으면 그날 찾아오고 다음 주일에 받으면 다음 주일에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재정을 보는 집사님이 제가 사례비 받는 정보를 주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약 2년을 제 돈을 뺏어갔습니다. 그 집사님이 늘 자기 형편이 좋아지면 반드시 갚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교회도 떠나고 영영 소식도 없습니다.

또 한 사람은 형편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돈을 빌려주면서 이자 없이 형편이 좋아지면 갚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갚으라고 했더니 줘놓고 갚으라고 한다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치고 사라졌습니다. 저는 첫 번째 사람보다 두 번째 사람이 괘심합니다. 사람은 은혜를 받았으면 갚지는 못해도 은혜를 알아야 하는 것인데 그 사람은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은혜를 비롯해서 사람에게 받은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갚아야 하지만 갚을 길이 없는 은혜도 많습니다. 갚을 수 없어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많은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구원이 가장 큰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감사합시다.

어떤 집사님이 천국에 올라갔더니 가는 길에 수없이 많은 계단에 자신의 죄목들이 기록되어있더랍니다. 베드로 사도가 분필을 주면서 자신의 죄를 체크하면서 올라가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집사님이 올라가면서 자신의 죄목에 체크하면서 올라가는데 중간 쯤 갔는데 목사님이 내려오시더랍니다. “목사님, 왜 내려오십니까?”라고 했더니 목사님 말씀이 분필이 다 달아서 한개 더 얻으러 내려갑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의미가 큽니다. 우리는 많은 죄를 범한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분필이 다 달도록 많은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사함 받았습니다. 은혜입니다. 공짜로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갚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도 은혜 갚는 심정으로 감사하며 감당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야 한다.

피영민 목사님은 기독교의 신앙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섭리신앙'이라 말했습니다. 섭리신앙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고, 만유를 통치하신다는 세 가지를 믿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창조, 보존, 통치 이 세 가지가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삼대요소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시고, 하나님은 지금도 만물을 보존하시는 보존자이시며, 하나님은 지금도 인류사를 통치하시는 통치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를 통치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섭리신앙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의 나타나는 현상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려고 해야 하고, 한 사람의 인생 속에서도, 민족과 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세계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보려고 해야 합니다.

나발이 다윗을 무시했던 이유는 현실은 보이고 하나님의 섭리가 보이지 않아서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이스라엘에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지 몰라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해서 도망 다니는 신세였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결국 다윗은 사울 왕에게 잡혀서 죽을 것 같았을 것입니다. 나반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낮추시고 다윗을 세우실 것까지는 생각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발이 다윗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다윗 시대에 다윗의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다윗의 반대편에 섰던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칼을 피해서 도망을 쳤습니다. 다윗이 도망가는 길에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을 따라가면서 계속해서 다윗을 저주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다윗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졌습니다. 그때 아비새가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시므이를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대답했습니다.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그리고 다윗과 일행은 갈 길을 갔습니다. 다윗은 현실만 보고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를 봤던 것입니다.

이 후에 다윗이 압살롬을 이기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사무엘하 19장에 보면 다윗이 귀환할 때 시므이가 급히 다윗을 맞으러 왔습니다. 다윗이 나룻배로 요단강을 건너가니 시므이가 다윗 왕 앞에 엎드렸습니다. 다윗이 넓은 마음으로 그를 용서하였으니 망정이지 다윗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아마도 3족을 멸했을지도 모릅니다.

시므이가 왜 그런 잘못을 저질렀을까요? 하나님의 섭리를 몰라서 그랬던 것입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길 때 그대로 끝나는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과정을 통해서 다윗을 다시 세우실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실만 보는 근시안이 되면 안 됩니다. 현실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현실만 보면 신앙이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봐야 현실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놓고 보세요. 애굽에서 430년으로 이스라엘의 역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광야 40년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후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고 가나안에 들어가 위대한 민족을 이루게 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움직이셨습니다. 또 이스라엘을 제사장 국가로 세워서 그들을 통해서 열방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현실만 봤던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도 광야생활을 할 때도 현실만 봤지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자기들이 큰 나라가 되고 열방 위에 높아지는 것만 생각했지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하셨는가? 왜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세우셨는가? 왜 하나님은 지난 5천년 동안 대한민국이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당하는 중에도 보존해두셨는가?

여러분! 단지 나 하나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 집 하나 부자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을 향한 뜻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마지막 시대까지 대한민국을 존재케 하시는 분명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대한민국을 통해서 온 세계에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통해서 이스라엘까지 회복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대한민국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위하여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부흥시키신 것이고 한국경제를 일으켜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나발처럼 현실만 보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합니다.

에스겔서 1장은 에스겔이 본 세 가지의 환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14절까지는 '네 생물의 환상'이며, 15-21절까지는 '바퀴의 환상'이며, 22-28절까지는 '하늘보좌의 환상'입니다. 네 생물의 얼굴이 넷이고, 그 바퀴가 넷씩입니다. 그러니 바퀴가 16개가 됩니다. 대부분의 성경주석가들은 이 바퀴를 하나님이 인생을 다스리는 섭리라고 말합니다. 3:5에 보면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고 인생을 바퀴로 비유합니다. 보좌 위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사에도 바퀴처럼 관여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잡한 에스겔서 1장의 핵심진리입니다.

섭리의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섭리하시는 것이 바퀴라 한다면 이 바퀴에 나타난 섭리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한 가지만 말씀을 드리면 바퀴는 굴러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다스리시는 원리도 굴러가는 것입니다. 고정되는 것이 없습니다. 굴러갑니다. 때로는 위로 올라가고, 때로는 아래에 내려갑니다. 때로는 위에 있을 때도 있고, 때로는 밑에 깔려있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어려움을 만나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밑에 깔려 있는 사람도 올라갈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면 좋은 일이 일어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교만하지 않습니다. 위에 있는 사람도 아래로 내려갈 때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미련한 나발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3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완고하지 말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십시오. 둘째,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삽시다. 셋째, 현실만 보지 말고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섭리를 보며 삽시다.

출처 :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글쓴이 : 마경훈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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