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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지용수목사/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창 2:4-7)

지용수목사/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창 2:4-7)

 

천지 창조와 모든 만물의 창조, 그리고 사람의 창조에 대한 말씀이 창세기 1장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흙으로 지으신 것에 대해서는 2장에서 다시금 설명하십니다. 그것은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인식시키시기 위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the Loa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on the ground)』(창세기 2:7)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다는 이 말씀에는 깊은 교훈이 있습니다.
개구리는 올챙이 시절을 알아야 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본질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의 본질, 우리의 근원, 우리의 체질은 흙입니다. 흙이라도 흙먼지(dust)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흙도 아닌 흙먼지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는 일을 보십시오. 정말 대단합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자동차를 만들어 타고,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날고, 빌딩을 짓고 큰 도시를 만듭니다. 달과 우주를 정복하려고 연구를 합니다. 그 하는 일이 참으로 대단하고 굉장해서 사람은 다른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원숭이와 사람, 짐승과 사람의 차이는 감히 견줄 수 없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본질은 흙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9절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흙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흙이라 스트레스를 조금만 받아도, 조그마한 병균이 들어와도 휘청거리고 죽습니다. 자동차에 부딪혀도 일그러지고 죽습니다. 그리고 죽어서 흙이 됩니다. 물론 우리의 영혼은 하늘나라에 올라가지만 우리의 육신은 일단 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가 부활할지라도 일단은 흙이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몇 만 명의 사원을 거느린 CEO이고, 몇 억만금을 쌓아놓은 부자이고, 하늘을 찌를 만한 권세가 있다 해도 절대로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흙입니다. 오늘 밤에 집으로 가다가 자동차 사고로 죽을 수 있는, 질그릇같이 연약한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면서 겸허하게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너무 교만한 사람, 거만한 사람을 만나도 열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살다 보면 참으로 희한한 사람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한 8년 전의 일입니다. 자동차를 세워놓고 목욕탕에 갔다 왔더니 제 차 앞에 어떤 차가 더블 파킹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바쁜 사람입니까? 그런데 40분이나 기다린 후에야 차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남의 차 앞에 어찌 이렇게 차를 세웠습니까? 한참 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차 주인이 담배를 꼬나 물고 미안한 기색도 없이 “살다보면 그럴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마음속으로만  ‘잘났다.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말았습니다.
살다보면 별별 사람을 다 만납니다. 
따라 합시다.
“흙덩어리 주제에 …….”
이렇게 생각하고 열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열 받으면 병만 옵니다.
우리는 늘 겸손하게 살고, 희한한 사람을 만나도 ‘세상에! 참 못난 사람도 있구나. 흙덩어리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하고 그냥 웃어넘기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흙이라 흙으로 돌아갑니다. 저희가 어릴 때는 몸에 상처가 생겨 피가 나면 할머니들이 그 상처에 흙을 뿌려 주셨습니다. 그러면 치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흙이라 흙과 친합니다. 그래서 땅을 좋아하여 부동산 투기를 하고, 땅을 서로 차지하려고 전쟁도 하는가 봅니다. 옛날에는 하늘인 남편이 땅인 아내에게 큰소리를 치고 살았는데 요즘에는 땅 값이 비싸서 하늘이 맥을 못 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가 흙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죽으면 우리는 흙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흙으로 지어진 존재는 이 세상에 오래 있지 못합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편 90:10)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시편 103:15~16)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利)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야고보서 4:13~14)
아침에 안개가 가득할 때는 굉장합니다. 비행기도 뜨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안개는 사라집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는, 이렇게 무리를 지어 살아갈 때는 굉장해 보이지만, 그러나 시간의 바람이 불면 우리는 다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찰스 다윈이 해리옷이라는 이름의 거북이 한 마리를 길렀습니다. 그 거북이는 몇 십 년을 길러도, 아무리 오래 길러도 변함없이 거북이입니다. 거북이가 억만 년이 지나면 사람이 되겠습니까? 원숭이가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대로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찰스 다윈은 죽었는데 그 거북이는 며칠 전에 175살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그 거북이를 기르고 있는 호주 동물원에서 생일잔치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지금 30파운드(약 14kg)의 그 거북이가 지금까지 제일 오래 산 동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데,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 30년은 더 살 것이라고 합니다.
거북이는 175살까지 사는데 사람은 그만큼도 못 살고 갑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그 날의 우선순위를 정해서 중요한 일부터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컨설턴트 윈스턴은 말하기를, 특별히 최고경영자(CEO)는 우선순위를 정해서 시간 관리를 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산더미처럼 쌓이는 서류에 파묻혀 죽는다고 했습니다.
저도 어떤 면에서는 CEO입니다. 제 책상에도 언제나 서류가 산더미입니다. 어떤 것 한 가지를 결정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지 모릅니다. 제가 얼마나 고민하고 애쓰는지를 제 아내도 다 모릅니다.
윈스턴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낼 것은 보내고, 처리할 것은 즉시 처리하고, 보관할 것은 보관하고, 가치 없는 것은 금방 버려야 한다.”
시간을 잘 써야 합니다. 하루 24시간을 잘 나누어 살아야 하고, 2분 안에 할 수 있는 것과 5분 안에 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여 처리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CEO들은 점심식간에 식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그 5분 동안에도 무언가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맡은 일을 잘 해 나가지, 밥이 나올 때까지 그냥 무심코 시간을 보내면 뒤처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도 우선순위를 정해서 계획성 있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선순위를 정할 때 예배를 최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저는 시간이 아무리 부족해도 기도 시간과 성경 읽는 시간은 지켰습니다. 논문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논문은 좀 늦게 써도, 논문은 조금 못 써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제 인생을 좌우하지 못합니다. 저를 높이시고 낮추시고 살리시고 죽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먼저 예배하고 기도하고, 하나님 섬기는 일을 삶의 최우선순위로 정해놓고 살 때 하나님께서 손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섬기는 일을 일생 최우선순위로 정해서 먼저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고 가족을 사랑하고, 할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떠날지 모릅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 마음 아픈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군에서 제대하여 집으로 온 지 20일밖에 안 된 한 아들이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가서 체크하니 간암 말기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들이 제대했다고 온 식구가 기뻐서 야단이었는데, 간암 말기라니 어떻겠습니까?
여러분 집의 자녀들은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건강한 자녀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올 때는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이렇게 순서대로 오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아닙니다. 아들이 먼저 갈 수도, 손주가 먼저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날 때가 언제인지 누구도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일생의 계획을 세우되, 오늘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으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섭니다. 어느 판사 앞에 서거나 대통령 앞에 서거나 어떤 사람 앞에 서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섭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산해야 됩니다.
“나는 너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는데, 나는 너에게 성령을 주고 모든 것을 다 주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 했느냐?”라고 물으실 그 때 “아버지, 제가 부족하지만 이것은 했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구의 한 장로님이 꿈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얘야,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
“예. 아들도 잘 키우고 딸도 잘 키우고  예배도 잘 드렸습니다.”
“그것은 평신도도 다 한다. 너는 장로인데 장로로서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
그리고 보니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특별하게 보고 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십일조 드리고, 예배 드리고, 평신도도 다하는 그런 것밖에 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섭섭해 하시는지…….
꿈에서 깨어난 그는 헛된 삶을 살았던 자신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워 한참 울었답니다. 그분이 그 후에 교회를 21개나 지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산 것 주께서 보시고
  훗날에 나를 보고 무어라 하실까」
만일 오늘 밤에 주님 앞에 우리가 서게 되어 주님께서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왔느냐?”하고 물으시면 그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 16절에서 18절에 말씀하십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5장 16절에도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포도나무에 포도가 맺히지 않는다면 어디에 쓰겠습니까? 사과나무를 재목으로 쓰겠습니까? 포도나무 덩굴로 집을 짓겠습니까? 가구를 만들겠습니까? 땔감으로밖에 쓸 수가 없습니다. 과일나무의 가치는 열매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가치는 열매에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예배 열매, 전도 열매, 충성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1장 11절에서 12절에 말씀하십니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할렐루야! 기업은 이익을 기업주에게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익이, 우리의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내가 내 아들딸을 기르지만 내 아들딸이기 전에 하나님의 기업이니 잘 길러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의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도 주의 것입니다.’
이렇게 살 때 아버지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것으로 살고 남편은 아내의 것으로 살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예전에는 ‘아내가 나 몰래 돈을 빼돌리면 어떡할꼬? 혹 날 버리고 가면 어떡할꼬?’라는 생각을 할 때가 가끔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라고 믿고 모든 것을 아내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니 헌금도 아내가 다 합니다. 제 지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저는 모르는데 얼마 정도 있는지 아내는 압니다. 저는 모든 것을 아내에게 맡겼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내도 모든 것을 제게 다 맡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다 맡기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인 줄로 믿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주님의 기업이니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많이 맺어 드려야 합니다.  록펠러나 링컨, 에디슨, 바흐처럼 열매를 많이 맺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흐는 하도 많은 곡들을 작곡해서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의 작품을 계속 손으로 옮겨 적어도 다 옮기지 못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 명작들이, 그 대곡들이 바흐에게서는 거침없이 술술 나왔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바흐에게 그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많이 작곡할 수 있게 하셨습니까? 그는 악보 제일 상단에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적었습니다. 그는 인기나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작곡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사업을 하거나 병원을 경영하거나 약국을 하거나 식당을 하거나 직장생활을 하거나 ‘내가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해 한다.’라는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은 오늘 주님 앞에 가도 어엿이 그 품에 안기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흙으로 지어진 그 사람은 마네킹, 조각품에 불과합니다. 모양은 사람이지만 아무 의식도 없고 호흡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흙덩어리인데, 하나님께서 ‘후~’ 하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혼이 들어가니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생명은 육체에 있지 않습니다. 영혼에 있습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영혼이 떠나가면 그 순간에 끝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허약한 사람도 영혼이 떠나가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영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후~’하고 불어넣으신 생기는 생명의 기운으로 영혼을 의미합니다. 영혼이 들어와 있으니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에서 23절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덜덜 떨며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시며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 주셨습니다.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제자들을 보시며 예수님께서 숨을 ‘후~ ’뿜으시고는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성령은 영혼이 아닙니다.
성령이 들어가야 영생하는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교회를 몇 십 년 다녀도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나중에 교회를 떠날 수가 있습니다. 
리차드 기어라는 미국의 유명한 배우가 크리스천이었는데 불교인이 되었습니다. 왜입니까? 성령을 받지 못하니 교회에 다녀도 만족하지 못하고 절에 가면 무엇이 있을까 하고 간 줄로 믿습니다..
따라 합시다.
“바보다. 바보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목사님의 아들이라도 교회에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영생하는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오늘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보면 마네킹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 교회를 모르는 사람은 흙덩어리보다 더 불쌍합니다. 흙덩어리는 흙으로 끝날 뿐 지옥에는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있는 사람은 죽으면 다 멸망하고 지옥에 가게 됩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다 지옥에 갑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성령은 백억을 주어도 살 수 없고 천억을 주어도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의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은 떠나가지도 않습니다.
한 영화감독은 어머니 때문에 교회에 다녔지만 세상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주일에만 건성으로 교회에 가고 세상에 푹 빠져 사니 기쁨도 구원의 확신도 없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집에 초대를 받아 갔는데 그 집에 들어서는 순간 온 몸이 쭈뼛했습니다. 그런데 한 부인이 나와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지요? 당신이 들어오는 순간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 듭니다.”
알고 보니 그 부인이 무당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그 집에 들어가니 무당이 얻어터지는 것같은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선데이 크리스천이라도 성령이 계시면 예수의 사람인 것입니다.
제 아내도 그런 일을 경험한 적이 있답니다. 신촌의 한 미장원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들어와 “어~ 이 집이 운수 대통했다! 이제 운수 대통했다!”라고 하다가 제 아내를 보더니 파랗게 질려서 바들바들 떨며 생땀을 흘리더랍니다. 그래서 제 아내가 옆에 앉으라고 했더니 “이렇게 안 하면 귀신이 나를 그냥 두지 않아요.”하며 도망을 치더랍니다. 제 아내를 보고 누가 겁을 내겠습니까? 제 아내에게는 저나 겁을 내지, 겁을 낼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점쟁이가 제 아내를 보고 두려워한 것은 제 아내 안에 계신 성령님 때문입니다. 제 아내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 때문에 그 점쟁이가 도망을 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찬양해야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부족해도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계십니다.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예수님을 믿어 성령님을 받아 영생하는 종교는 우리 예수교 하나뿐입니다. 오직 예수! 오직 예수! 예수님밖에 구원이 없습니다. 구속의 피도, 성령도, 구원의 길도 오직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부를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성령 받았음을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부지런히 전도합시다. 우리의 친척, 이웃 중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다 영적으로 마네킹입니다. 그리고 다 지옥에 갑니다. 틀림없이 지옥에 갑니다. 그러니 부지런히 전도해서 그들도 교회에 와서 구원을 받고 성령의 사람이 되고 영생하는 사람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후 ~’하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힘을 얻어서 일어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블레셋 군대 삼천 명을 쳐 죽일 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힘을 주십니다. 기도할 힘을 주십니다. 전도할 힘을 주십니다. 열심히 살 힘을 주십니다.
마귀는 우리에게서 힘을 쑥 뽑아갑니다. 마귀는 삼손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그의 눈이 뽑히게 하고 힘을 못 쓰게 만들었습니다. 마귀는 전도할 힘, 예배할 힘, 기도할 힘을 다 뽑아갑니다. 열심히 살고 싶은 힘도 뽑아가서 자살하게도 만듭니다.
이사야 40장 28절에서 31절에 말씀하십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10장에 보면, 힘이 쑥 빠져 말할 기운도 없는 다니엘에게 인자 같은 분이 오셔서  “은총을 크게 받은 자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라고 말씀하시니 다니엘은 힘이 솟아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강건하라. 강건하라.”라고 말씀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힘이 솟아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힘이 납니다. 어린아이는 아빠가 있으면 힘이 납니다. 아빠가 없으면 강아지도 두렵고 큰 아이도 두렵지만 아빠가 함께 있으면 힘이 나고 두렵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옆에 계셔서 힘이 되시고 도와주실 뿐 아니라 친히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강한 힘을 주십니다. 

2차 대전 때 영국의 무하마임 장군이 사방으로 포위를 당했습니다. 사방에서 적이 공격해 오니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모든 군사들이 두려워서 떠는데 장군이 말했습니다.
“자! 우리가 전쟁하면서 사방을 동시에 공격할 기회는 오늘뿐이다. 한 번 힘을 다해 적들을 쳐서 쓰러뜨리자.”
그러자 군사들이 힘을 내어 나가서 싸워 이겼답니다. 죽게 된 지경에서도 힘을 얻으면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사업이 밑바닥에 있고 가정이 밑바닥에 있고 모든 것이 밑바닥에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힘을 주시니 우리는 일어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는 하늘의 능력을 공급하고 재충전해 주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사는 사람은 자살할 수 없습니다. 망할 수 없습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뚝이는 아무리 내동댕이쳐도 오뚝 서듯이, 우리는 아무리 휘청거려도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니 다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흙이지만 우리 안에, 이 질그릇 안에 보배이신 우리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치는 한이 없습니다. 우리만 있으면 흙덩어리지만 우리 안에 주님께서 계십니다. 질그릇은 별 것이 아니지만 그 안에 금덩어리가 있으면 얼마나 귀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의 성령께서 계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모신 귀한 질그릇임을 기억하고 언제나 귀하게 품위를 지키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천당으로 이사갈 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귀한 모습을 지니고 살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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