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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손세용목사

‘유월은 모든 가능성을 배태하는 달이다’

유월은 모든 가능성을 배태하는 달이다
J . 스타인벡의 말이다 .‘유월 장마에는 돌도 큰다는 우리의 속담도 있다. 여러해 전 장마철, 남해 고속도로의 아스팔트 바닥을 뚫고 죽순(竹筍)이 솟아올랐다는 보도에, 사람들은 현대 문명을 거역하는 생명력에 새삼 경탄을 했었다. 식물이 성장하면서 서서히 힘을 작동시키면 아스팔트가 아니라 바위라도 뚫을 수 있는 무서운 생명력은 공학적(工學{)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는 여름 장마철은 남자라도 임신시킬 것만 같은 생명의 계절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런데 이런 장마의 계절이 되면, 그 고온 다습함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지구 온난화 현상 때문인지, 봄은 잠깐 시늉만 내고는 이내 물러가고 작렬하는 뙤약볕은 시련처럼 다가온다.
 
이런여름하면 늘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글이 생각난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서 칼잠을 자야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 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별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더욱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그 사람의 선악간의 행위와 무관하게 오직 그 사람이 지닌 37도의 체온 때문에 그를 혐원시(嫌怨視) 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요, 비극이다. 내 자신에게도 그의 것만큼의 똑같은 체온이 있는데도 말이다.
 
까뮈가 쓴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한 아랍인을 아무 이유 없이 권총으로 쏴죽이면서도 그 이유를 묻자 그 강렬히 내리쬐는 햇볕 때문이라고 핑계를 댔다던가? 가만히 보면 사람들은 이유도 아닌 이유로 서로를 미워하고 갈등하면서 경원시(敬遠視) 하는 일들이 참 많다. 국적이나 피부색은 말할 것도 없고, 출신 학교나 지역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사람들을 매도(罵倒)하기 조차한다. 저와 나는 서로 다를 뿐, 누가 옳고 누가 틀린 것이 아닌데 말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고 하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도 사소한 일들로 인하여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들 또한 적지 않다. 내려놓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시답지 않은 일로 인하여 원수처럼 서로 다투고 싸우며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입히다가, 이로 인해 심지어는 신앙의 공동체를 떠나기까지 한다. 참으로 어리석고 불행한 일이다. 이런 일들로 인하여 그 영혼이 영영 실족하여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그 책임은 과연 누가 어떻게 져야 할까? 예수님은 이런 일에 엄히 경계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18:6-7).
그런데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자기가 상처를 받는 일에 대해서는 예민하고, 오래도록 기억하지만,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일에 대해서는 둔감하거나 쉽게 잊어버린다는 사실이다.
 
채주(債主)의 기억력이 채무자(債務者)의 기억 보다 좋다는 속담처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거나 쉽게 잊어버리는데, 상처를 입은 사람은 그 상처로 인하여 두고두고 기억하며 괴로 워 한 다 . 그리고는 모든 이들에 대해 의심과 경계심을 가지고 누구에게도 다가서지 않으려고, 경계의 촉각을 한껏 치켜세운 채, 스스로를 고독의 담장 안에 가두어놓고는, 홀로 외로움과 서러움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고슴도치의 사랑]이라는 동화를 들어보자. “추운 겨울의 어느 날, 고슴도치 두 마리가 조그만 굴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둘은 처음에 서로를 경계하다가 추위 때문에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따뜻한 곳으로 움직이다 보니 서로의 체온 때문에 가까워 진 거죠. 날씨는 점점 더 추워지고 얼마 후에 둘은 바로 옆에까지 가게 됩니다. 하지만 서로의 가시 때문에 너무 가까우면 찔리고 떨어지면 춥고 다시 가시에 찔리고... 그러기를 수십 차례 반복하다가 결국은 가시에 찔리지 않으면서 서로에게 최대로 가까울 수 있는 거리를 발견했답니다. 그 거리가 우리가 지켜야할 거리입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가시에 너무 많이 찔린 사람들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리게 되기도 하지요. 적당한 거리는 항상 필요하지만 조금만 자신의 가시를 잘라낸다면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워질 수 있지 않을까요?
고온 다습해져 가는 이 계절에 우리의 불쾌지수까지 함께 상승시켜, 살아있는 생명 현상인 체열(體熱)까지도 서로에게 부담과 기피의 이유가 된다면, 세상살이는 참 피곤한 일이다. 우리는 신체적 청결까지도 유의하여 다른 이들에게 불쾌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밝은 미소와 친절한 자세로 모든 이에게 신선한 매력을 나눌 수 있어야 하겠다. 더더욱 그리스도인들이 자칫 독선이나 편견, 위선과 가식 등의 어글리크리스천 (Ugly Christian)’의 모습으로 왜곡되지 않도록, 성령 충만한 삶을 통하여 기쁨과 감사와 소망의 향내를 발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2:15) 무성하게 우거진 넝쿨장미가 예배당 울타리에서 흐드러져 그 진한 사랑의 향내를 토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