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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삶(8) 요15:7,14-15 2014.2.23(일)

제자의 삶(8) 15:7,14-15 2014.2.23()

 

제자의 기도, 응답하라

2월도 마지막 주일입니다. 다음 주부터는 3월이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봄을 좋아합니까? 사람들이 역시 가장 좋아하는 달은 3월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 한 교회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얼음이 녹으면 어떻게 되죠?” 많은 어린이가 소리쳤습니다. “물이 돼요”. 그때 한 어린이가 뒤에서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선생님, 얼음이 녹으면 봄이 와요”. 모두가 뒤를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어린이가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고 했는 데 그 어린이만 얼음이 녹으면 봄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얼음이 녹으면 봄이 됩니다. 긴 겨울, 두꺼운 얼음이 녹아야 봄이 옵니다. 우리 인생도,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인생의 봄도 신앙의 봄도 긴 겨울, 두꺼운 얼음이 녹아야 옵니다. 기도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겨울로 비유하면 긴 겨울, 소원과 갈망의 계절을 지나야 아름다운 응답의 봄이 옵니다. 그리고 응답의 봄이 와야 열매맺는 가을이 옵니다.

 

여러분도 열매맺기 위해서는 기도의 응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얼마전 어떤 T.V에서 응답하라 1994”라는 프로그램이 방송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1994년 즈음에 있었던 노래를 회고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1990년대의 추억에 젖게 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단번에 많은 시청율을 끌어 올리면서 우리 사회에 응답하라열풍을 가져 왔습니다. 아마도 답답한 사회 현실속에서 응답하라는 외침이 사람들에게 많은 공감대를 형성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응답하라”, 응답하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저는 사람들 속에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한 열망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소원이 다르지만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동일합니다. 뭔가 답답한 현실, 잘 풀리지 않고 막혀 있는 현실을 사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응답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그들이 다른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막연히 응답을 기다리지만 우리는 기도를 통해 응답을 기다립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응답을 주는 줄 알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응답을 주시는 줄 압니다. 사람들은 응답을 기다리다 안 오면 포기하지만 우리는 응답이 올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간절히 응답을 기다립니까? 여러분도 응답받을만큼 간절히 기도합니까? 과연 응답은 어떻게 옵니까? 응답받는 기도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응답받기 위해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요청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우리는 보통 응답을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통 응답받았습니까?” 하고 물으면 그 말은 당신이 기도한 그 제목을 하나님이 들어주셨습니까?”하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을 응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응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응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요청할 때 우리가 응답하는 응답입니다.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 여러분이 처음 기도를 시작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기도하게 하셔서 기도를 시작했다고 생각합니까? 언뜻 보면 우리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입을 열어 주여, 하나님하는 순간이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할수록 발견하는 것은 내가 기도를 시작하는 순간은 내가 입을 열어 하나님, 주님하고 부르는 순간이 아니라 내 안에서 하나님이 기도해라하고 감동을 주실 때 그래, 기도해야지하고 순종하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1월에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재작년에 결혼한 아들이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아들을 낳기 전에 아기 엄마, 할머니가 한 일이 있습니다. 배냇 저고리, 베개, 이불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아직 아이가 태어나지도 않았는 데 목욕통, 분유, 유모차, 심지어 그네까지 준비했습니다. 아직 아들이 태어날지 딸이 태어날지도 모르는 데 이것 저것 준비합니다. “맘마기저귀도 준비합니다. 얼마후에 애기 엄마가 아들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애기 아빠가 로버트, 자동차, 총까지 샀습니다. 그 이유는 아기 아빠도 어릴 때 로버트, 장남감, 자동차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아빠가 부순 로버트만도 한 트럭은 될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난다고 하니까 삼촌들이 나서서 무엇을 삽니다. 작은 삼촌은 아기 침대를 샀습니다. 아기를 어른 침대에 누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산모에게 맞는 예쁘고 작은 침대에 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온갖 것을 다 갖고 있었습니다. 당장 쓸 일이 없었지만 언제라도 쓸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면서 기도를 떠올렸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도를 아기쪽에서 엄마에게 달라는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아기가 열심히 조르면 엄마가 줍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잘 조르는 것이 좋은 기도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다른 편이 있습니다. 하나님 편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기도는 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한 발 앞서서 준비랍니다. 하나님은 응답할때마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기 전부터 일하십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요청하면 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기가 맘마줘하고 맘마주고, “밥줘하면 밥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오줌싸면 기저귀 갈아줍니다. 언제나 초조한 쪽은 하나님입니다. 모든 것을 다 준비했는 데 달라고 안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고마워 합니다. 성경 이사야 65:24 말씀이 이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의 말이 마치기 전에 내가 들으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이 마음을 아십니까?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심히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기도를 시킵니다. 우리가 먼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도시킬 때 우리가 할 일은 순종하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16절 앞 부분을 보십니까?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선택에 관한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이 우선순위는 선택에서 뿐 아니라 기도에 있어서도 해당됩니다. 우리는 절대 스스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도하게 하시니까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하게 합니까?

 

(1) 환경을 통하여 기도하게 합니다. 모든 환경은 하나님의 섭리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시키는 첫 번째는 환경입니다. 모세를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이나 애굽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바로가 엄청나게 학대했습니다. 그때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사람들이 그때부터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3:7-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여러분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생했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기 전에는 하나님이 아무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그 백성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려가서 건지신 것을 아십니까? 고통의 환경은 기도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부름입니다. 하나님은 환경을 예비하고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요청합니다. 한나가 아기를 못 낳았습니다. 한나가 기도하자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사무엘 안 태어났습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 한 마리 못 잡았습니다. 베드로가 간절히 원하자 두 배에 가득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욥이 기도하자 하나님이 회복하게 했습니다. 환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는 간접적 신호입니다. 하나님이 환경을 통해 기도를 요청할 때 우리가 할 것은 응답입니다.

 

(2) 음성을 통해 기도하게 합니다. 환경을 통해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이제 말로서 직접 기도를 요청합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고 했습니다. 이때 먼저 아브라람을 방문하여 기도하게 합니다. 의인 10명만 있으면 살려달라고 기도하게 합니다. 결국 의인 10명이 없어서 소돔이 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 군대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나타나 말씀했습니다. “큰 용사여, 일어나라”. 기드온이 일어나 전쟁에 나서자 미디안이 물러갔습니다.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환상중에 마케도니야의 사람으로 나타난 우리를 도우라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떠나자 오늘날 유럽이 복음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기도하게 합니다. 베드로야 기도해라. 고넬료야 기도해라. 세 제자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갔습니다. “너희가 한시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하나님이 기도를 시킵니다. 그때 우리가 할 일은 순종하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3) 말씀을 통해 기도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는 또 하나의 방법이 말씀입니다. 느헤미아 시대 에스라가 수문앞 광장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울며 회개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907,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하디 목사님이 설교했습니다. 성령이 임하고 사람들이 회개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30만이 예수믿고 한국교회가 부흥했습니다. 그래서 이 표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 간접적으로 기도하게 합니다. 초자연적인 음성이나 환상을 통해 기도하게 합니다. 말씀과 설교를 통해 기도하게 합니다. 이 때 우리가 할 일은 응답하는 것입니다.

환경

하나님 초청 음성, 환상 -- 기도(우리의 응답) -- 응답(하나님의 응답)

말씀

 

하나님이 기도 요청할 때 우리가 응답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응답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유진 피터슨이 응답하는 기도에서 말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말을 거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말을 거시는 이유는 우리의 대답을 듣기 위해서이다. 우리 스스로 하는 기도는 없다.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거실 때 우리가 응답하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할 때 하나님도 우리에게 응답하신다”(응답하는 기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응답합니다

그런데 기도 응답에 대하여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모든 기도에 다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7절 보실까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며 이루리라”. 다같이 그리하면 이루리라”. 16절 뒷 부분도 있습니다. 15:16, “내 이름으로 아버지꼐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다같이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 자신의 말씀입니다. 모든 기도는 다 응답됩니다. 우리가 볼 때 기도 응답은 몇 사람만 받는 것 같습니다. “아니, 무슨 소리입니까? 내가 그렇게 오래 기도했어도 기도 응답 못받은 것이 태반인데 무슨 응답을 다 받았다는 것입니까?” 따질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 말을 끝까지 잘 들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를 다 응답하신다. 그러나 자신의 방식으로 응답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방식대로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혼동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도한대로 되어야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생각대로 되어야 좋은 것이 아니며 우리 뜻대로 되어야 가장 좋은 응답도 아닙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저희 아들이 열 번째 생일을 이스라엘에서 맞이했습니다. 생일을 앞두자 아들이 저에게 자전거를 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스라엘 공원에서 아이들이 자전거 타는 것을 보고 자기도 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웬지 자전거를 사주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우선 비싸고 둘째로는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공부하고 일하러 다녀서 방과후에 잘 돌보지도 못하는 데 자전거 타고 다니다가 사고나면 큰 일입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중고가게에서 가서 워드 프로세서를 하나 샀습니다. 당시 컴퓨터가 있긴 있었지만 그렇게 많이 쓰지 않을 때 아들에게 한글과 영어 워드프로세서를 사주면 공부도 하고 글도 쓰고 좋을 것 같았습니다. 생일날 제가 워드 프로세서를 들고 오자 아들은 실망이 가득한 눈초리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자기는 자전거 갖고 싶은 데 아빠는 자기에게 아무 필요가 없는 워드를 사주니 실망이 컷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동안 워드를 내 팽개쳐 놓고 만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옆집 이스라엘 아이가 자전거 타다가 머리를 다쳤습니다. 헬멧을 잘 안쓰고 다닐 때라 머리가 많이 다쳐 병원에 가야 했습니다. 그때부터 아들이 자전거는 잊고 워드를 만지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때 느낌이나 일기, 감상을 영어로, 한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먼 훗날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가 그때 워드를 사줘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지금 기자가 된 기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일날 자전거를 사주지 않아 실망했지만 워드가 훗날 더 유익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원했던 자전거를 사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요청은 응답받지 못했지만 아빠가 더 좋은 것을 사주어 결과적으로 그는 좋은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성경의 사람들도 자신들의 소원을 다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죽기 전 기도했습니다. “나를 광야에서 죽지 말게 하옵시고 요단강을 건너게 하옵소서”. 결과적으로 모세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느보산에서 죽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죽지 않기를 일주일이나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승리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아이성전투에서 처절하게 패배했습니다. 예언자 하박국, 에레미아는 이스라엘을 바벨론에서 구원해주고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파괴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소원대로 되지 않아 응답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소원대로 되어 결국 좋은 응답을 받습니다. 모세는 가나안땅에 못들어 갔기 때문에 평생 존경받는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부정으로 낳은 아들이 죽어 새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이성에 져서 이스라엘의 죄를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결과적으로 더 나은 민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뿐 응답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뿐 응답의 때와 방법과 내용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우리 생각대로 결정되면 큰 일 날뻔 했습니다. 아들이 자전거 받았으면 사고가 날 수도 있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죽지 않고 가나안땅에 들어갔다면 가나안 종신대통령이 되고 평생 독재자가 될 뻔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아이성에서 실패하지 않았으면 여리고에서 물건을 훔친 아간의 죄를 씻을 길을 없었습니다. 우리 생각대로 되는 것이 기도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기도 응답입니다.

 

파커라는 유명한 학자가 기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응답되지 않은 기도란 없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방법으로 가장 좋은 때에 응답하실 권리를 갖고 계신다. 하나님은 자주 우리가 실제로 드린 기도보다는 우리가 드렸어야 하는 기도에 응답하신다”. 커는 우리가 드린 기도가 있고 드렸어야 하는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드린 기도대로 응답받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들렸어야 하는 그 기도를 응답하실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면 가장 좋은 것을, 그나마 가장 좋은 때에 응답할 권리와 능력이 있습니다. 믿습니까?

 

영국의 C. S. 루이스도 우리가 묵상할만한 말을 했습니다. “C. S. 루이스, “기도의 핵심은 응답될 수도 있고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기도할 뿐 기도의 결과를 강제할 수도 없고 강제해서도 안된다. 우리의 어리석은 요청을 듣고 필요에 따라 허락하기고 하고 거절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에게는 그럴만한 자유와 권한이 있다. 언제나 내가 원하는 대로 응답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대로 응답받는 것이 가장 좋은 응답이다”. 아멘. 그래서 모든 기도는 응답됩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 응답되면 그것도 응답입니다. 내가 원하는대로 응답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원대로 될 것이니 그것도 응답입니다. 지금 응답되는 것도 응답이지만 아직 응답되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때에 주실 것이니 그것도 응답입니다. 그래서 요일5:14-15절이 중요합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하나님이 다 들으신다. 그런데 그의 뜻대로 들으신다. 이것이 기도 응답입니다.

 

최고의 응답은 예수님안에 거하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기억할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응답은 예수님안에 거하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7절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여기에 기도에 대한 진수가 있습니다. 먼저 이 말씀은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준다고 약속합니다.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습니까? 그런데 이 약속은 조건을 가집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안에 거하면”. 거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러니까 구하라거하라가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가 거하라입니다. 거하는 것은 두 번 나오고 구하는 것은 한 번 나옵니다. 순서상 거하는 것이 먼저고 구하는 것이 다음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많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를 우리 소원을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으면서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불러 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많아서 우리가 필요할 때만 불러도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충분하고도 아름다운 관계는 아닙니다. 옆 집 사람이 평소에 아무 관계가 없다가 아기가 아프다고 갑자기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충분하고 좋은 관계는 아닙니다. 그래서 기도는 거래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평소에 친하게 지내고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이 거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약 100여전에 미국에 토레이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무디를 도와 세계적인 부흥운동에 헌신했고 강원도에 예수원을 설립한 토레이 목사님은 그의 손자입니다. 어느날 그에게 한 성도가 찾아와서 상담을 요청했답니다. “무엇때문에 상담하기를 원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자기가 지금 큰 고민에 빠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고민에 빠져 있느냐고 물었더니 하나님이 자기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응답 안하는 것이 무슨 고민이냐고 했더니 그러면 하나님이 거짓말하시는 거잖아요? 성경에 너희가 무엇이나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했잖아요? 너희가 무엇이든지 믿고 기도하면 내가 들어주리라 했잖아요? 그런데 안 들어주면 거짓말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거짓말 하는 분이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기도하면 안 들어주시니 결국 하나님이 거짓말하시는 것이고 그것을 내가 받아들여야 하니 제가 어찌 고민이 안 되겠어요?” 했습니다.

 

토레이 목사님이 듣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이 누구든 기도하면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항상 조건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3:22을 펴 보시겠습니까?” 그랬더니 거기에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토레이가 말했습니다. “무엇이든 구하는 것을 받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그것을 지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과의 평소의 관계입니다. 요일5:14절도 보시겠습니까?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보십시오. “그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의 뜻과는 상관없이 살면서 자기 뜻을 이루어 달라고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겠어요? 결국 중요한 것은 기도가 아니라 기도적 관계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기도에서 기도하는 삶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삶에서 기도가 나옵니다. 그런데 성도님은 평소에는 기도하는 삶을 살지 않고 가끔 기도만 하니 그 기도를 다 들어줄 수 있나요? 어떻습니까? 썩은 상자에 사과를 담겠습니까? 녹슨 파이프를 수도로 쓰겠습니까? 하나님의 응답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성도님의 삶이죠그때 그 분이 감사합니다. 이제야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하더랍니다. 이것이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5장에서 예수님이 우리 친구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나마 세 번이나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왜 기도를 말하면서 예수님이 친구라는 점을 강조해서 말씀할까요? 관계입니다. 도움을 청하기 전에 친구가 되라는 말이 있잖아요? 예수님과 평소에 친구처럼 친밀하게 지내면 어려움이 생길 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친구는 필요할 때만 만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시도 때도 없이 만나 2시간, 3시간, 온갖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하지 않아요? 이것이 거하는 것입니다.

 

오래전 한 교인이 저에게 왔습니다. 그 분도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재가 기도할 때 응답을 안합니까? 기도해도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고 요즘 죽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언제 기도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새벽에 기도한다고 합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왜 새벽기도하는 성도에게 응답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가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한참 후에 이런 감동을 받았습니다. “왜 너는 나를 네 시간에만 찾느냐? 왜 너는 나를 네가 기도하는 새벽 530분에서 630분까지로 한정하느냐? 그렇다면 나머지 23시간은 너는 어디 있었느냐? 너는 네가 기도하는 한 시간동안만 나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네가 기도하지 않은 23시간도 함께 있는 줄을 모르느냐? 문제는 네가 기도하는 1시간만 너는 나를 기억하고 나머지 23시간은 나를 잊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네가 기도하는 시간에 내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머지 23시간동안 네가 내게 없는 것이 문제다. 나의 부재가 네게 문제가 아니라 너희 부재가 내게 문제다”.

 

그때 제가 받은 은혜는 아, 우리가 기도하는 시간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는 시간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구나. 그래서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안에서 24시간 거하는 은혜가 중요합니다. 어떤 기도에 한 두 번 응답하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모든 관계가 아니라 하루 24시간, 일년 365, 예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이 최고의 응답입니다. 그래서 다시 요15:7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아멘. 제자의 삶은 기도하는 삶입니다. 기도는 영적 영양분, 우리의 뿌리에 생수를 공급하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우리가 열매맺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환경을 통해 음성이나 말씀을 통해 기도하라 하시면 우리는 순종하고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의 명령에 응답할 때 하나님도 우리의 기도에 응답합니다. 모든 기도는 다 응답됩니다. 다만 하나님의 방식대로 응답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려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안에 거하십시다. 그것이 24시간 기도하는 것입니다. 봄을 맞는 이때 기도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제자의 삶(8) 15:7,14-15 2014.2.23()

 

제자의 기도, 응답하라

 

기도는 하나님의 요청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65: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의 말이 마치기 전에 내가 들으리라”.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1) 환경을 통하여

3:7-8“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2) 음성을 통하여

 

(3) 말씀을 통하여

환경

하나님 초청 음성, 환상 -- 기도(우리의 응답) -- 응답(하나님의 응답)

말씀

 

유진 피터슨, “성경의 하나님은 말을 거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말을 거시는 이유는 우리의 대답을 듣기 위해서이다. 우리 스스로 하는 기도는 없다.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거실 때 우리가 응답하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할 때 하나님도 우리에게 응답하신다”(응답하는 기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응답합니다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며 이루리라”.

15:16, “내 이름으로 아버지꼐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제임스 파커, “하나님의 자녀에게 응답되지 않은 기도란 없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방법으로 가장 좋은 때에 응답하실 권리를 갖고 계신다. 하나님은 자주 우리가 실제로 드린 기도보다는 우리가 드렸어야 하는 기도에 응답하신다”.

 

C. S. 루이스, “기도의 핵심은 응답될 수도 있고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기도할 뿐 기도의 결과를 강제할 수도 없고 강제해서도 안된다. 우리의 어리석은 요청을 듣고 필요에 따라 허락하기고 하고 거절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에게는 그럴만한 자유와 권한이 있다. 언제나 내가 원하는 대로 응답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대로 응답받는 것이 가장 좋은 응답이다”.

 

요일5:14-15,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최고의 응답은 예수님안에 거하는 은혜입니다.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일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