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당시 정운찬(鄭雲燦) 국무총리 후보자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마친 뒤 소견을 밝혔습니다. “새벽에 인사청문회를 마치고 3시 넘어 귀가하니 아내와 아들, 딸이 눈물을 흘리며 맞아들였습니다. 자녀들이‘왜 세금신고를 제대로 못했어요. 아버지가 추궁당하는 걸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라며 펑펑 울더라고 털어놓았습니다. 아내도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더 열심히 의지하며 살았어야 하지 않느냐’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가족에게 ‘우리 모두 지금부터 더 철저하게 자기 주변을 관리하며 살자'라며 달랬습니다. 아들과 딸은‘아버지의 청문회를 보면서 느낀 게 많았어요. 바르게 살겠다는 마음가짐만으론 충분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성찰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앞으로 나의 남은 인생이 10년이 될지, 20년이 될지 모르지만 청문회를 계기로 거듭나겠다는 각오를 했습니다. 비록 청문회에서 고생은 했지만 배운 게 많았습니다. 나와 가족에겐 청문회의 책망이 하나의 축복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책망을 듣고 기분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기분이 상하고 책망 내용에 대해 수긍하기보다 기분나빠하는 것이 먼저 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때로는 심한 책망을 받을 경우 책망한 사람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까지 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 잠언 9장 8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증거합니다.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거만한 사람은 책망한 사람을 미워하고 그 꾸지람을 듣지 않는데 지혜로운 사람은 그 훈계를 들을 뿐 아니라 책망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훈계와 책망을 잘 듣고 고칠 경우 책망을 받은 사람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의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해 주는 충고와 책망과 꾸지람을 마치 자기가 자신에게 하는 것 같은 인내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종은 복됩니다. 변명하는 데 빠르지 않고 본인이 범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수치와 책망을 겸손히 참아 견디는 종은 복됩니다.”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인하여 잘못된 길을 걸어갈 때 우리를 바로 징계하지 않습니다. 책망하시고 권고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고와 책망을 듣는 것이 가장 복된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신랄한 공격을 가하셨습니다. 6번이나 ‘화 있을진저’하시며 가혹한 책망을 하셨습니다. 왜 예수께서 6번씩이나 책망하시며 저주의 말씀을 하셨습니까? 바리새인들의 신앙생활 때문이었습니다. 그럴듯한 신학, 엄격한 도덕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이 회칠한 무덤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속마음은 썩은 것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전승된 관습을 기탄없이 받아들이면서도 아브라함이 가졌던 순수한 신앙이나 정신은 없습니다.‘바리새’ 라는 말은 헬라어 ‘파라사이오’에서 온 말인데 ‘분리하다’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엄격히 구별했습니다. 거룩한 영역에서 자신을 다스리며 행동전반에 이르기까지 거룩한 것을 구별하게 되어 배타적이며 비판적이고 교만하고 옹졸한 자가 되었습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단순히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책망하시기 위해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책망을 스스로에게 물어보며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지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어떠한 모습을 책망하셨습니까? 첫째로 악독이 가득하니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선교사가 가난한 집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에게 2실링 6펜스만 있었습니다. 찾아간 집에는 갓난아이를 안은 어머니가 아파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내가 가진 돈이 3실링 6펜스라면 여인에게 1실링을 기쁘게 줄 텐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기 엄마에게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늘에는 자비롭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가 계십니다”라고 위로했습니다. 그때 마음속에서‘이 위선자! 사람들에게 사랑 많으신 하나님 운운하면서 네 주머니에 돈을 움켜쥐고 있다니!”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은 테일러는 아기 엄마에게 갖고 있던 돈 전부를 주었습니다. 걸어 나오는 그의 발걸음은 빈주머니만큼이나 가벼웠습니다. 다음날 아침 굶을 수밖에 없는 그에게 10실링짜리 금화 하나가 우편으로 우송돼 왔습니다. 악독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본문 39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여기의 ‘악독’은 '악한 자'를 뜻하는 ‘포네로스’에서 온 단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순결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중심은 욕심이 많고 악한 자인 것을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겉뿐만 아니라 속도 창조하셨으며 겉뿐만 아니라 속도 정결케 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면서 밖으로 볼 때는 거룩한 무리처럼 살지만 우리의 속을 들여다보면 회칠한 무덤보다 나은 것이 있습니까? 속에는 악독한 것과 추잡한 생각, 위선, 교만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겉만 꾸미는 자는 아닙니까? 속이 더러우면 겉을 아무리 치장한다 해도 결코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겉만 깨끗하게 포장하면 속의 악독이 감추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버리고 속사람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지고 새로워지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사랑은 버렸으니 어느 신혼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출근하면, 집에 홀로 있어야 하는 아내에게 미안해 작은 메모지에 "사랑합니다"라고 쓰고 그 쪽지를 이곳저곳에 숨겨놓았습니다. 아내가 옷을 입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이상한 것이 잡힙니다. "사랑해요" 아내는 놀랍고 행복했습니다. 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면 거기에도 "사랑합니다"라는 쪽지가 있었습니다. 밥을 먹기 위해 냄비 뚜껑을 열어도, 화장품 뚜껑에도, 심지어 신발 속과 화장실 휴지에도 "당신을 정말 사랑합니다" 라는 글이 적혀있는 것이었습니다. 집안 어느 한 구석에도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마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아내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너무나 감동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세월이 흐르니까 밥하려 할 때마다, 옷을 입을 때마다, 화장품 뚜껑을 열 때마다 뻔한 단어 "사랑해요"가 쓰여 진 종이는 더 이상 감동이 아니었고 늘어나는 쓰레기에 불과했습니다. 남편의 사랑이 따르지 않는 가식적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42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십일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종류대로 드렸습니다. 그로인해 율법의 완전한 준수자라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물론 신앙의 외적인 표현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표현은 그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정신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십일조는 드리지만 정작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저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복을 받기 위해서 십일조는 드리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계명의 근본정신을 등한히 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교회는 분열되고 가정은 불화를 거듭하는 일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속으로는 독사의 독을 품고 있으면서 밖으로는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척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외식하는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마음과 정성이 없는 예배와 헌물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형식에만 치우치는 종교 행위는 오히려 하나님께 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모든 행위는 가증한 것이요, 위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책망을 들으면서 사랑으로 모든 것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문안만 기뻐하니 독일의 정치가 비스마르크(Otto E. L.von Bismarck)가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내가 오늘 한 일에 대하여 내일 다른 사람들의 여론을 들어보면 태반이 잘못되었다. 그러니 남의 칭찬을 받는다고 하여 기뻐하지 말고 남의 비난을 받았다고 하여 실망하지도 말아라. 본디 인간은 이러나저러나 간에 잘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또 후세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사람도 있으나 지극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도 내 마음을 알아주기 어려운데 어찌 백 년이나 천 년 후의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아줄 것인가. 그러므로 너는 다만 하나님만이 네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고 믿고 세상의 칭찬에 관심을 두지 말아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칭찬 받도록 힘써라”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칭찬이야말로 진정한 칭찬이며, 최상의 칭찬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43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이러한 행위는 모두 사람들로부터 높임 받고 존경 받을 만한 것이 자기에게 있음을 과시하는 것으로서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습관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의 특권의식은 우월의식으로 변했고, 어떤 자리에서도 우월의식에 합당한 처우를 당연시 했고, 스스로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행동은 교만에서 온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기도할 때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네거리에서 큰 소리로 길게 기도했습니다. 구제할 때도 나팔을 불면서 구제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옷 술을 길게 달았습니다. 상석에 앉기를 좋아했고, 사람들이 찾아와 문안해 주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무덤을 평토장했습니다. 봉을 세우지 않고 다른 땅과 같은 높이로 묻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덤인 줄 모르고 밟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평토장한 무덤임을 알리는 나무나 돌을 세우고 거기에 일 년에 한 번씩 회를 칠했습니다. 그러나 회가 벗겨지고 세워놓은 돌이 넘어지면 무덤을 분간 할 수 없게 됩니다. 밟을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문제는 무덤인 줄 모르고 밟으면 7일간 부정하게 되어 예배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평토장한 무덤과 같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평토장한 무덤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드는 장본인이라는 것입니다. 내면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데도 겉으로 볼 때 경건해 보이고, 신앙이 좋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들의 칭찬 받는 일에 만족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위선이 습관화된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뿐 아니라 백성들까지도 그 위선과 부패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무지함이 오히려 위선과 외식자체보다도 더 위험한 것이기에 책망한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신앙생활의 타성과 습관화로 인해 가까이 오는 사람들을 모두 썩게 하는 존재인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롭게 믿으려는 초신자들에게 본이 되고 있습니까? 그들로 하여금 무덤에 빠지게 하는 평토장한 무덤 같은 존재는 아닙니까? 나의 신앙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면 바리새인이며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입니다. 죽은 것에 회칠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예수의 책망을 기억하고 신앙의 형식만 있고, 그 내용과 열매가 없는 빈껍데기와 같은 신앙생활을 청산하시기 바랍니다. 공자(孔子)가 제자들과 길을 가는데 길옆에서 한 사람이 소변을 보고 있었습니다. 공자는 그를 불러 크게 호통을 쳤습니다. 그리고 계속 길을 가는데 이번에는 큰 대로에서 한 사람이 큰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공자가 그에게 불벼락을 내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본척만척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제자들이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은 더 잘못했는데 왜 그냥 지나치나요?” 그때 공자가 말했습니다. “저 인간은 야단쳐도 들을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라네.”책망은 들을만한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책망에 잘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책망을 받았다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책망 받을 일이 없는 완벽한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자람을 받아들이며 책망을 들을 때 감사로 여기는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네 속에 악독이 가득하느냐? 어찌하여 네 속에 사랑이 없느냐? 어찌하여 네 속에 교만이 가득하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책망을 통해 참된 제자로 거듭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