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이 지키는 절기 가운데 유월절이 있습니다.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축제일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면서 꼭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바로 ‘아니마민(Animamin)’이라는 노래입니다. ‘아니마민’은 히브리어로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작곡된 곳이 놀랍게도 나치가 유대인들을 가장 많이 죽였던 공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Auschwitz Concentration Camp)였습니다. 이 곡을 쓰고 노래를 만든 사람은 그 수용소에 갇혔던 유대인이었습니다. 아니마민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시리라는 것을 믿는다오. 그러나 조금 늦게 오신다오. 나는 믿는다오, 나는 믿는다오. 영원한 평화의 그 날이 땅위에 오리라 나는 믿는다오. 그 때가 다가오고 있으며 더딜지라도 오리라 나는 믿는다오.” 내일이 없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실 자가 오실 것을 기다리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는 믿는다오. 나는 믿는다오. 영원한 평화의 그 날이 땅위에 오리라 나는 믿는다오.’ 라는 노래를 부르며 고난의 날들을 이겨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지옥과 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나와 이스라엘을 다시 재건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를 기다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이 되면 지금도 ‘아니마민’을 부르며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노래하며 다시 오실 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시므온과 안나 선지자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고 본문이 증거하는 것은 그들의 기다림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성탄의 은혜를 누리려면 먼저 기다리는 마음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 때 마음에 성탄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진실로 기다리는 자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예수께 무관심한 채 살아가는 자보다 예수를 기다리는 자를 찾으십니다. 예수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사람이 먼저 예수를 뵙는 영광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시므온의 기다림은 어떠합니까?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다고 본문은 소개합니다. 메시야가 시므온에게 위로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위로는메시아가 오셔서 압제 당하는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 얻어지는 위로를 가리킵니다. 예수가 오시리라는 것을 믿는 자들은 그의 오심을 끊임없이 기다리고 소망하였습니다. 시므온은 오랜 침묵의 시대에 살면서도 메시야의 오심을 확신하며 끈기 있게 기다리던 자였습니다. 준비하는 믿음을 가지고 주를 대망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에 오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주님이 마음에 임하시기를 사모하십니까? 주님을 기다리십니까?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성탄을 지나가는 달력의 절기로 만나고 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기다림이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께서 마음에 임하시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깨달아야 합니다. 주를 기다리는 마음이 곧 성탄을 준비하는 마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므온에게서 주를 기다리는 자의 참된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를 기다리는 자는 어떤 자들입니까? 첫째로 의롭고 경건한 자 어떤 사람이 넓은 사막을 방황하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물이 다 떨어져가고 있는 것을 알고 걱정과 불안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오아시스를 찾아야만 삽니다. 그는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살았다고 외쳤습니다. 발자국만 따라가면 분명 오아시스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따라가도 발자국은 끝이 없고 해는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한참 후에야 자기 발자국을 밟으며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서 주저앉았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어 하늘에 북극성이 반짝였습니다. 그 별을 본 나그네는 그때서야 방향을 잡아 바른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땅만 바라보다가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향하여 그가 가리키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길로 들어섭니다. 경건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기도에 힘쓰고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하나님이 가리키는 의로운 방향으로 걸어가는 경건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를 기다리는 자는 날마다 경건을 훈련하고 주님과 교제를 나누려고 힘쓰는 의로운 자이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찾아오시는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위에 계시더라” 여기의 ‘의롭다’는 말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정직하고 분명하다는 것이고 '경건하다' 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의 자세가 바르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간절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시므온은 예수의 오심을 볼 수 있었으며 예수를 안아보는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기다리는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이 없이는 더욱 불가능합니다. 주님은 의롭고 경건한 자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오시는 예수를 만나는 특권을 의롭고 경건한 자에게 먼저 허락하셨습니다. 시므온은 막연히 주를 기다리던 자가 아닙니다. 의롭고 경건하게 지내면서 메시야이신 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가장 먼저 만나는 은혜를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둘째로 성령의 감동된 자 프랑스 영지 적도 아프리카에 사는 카레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던 선교사 에스텔라 마이어스(Estella Meyers)는 토착민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설명하는 일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였습니다. 그녀는 교인을 권면하며 책망하고 보호하고 인도하는 것이 성령의 직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설명을 듣던 토착민들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해주는 이를 ‘우리 옆에 구푸리는 이’라고 부르지요.” 마이어즈는 원주민들에게 그 말의 유래를 들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짐꾼들은 머리에 짐을 이고 긴 여행을 하는데 보통 2~3개월씩 걸립니다. 그때 학질이나 이질에 걸리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들은 결국 행렬에서 낙오하게 됩니다. 그러면 말할 것도 없이 들짐승의 먹이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들을 발견하고 측은히 여겨 일으켜 함께 동네로 데리고 갑니다. 그들을 가리켜 ‘우리 옆에 구푸리는 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마이어즈 선교사는 설명을 듣고 보혜사를 ‘우리 옆에 구푸리는 이’로 번역하였습니다. 보혜사이신 성령이야말로 본향을 향해 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일으켜주고 붙들어 주고 보호해 주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예수를 만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를 기다리는 자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 27절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이는 시므온이 계속하여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는 증거였습니다. 시므온이 성전에 들어오게 된 것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이고 마리아가 예수를 성전으로 데려올 때 그를 맞이하도록 준비시킨 분도 바로 성령이셨습니다. 기다리는 자는 성령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죄로 가득 찬 마음, 헛된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온갖 더러운 것들, 부끄러운 것들을 비우며 기다려야 합니다. 오랜 세월을 기다림으로 보낸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항상 인도를 받았습니다. 성령께서 기다리던 주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주를 기다리는 자로 살아갈 때 비로소 주를 만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구원을 바라보는 자 최권삼 군사편찬 연구원은 “세기의 도박으로 불리는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적 보급로 끊고 후방차단, 성공 확율 5000분의 1 뚫어”라며 인천상륙작전을 평가하였습니다. 맥아더 장군(Douglas MacArthur)은 1950년 9월 29일, 서울을 수복한 기념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우리 부대는 옛 서울을 해방시켰습니다. 이 거리는 잔학무도한 공산주의 압제에서 해방되었으며 시민들을 다시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결정적인 승리를 되찾게 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다같이 하나님을 위해 나와 함께 주기도문을 외우도록 합시다.”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섰고, 장병들은 흙으로 얼룩진 전투모를 벗고 함께 주기도문을 외웠습니다. 주기도문이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의 두 손을 꼭 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이 이 민족을 구하기 위해 보내주신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전선에서 어려울 때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요한복음 11장 25절을 암송하며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했습니다. 전선에서도 매일 성경을 한 장 이상 읽었으며, 인천 상륙작전을 계획하면서도 매일 밤 함상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구원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다림이 현실에서 바라보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로 나타나게 하십니다. 본문 30절입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주의 구원을 보았다’ 는 뜻은 구체적인 은혜, 거룩한 약속의 성취를 현재적으로 경험하면서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만나보고 평안한 심정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정도로 크신 감화를 받았습니다. 메시아를 보았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주를 기다리는 자에게 계시의 응답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는 시므온은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모습입니다. 눈앞에 전개 되는 타락과 불신에 휩쓸려갈 것이 아니라 영적 눈을 열어 구원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구원의 위로로 가득하게 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기다림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이 주어질 것을 믿고 바라보며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으로 인하여 성취된 미래를 볼 수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덴마크의 코펜하겐 국립미술관(Statens Museum for Kunst)에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한 유명한 화가가 그 초상화를 보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기대감을 가지고 그림을 면밀히 조사해보았으나 그림기법이나 색채감이 특별하지 않아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함께 온 친구에게 느낀 소감을 말하자, 그 친구가 대답합니다. “여보게, 그것은 자네가 잘못 본 걸세. 그 그림은 마주 서서 보는 것이 아닐세. 어떻게 우리가 구세주이신 예수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겠나? 무릎을 꿇고 앉아서 다시 보게나. 그러면 그 작품의 가치를 알게 될 걸세” 그 말을 들은 화가는 경건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그림을 다시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말할 수 없는 자비와 사랑의 모습이 떠오르며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십니까? 낮아지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자에게 예수가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를 만나야 합니다. 사모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성탄에 오시는 예수를 꼭 만나시기 바랍니다. 부디 의롭고 경건한 자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감동된 마음으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구원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이 땅에 오시는 예수를 품에 안는 성탄의 복을 얻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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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9 15:0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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