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높이며 찬송하라-시 30:1~6 로랜드 헤이스(Roland Hayes)는 미국의 유명한 흑인 음악가였습니다. 1923년 유럽에서 명성이 알려졌을 때 독일 음악계에서 그를 초청하여 베토벤 홀에서 콘서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족적 우월감을 가진 독일인들은 흑인 헤이스가 베토벤 홀에 입장하는 것은 베토벤에 대한 모욕이요 독일인의 수치라고 여겼습니다. 반대하는 독일인들이 표를 구입하여 극장 객석이 가득 찼습니다. 그의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고 콘서트를 훼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헤이스는 신앙인이었지만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빠져 심한 번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약속한 시간에 베토벤 홀 무대에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관객들은 “여기가 어디라고 왔느냐? 내려가라! 노예의 자식인 주제에 감히 우리 앞에 서느냐?” 온갖 모욕적인 언사로 아우성을 쳤습니다. 이 광경을 본 헤이스는 조용히 손을 맞잡고 피아노 옆에 섰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10분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잠시 후 장내가 조용해지자 그는 눈을 들고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를 비추는 조명이 두 뺨에 흐르는 눈물로 반사되었습니다. 그때 헤이스는 소리 내어 기도하였습니다. “나의 피부를 어둡게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내 마음과 영혼은 이 시간 어둡지 않게 하소서. 이 시간 검은 피부의 사람이 부르는 노래가 흰 피부의 어두운 마음을 가진 자들을 감동하게 하옵소서.” 피아노의 소리와 함께 헤이스의 음성이 극장 홀을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부른 곡은 ‘당신은 평화시오’ 라는 찬양이었습니다. 반대하던 독일인들은 영혼에 스며드는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노래가 절정에 달했을 때 베토벤 홀에 모인 관객들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찬양의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그 후 베토벤 홀에 흑인은 안 된다는 어둠이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할 때 하나님께서 높여주신 것입니다. 본 시편은 다윗이 말년에 삶을 돌아보면서 지금까지 보호하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노래하는 찬양시입니다. 핵심적인 모티브는 찬양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높이는 것’에서 시작하여 ‘하나님께 영원히 감사하라’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자신의 온갖 위험과 시련 혹은 정신적 고통까지 치유해 주시고, 위험에서 이끌어 건져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찬송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악한 죄를 지어 책망을 받았어도 회개하면서 용서를 체험하고 하나님을 높이며 찬송하였습니다. 찬송을 빼놓고는 다윗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윗의 일생은 찬송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도 여호와를 높이며 찬송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를 높이며 찬송해야 할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영혼을 살려 주시니 김춘근 장로의 ‘와이 미(Why me)?’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단돈 2백 달러를 가지고 미국에 건너간 김춘근은 천신만고 끝에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었습니다. 4년 만에 최우수 교수로 뽑히는 영예를 안았지만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간경화 진단을 받고 모든 일에서 쉬라는 의사의 충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여 산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 바로 ‘Why me?’ 입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불행이 닥쳐왔느냐’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정직하게 살았고, 수고도 했고, 신앙생활도 꾸준히 했는데 도대체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그렇지만 기도하면서 자신의 감추어진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교만했던 것, 아내와 자녀들에게 잘못한 것들을 울면서 회개했습니다. 치유의 응답을 받고 완치된 김춘근 장로는 JAMA(Jesus Awakening Movement for America)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미국 청년들의 신앙과 도덕 회복운동을 일으켜 청년들을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서 그의 영혼을 살리시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후 김춘근 장로는 다시 ‘Why me?’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릅니다. “왜 나 같은 죄인, 부족한 사람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십니까? 왜 하나님 일에 써주십니까?’라는 감격적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을 높이며 찬송하는 영혼으로 살려 주신 것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다윗은 대적들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아들 압살롬까지 대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멸시와 천대를 받지 않도록 해주셨습니다. 스올 즉 죽음의 골짜기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 나올 수 없는 올무였습니다. 다윗에게는 이겨내기 어려운 큰 시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죽음에서 건져주시고 끌어올려주셨습니다. 다윗이 구원 받은 까닭은 언제나 하나님을 높이며 송축하는 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어릴 때부터 찬송에 익숙한 자였습니다. 수금과 비파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탁월한 영성을 지니고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찬송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윗의 영혼을 살려 주셨습니다. 죽음에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살려주시는 은총을 깨달은 다윗은 더욱 더 하나님을 높이며 찬송하였던 것입니다. 둘째로 기쁨이 오게 하시니 주님과 함께 어떤 사람이 모래 위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발자국은 보폭이 일정한 반면에 자신의 발자국은 지그재그로 어지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던 자신의 발자국이 주님의 발자국을 닮아가기 시작합니다. 얼마 후 주님 발자국 옆에 나란히 가기 시작합니다. 주님과 친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란히 가던 발자국이 주님의 발자국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주님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다시 얼마쯤 가다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주님 발자국 안에 찍히던 조그만 발자국이 점점 커지면서 주님의 발자국과 같아졌습니다. 그러더니 하나의 발자국만 모래 위에 찍히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된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가 된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데 갑자기 발자국이 뒤쳐지더니 처음보다 상태가 더 심각해졌습니다. 지그재그로 출발했다가 멈추고 발뒤꿈치로 모래를 꽉꽉 찍어 어지럽기 짝이 없습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나 그는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님, 처음 발자국이 어지럽게 났던 것은 이해합니다. 주님을 배우기 시작한 초보그리스도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주님께서 어지러운 삶 가운데 들어오셔서 함께 걷는 법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랬지”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조그맣던 저의 발자국이 주님의 발자국 안에 들어가 주님과 가까워졌습니다.” “그래, 제대로 이해하고 있구나.” “조그만 발자국이 커져 주님의 발자국과 같아진 것은 주님을 닮아가게 되었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거다.” “그런데 주님! 왜 갑자기 퇴보하였습니까? 왜 주님 발자국에서 떨어져 처음보다 더 어지러운 발자국이 되었습니까?” 그러자 주께서 미소 지으며 말씀하십니다. “그건 우리가 함께 춤을 춘 것이다!” 예수께서 슬픔 속에 들어오셔서 손을 잡아 춤을 청하신 것입니다. 기쁨의 춤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춤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손잡아 일으켜 주시며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5절입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하나님의 노여움은 순간이요, 하나님의 은총은 평생이요 영원하기에 우리가 찬송해야 합니다. 11절의 고백은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찬송할 때 하나님은 고난도 유익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에게 손해가 되고, 어려움이 되게 하지 않으시고 기쁨이 오게 하신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곡식을 추수하여 말리고 껍질을 벗기는데 ‘트리뷸룸(tribulum)’이라는 도구로 탈곡을 하였습니다. 도리깨와 같은 것입니다. 영어의 고난을 뜻하는 ‘트리뷰레이션’(tribulation)라는 단어가 여기서 유래되었습니다. 고난은 껍질을 벗기듯이 인격을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알곡을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저녁에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찬송하면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의 옷으로 덧입혀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요동치 않게 하시니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중보기도 사역자 체리 힐(Cherie Hill)은 ‘흔들리지 마’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적 성장을 가져오는 중대한 시기는 언제나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련의 시기이다. 왜 그럴까? 어느 곳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위만 바라볼 때가 바로 절망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위기 상황 속에서도 오직 그분께만 매달릴 사람들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이 땅을 감찰하고 계신다. 그러니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요동하지 않는 믿음을 끝까지 가져가겠다고 결단하라! 하나님을 신뢰하라! 가만히 있어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라!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절대로 흔들리지 아니하고 주님을 찬송하라.”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찬송하며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세상 풍조는 나날이 변하고 둘러싼 환경도 수시로 변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물질이나 명예, 권세를 좇아가며 방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고 물질, 명예, 권세에 결코 휘둘리지 않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놓여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이뤄질 것을 믿기에 하나님의 사람은 찬송할 수 있습니다. 주 안에 있으면 항상 찬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 뿌리를 내리면 어려움을 당해도 승리하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십니다. 따라서 눈앞에 놓인 현실이 힘들다 해도 하나님으로 인해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프로농구 선수 제레미 린(Jeremy Lin)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공하기까지 농구인생은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였습니다. NBA에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팀에서 방출된 뒤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엄청난 압박과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빅리거로 잠시나마 화려했던 시간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나를 다시 돌아본다. 삶의 모든 중심은 ‘내가 얼마나 농구를 잘 하는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내 삶의 우상은 바로 ‘농구’였다. 이것을 부숴야 한다.” 린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나’에서 ‘나를 쓰시는 하나님’으로 바꾸어지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경기할 때마다 이런 문구가 적힌 팔찌를 차고 뛰었습니다. “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뛴다 (In Jesus Name I Play).” 린은 경기를 할 때마다 예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주셨습니다. 미국 프로농구 최고의 스타로 올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며 찬송하며 살아야 합니다. 혼자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함께 찬송하여야 합니다. 찬양대원과 성도 여러분! 영혼을 살려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기쁨이 오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높이며 찬송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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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4 21:25: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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