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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십자가를 지고-마 16:21~25

자기 십자가를 지고-마 16:21~25

 

어느 날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십자가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무리 중에 실라스(Silas)라는 게으름쟁이가 있었습니다. 실라스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무거운 십자가를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 이 십자가는 왜 이렇게 무겁습니까? 왜 저에게 무거운 십자가를 주십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실라스야. 그렇게 무겁니? 그렇다면 오히려 다행이구나. 십자가는 무거울수록 좋다. 왜냐하면 무거운 십자가를 질수록 결국 네가 받을 보상이 더 클 테니까 말이다!” 그 말씀을 하시고 예수께서 떠나셨습니다. 게으름쟁이 실라스는 계속 투덜거리고 무겁다고 불평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십자가를 땅에 내려놓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무거운 십자가를 가벼운 것으로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사탄이 나타나 그럴듯한 제안을 합니다. “십자가가 무거워 보이는군. 나는 가벼운 종이로 무엇이든지 모조품을 만들 수 있다. 보기에는 똑같아도 전혀 무겁지 않다. 진품하고 똑같아 보일 테니 십자가를 지라고 주신 예수도 아마 십자가를 구별하지 못할 거다게으름쟁이 실라스는 무척 기뻤습니다. 사탄에게 충분히 사례할 테니, 무거운 십자가와 똑같은 종이 십자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굉장히 무거운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하고 가벼운 종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가 기다리고 계신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실라스가 말했습니다. “주님, 보십시오. 저는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왔습니다. 이르신 대로 십자가를 지고 왔으니, 저에게 십자가에 걸맞은 상을 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잘 했구나. 네 십자가에 걸맞은 상을 주겠다. 따라 오너라.” 실라스는 종이 십자가를 지고도 상을 받게 되었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언덕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꼭대기에 있는 아름다운 저택을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실라스야, 언덕 위의 저 황금 저택이 네 것이다. 네가 십자가를 지고 온 상이다.” 그는 황금 저택을 보고 좋아하면서 그곳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막 문을 열려는데 강풍이 불어 왔습니다. 너무 놀랍고 황당하게도 황금 저택이 바람에 날려가 버렸습니다. 그 황금 저택도 종이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고 있는 십자가는 주님이 주신 나무로 된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사탄이 준 종이 십자가입니까?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물으신 후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십자가 지시는 것을 만류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책망을 하시며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며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장식이나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지고 갈 때 그 가치가 있습니다.

본문 24절에서 예수는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여기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는 원어로 카이 아라토 톤 스타우론 아우투인데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생겨나는 고난 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헌신된 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명령형을 사용하여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지금 당장 능동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지는 일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합니다.

십자가를 사람 때문에 지는 것으로 오해하여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자식 때문에 십자가를 진다고 흔히 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다른 사람 때문에 지는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지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어진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의 행동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주의 일을 생각하라

미국 윌로우 크릭 교회의 빌 하이벨스(Bill Hybels) 목사가 책에서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차를 타고 출근하면서 라디오를 틀어 지난 밤 증권 지수가 얼마나 올랐는지 체크하고, 가는 길에 스타 벅스에 들러 어떤 커피를 마실까 고민을 하다가 어느 날 회개하였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인데 아침 일찍 지난밤에 증시가 얼마나 올랐나에 관심을 갖고 있고, 스타 벅스에 가서 거기서 일하는 직원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고 어떤 커피를 마실까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사람의 일에는 많은 생각과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영적인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전혀 생각지 않고 무관심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문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여기의 생각하지 아니하고에 해당하는 프로네오중히 여기다, 마음에 두다라는 뜻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어떤 것에 향하게 함을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단지 정치적 구원을 이룰 메시야로 생각하며 집착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예수께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의 행동을 바라보는 우리는 어떠합니까? 주님에 대한 고백과 삶이 일치하고 있습니까? 외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 하지만 내적 목적에 있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까? 주기도문을 외우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보다 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데 관심이 많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세속적 이익을 바라고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은커녕 오히려 그리스도를 넘어지게 하고 교회 문제만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이익과 영광을 위한 것들을 떨쳐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온전히 주의 일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주의 뒤를 따라가라

부흥운동의 선구자 찰스 피니(Charles G. Finny)가 청년 시절, 뉴욕 법무법인에서 변호사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새벽에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피니야, 너는 지금하고 있는 일이 끝나면 무엇을 하려느냐?” 그가 변호사 개업을 하겠습니다대답하자 주께서 다시 물으십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겠느냐?” “부자가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겠느냐?” “은퇴하겠지요.”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겠느냐?” “죽겠지요” “죽은 후에는 무엇을 하겠느냐?”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심판을 받겠지요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내가 심판대 앞에 설수 있는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형식적으로 믿었고 진정으로 믿지 못했습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시고 평안을 주옵소서.” 기도한 후 마음에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때 다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변호사가 되지 말고 나의 복음을 전하는 종이 되어라.” 변호사로 출세할 수 있었는데 주의 뒤를 따라 가라는 것입니다. 결국 피니는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던 미국을 다시 일으키는 위대한 부흥사가 되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가 죽은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본문 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의 따를 것이니라따르다는 뜻을 지닌 아콜루데이토인데 현재형 단어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따르는 일이 한 번에 그치는 일시적 행위가 아니라 전심전력하여 계속해야 할 과제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가신 길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자는 반드시 피와 땀과 눈물의 희생이 있는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 소극적 단계라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적극적인 단계입니다. 진정한 제자는 십자가를 등에 지고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뒤를 따르는 자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그리스도를 향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기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주기철(朱基徹) 목사의 일사각오 신앙이라는 글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 주님 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으로 평안과 즐거움과 영광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내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내 무슨 말로 대답하랴!” 자기를 향한 걸음이 아니라 주를 따라가는 십자가의 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등에 십자가가 아닌 세상 것이 실려 있다면 내려놓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셨던 것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를 따라가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주를 위해 희생하라

잭 에커드(Jack Eckerd)는 약국을 경영하다 전도를 받고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성경을 보다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세상 사람과 무엇인가 달라야 하지 않는가? 좋은 일을 해야 하지 않는가! 세상의 빛이면 빛 되게 살고 소금이면 소금처럼 살아야 되지 않는가라며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약국은 약만 파는 것이 아니라 도색잡지도 팔았는데 마음속에 이 잡지를 없애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을 성적으로 유혹하는 도색잡지를 파는 세상이 약국에 있으니 이제 세상을 쫓아내야 되겠다.” 그는 약국에서 도색잡지로 연간 5백만 달러의 돈을 벌었지만 포기하고 과감하게 잡지를 없애 버렸습니다. 자연히 매출은 줄어들었고 약국의 직원들이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잭은 포기하지 않고 믿음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모두 그가 돌았다고 생각하였지만 점점 그를 지지하기 시작했고 2년이 못되어 전국적으로 도색잡지 추방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미국의 모든 약국에서 도색잡지를 추방하게 되었습니다. 잭 에커드는 이 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복을 얻어 크게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전국에 17백개 점포를 가진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약방 연쇄점 에커드 드락(Eckerd Drug)’의 사장이 된 것입니다. 그는 눈앞의 이익에 빠지지 않고 그것을 단호하게 버리고 주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일시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 같이 보였지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희생으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십자가를 지는 행위는 자신의 생명을 주를 위해 바치는 헌신을 가리킵니다. 여기의 주를 위한 희생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단하여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목숨까지 내어 놓는 모습입니다. 이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자입니다. 목숨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지키려 한다면 목숨과 더불어 영적 생명까지 잃게 될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육적 생명을 내어 놓을 때 영원히 쇠하지 않는 영생과 영광으로 축복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1029-30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위해 희생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헨리크 센키비츠(Henryk Sienkiewicz)의 저서 쿼바디스(quo vadis)’에 보면 베드로가 얼마나 약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자주 지지 않으려고 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다짐해도 또 피하고 싶은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십자가를 피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 아피아가도(Via Apia)에서 예수를 만납니다. 베드로는 예수께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네가 그토록 지기 싫어하는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내가 로마로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을 듣고 오던 길을 돌이켜 로마로 돌아갑니다. 십자가를 지러 가는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사도에게도 무거운 짐입니다. 벗어 던지고 싶은 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피하려고 하면 점점 더 무거워지지만 기꺼이 지려고 하면 점점 가벼워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꺼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토저(Aiden W. Tozer)철저한 십자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대해 결단해야 한다. 선택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십자가를 회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 위에서 죽는 것이다. 십자가가 당신을 완전히 죽이게 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찾으라. 거룩함을 추구하고 당신이 당하게 될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십자가를 지고 가라. ”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세상적인 것을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는 마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십자가 없이 주를 따르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디 사람의 일보다 주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십자가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힘들고 어려워도 떠나가지 말고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를 따라가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위한 희생으로 마지막 때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