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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택하신 자-롬 11:25~32

하나님의 택하신 자-롬 11:25~32

세계 속에 영향을 미친 유대인 100이라는 책에 등장하는 칼 막스, 심리학자 프로이드, 화가 샤갈, 아인슈타인, 세계적 지휘자 번스타인, 외교가 키신저, '쉰들러, 쥬라기 공원 영화'를 만든 스필버그 등이 모두 유대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인은 작은 것 같지만 큰 사람들입니다. 세계적으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을 가장 많이 배출한 나라가 바로 유대의 이스라엘입니다. 노벨상 수상자 300명 가운데 93명이 유대인입니다. 3분의 1이 유대인입니다. 미국에 사는 유대인의 생활수준은 미국 최상위 40가정 중에 42%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변호사 70만 중에 20% 14만이 유대인입니다. 미국 유명한 대학 교수 중 25-35%가 유대인입니다. 주요 행정 책임자의 90%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 영향력이 있는 뉴욕 타임즈 사장 슐츠버그(Shultzburger), 워싱턴 포스트지 사장 케서린 그레그레이엄(Catherine Graium), 가장 출판을 많이 하는 랜덤 하우스(Randum House) 사장이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은 숫자가 많지 않으면서 어떻게 세계적으로 우수한 민족이 되었습니까? 그 힘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바로 하나님이 택하여 주신 자라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여 주셨는데 누가 나를 건드리리요?”라는 믿음이 유대인들에게 가득 차 있습니다. 

로마서 9장에서 11장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소원은 동족 유대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세례를 받고 변화가 되는데 동족 유대인들은 마음이 완악하고 강팍하여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메시야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유대 동족을 생각하면 바울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치지 않는 마음의 아픔이 있다고 말합니다. ‘동족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만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서 저주를 받아도 좋다까지 고백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거스르고 다른 길로 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는가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를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택하신 자는 과연 누구입니까?
 

첫째로 사랑을 입은 자라

샤르니(Charney)라는 프랑스인이 나폴레옹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토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친구들에게 버림받고 세상으로부터 잊혀진 듯이 보였습니다. 고독과 절망에 빠진 샤르니는 돌 조각을 가지고 독방 벽에 이렇게 새겼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토굴 감옥 바닥에 깔려 있던 돌 틈에서 푸른 새싹이 돋아났습니다. 벽 위에 뚫린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을 향해 뻗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샤르니는 간수가 넣어 주는 물을 매일 조금씩 남겨 푸른 잎사귀에 부어 주곤 했습니다. 새싹이 마침내 꽃을 피우게 될 때까지 자라났습니다. 꽃나무가 탐스러운 꽃송이를 터뜨리자 고독한 죄수는 벽 위에 새겼던 글귀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하나님이 돌보신다라고 새겨 넣었습니다. 이 소식이 조세핀(Josephine) 왕비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조세핀은 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사람은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 없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진실한 여인이었습니다. 조세핀은 샤르니를 석방하도록 나폴레옹 황제를 설득했고 그는 석방되었습니다. 토굴 감옥에서 피어난 꽃나무는 샤르니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본문 28절입니다.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택하심을 받았다는 관점에서 보면, 유대인들은 조상 덕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유대 백성들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죄를 지은 백성들을 하나님이 외면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자식을 버릴 수 없는 부모처럼 하나님은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바탕을 둔 사랑을 일컫는 말은 헤세드입니다. 헤세드의 사랑이야말로 구원의 근거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으십니다. 무조건적으로 먼저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한량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그 사랑을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의 바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야 합니다. 실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그 사랑을 기필코 이루실 것입니다.
 

둘째로 은사를 받은 자라

불의 전차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주인공 에릭 리델 (Eric Henry Liddell) 100미터 육상 영국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했습니다. 금메달이 확실시된 선수였기 때문에 많은 기대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기가 주일날 잡혔습니다. 믿음의 사람 에릭 리델은 주일에는 달릴 수 없다고 불참을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여론의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그래도 리델은 경기장으로 안가고 주일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며칠 후 400미터 선수가 출전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출전해 보라고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주종목은 아니었지만 믿음으로 출전했고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승리의 비결을 물었을 때 리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처음 200미터는 제 힘으로 달렸고, 다음 200미터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달렸습니다.” 본래 에릭 리델은 중국 선교사로 가려고 했는데 올림픽 육상선수로 출전하였습니다. 가족들은 그가 선교 준비를 하지 않고 운동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중국선교를 위해 만드셨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나를 빠르게 만드셨다. 나는 뛸 때 하나님의 기쁨을 느낀다.” 운동의 재능이 실력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사용할 때 하나님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이런 확신을 가진 사람을 누구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요, 나는 뛸 때 기쁘다. 하나님의 기쁨을 느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29절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은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 힘입어 이방인이 먼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중 된 자가 되게 함으로 시기가 작동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를 통해 택하신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을 겸손히 대하며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결코 그들을 정죄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평안을 누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자로 더욱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부르심과 은사로 인해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자답게 살아가야 할 뿐입니다.
 

셋째로 긍휼을 얻은 자라

유대의 랍비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여행으로 지친 나그네를 자기의 집에 묵게 하였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나그네와 대화를 하였습니다. 믿음에 대해, 또 그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나그네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입니다 이 말을 들은 랍비는 화가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나그네에게 소리쳤습니다. “무신론자를 내 집에서 묵게 할 수 없습니다. 당장 나가시오!” 여행에 지친 나그네는 아무 말 없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밖으로 나갔습니다. 밖은 어두컴컴했습니다. 랍비는 문을 닫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앞에 촛불이 켜 있고 성경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때 그에게 아들아, 너는 어찌하여 나그네를 내쫓았느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랍비가 대답합니다. “나그네는 무신론자입니다. 무신론자를 집에서 묵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 쫓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나는 그를 거의 100년 동안 용납하고 참아주었는데 너는 고작 하룻밤을 못 참느냐?’ 이 음성을 듣고 랍비는 즉시 일어나 달려가 나그네를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만나지 못한 형제를 만난 것처럼 친절하게 대접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신론자를 100년 동안 참아주신 것은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참아 주셨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있기에 매 순간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 할지라도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31절입니다.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는 그들로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둔하여지고 순종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도리어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이 누리는 긍휼 때문에 이스라엘이 시기하여 그들도 하나님의 긍휼을 얻도록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체험하는 가운데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 분을 더욱 더 의지하여야 합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의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저서 성자 프란체스코에 나오는 우화입니다. 평생 완전함에 도달하고자 애를 쓴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막으로 들어가 밤낮없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죽음의 날이 찾아와 천국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때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거기 누구시오?” 수도자는 대답했습니다. “접니다.” 그러자 목소리가 대답했습니다. “여기는 둘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수도자는 다시 세상에 돌아와 열심히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운명의 시간이 와 하늘로 올라가 천국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거기 누구시오?” 똑같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접니다.” 수도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목소리가 다시 대답했습니다. “여기는 둘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수도자는 다시 세상에 떨어져 전보다 더 치열하게 수도를 하다가 백 살 노인이 되어 죽어 다시금 천국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거기 누구시오?” 또 다시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때 수도자는 황급히 대답했습니다. “당신입니다. 주님, 당신이에요!” 그러자 즉시 문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예수와 연합한 자가 되었는지 확인하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만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로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위대한일을 계획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특별하거나 공로가 있거나 업적이 있어서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뜻대로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사명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결코 절망하거나 실망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여주신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끌어 가심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하나님의 택하신 자로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 담대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자로 충성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얻은 자로 기쁘게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