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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강용규목사

그길 이사야 35:8~10

그길 이사야 35:8~10


우리는 때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져 어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향해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애굽 왕의 엄청난 군대가 이스라엘을 뒤쫓았고 앞에는 거대한 홍해가 이스라엘을 가로막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뒤로 물러설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로 하여금 광야에서 주려 죽게 하느냐” 손가락질하며 모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십니다. “너희는 오늘 가만히 있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하는가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앞을 가로막았던 홍해를 가르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전하게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알버트 까뮈의 ‘페스트’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독일 나치스가 유럽을 점령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페스트균은 자기도 감염시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감염시켜 죽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신학심포지엄에서 ‘죄’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죄하면 통상 “과녁을 벗어나다.”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인 된 삶은 정도를 벗어난 삶으로 알아왔습니다. 그런데 헬라어 하마르티아 즉 죄는 감염 또는 전염이라는 뜻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페스트균처럼 자신도 죽일 뿐만 아니라 남까지도 죽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담과 이브는 죄로 말미암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죄는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낳은 두 아들 가인과 아벨에게까지 그 죄가 이르는 것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 봅니다. 그리고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그 죄 또한 개인의 멸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정까지 멸망에 이르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가족 중에 어느 한 사람이라도 죄에 빠지면 그 가정이 평화롭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다 죄 아래 놓여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로마서 7장 24절에서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는 고백을 하기에 이릅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 있는 죄를 보았고 그 죄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곤고한 자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자가 누구랴 며 탄식합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서 7장 25절의 고백처럼 자신을 구원해 줄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모두 새 삶을 산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고기 잡는 어부로 살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세리장으로 살던 마태는 예수님을 만난 후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데 앞장섰던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새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11장 25절에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이시여 이 비밀을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주시고 이 아이에게 가르쳐 주심을 감사하나이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새 길은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말하는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이 걸어갈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부모의 손을 떠나면 자신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지식이나 지혜가 아닌 어린아이와 같이 주님 없이 살 수 없음을 믿는 사람들에게 그 길은 발견되며 그 사람들이 바로 새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나옵니다. 목자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우리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섭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주님의 음성 듣기를 원하고 그 음성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로 더불어 살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을 걸어갈 때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첫째는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두 번째는 주님을 닮게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예배드리는 삶을 살게 될 때 주님의 영광이 깃들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과 걷는 길에는 낮이 있고 밤이 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낮에 다볼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본 것처럼 우리도 낮에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낮과 같았던 밝은 세상에 갑작스레 먹구름이 몰려와 산 전체를 어둡게 만든 것처럼 우리 인생에도 먹구름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어두운 먹구름이 몰려올 때 우리는 귀를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안디옥에서 시작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놀라운 속도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도 바울이 가는 길이 모두 막혀버렸습니다. 그 까닭은 예수님의 영이 허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밤 같은 상황에서 바울은 환상을 봅니다. 환상 중에 마케도냐 사람이 나타나 “이리 와서 나를 도우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 다음날 바울은 드로아에서 배를 타서 네압볼리로 갑니다. 그리고 빌립보에 가게 됨으로 복음이 유럽으로 전해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낮과 같이 밝은 길을 걸어갈 때 주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러나 때로 의심의 구름 두려움의 구름이 덮칠 때 귀를 기울이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지켜주리라. 내가 너를 인도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