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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강용규목사

신뢰2009.07.18강용규목사▒▒▒▒ 마가복음 4:35~41

신뢰2009.07.18강용규목사▒▒▒▒ 마가복음 4:35~41



‘관포지교’라는 한자성어는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사귐이라는 뜻으로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이러한 관중과 포숙의 관계는 구약에서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사위인 다윗을 틈만 나면 죽이기 위해 계획을 세웁니다.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은 아들이라면 아버지 편에 서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다윗을 죽이려는 아버지를 올바르지 않다 여기며 목숨을 걸고 친구인 다윗을 돕습니다. 그러나 후에 길보아산 전투에서 사울과 요나단은 죽습니다. 그 전투에서 요나단의 가족은 거의 죽고 양쪽다리를 쓸 수 없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만 살아남습니다. 왕이 된 후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불러다가 왕궁에서 거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처럼 대했습니다.

제가 오늘 믿음이라는 단어보다 신뢰라는 단어를 사용한 까닭이 있습니다. 이번 제3회 신학심포지엄에서 허먼웨이첸 교수님의 강의를 통해 “믿음은 바로 신뢰”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의내린 것이 바로 신뢰입니다. 그리고 신뢰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관계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신뢰하고 우리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에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에서 믿음은 “우리가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신뢰하는 것 더 나아가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후에 배를 타고 가버나움을 떠나 거라사 지방으로 가십니다.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갑자기 풍랑이 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고 난 후 피곤한 몸으로 배 뒤쪽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인간이심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셨기에 피곤함을 느끼셨고 피곤하셨기에 주무셨던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은 당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바다에서 풍랑이 일어 자신들의 생명에 위협을 느끼자 주무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풍랑을 잠잠케 하신 후 제자들을 향해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며 꾸짖으셨습니다. 중요한 사실 하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는 그 자리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보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에 위협이 닥쳐오자 더 이상 배 안에 계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정도를 넘어서는 순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습니다.

창세기 12장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0년 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기다려도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자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들 이스마엘을 얻습니다. 아브라함은 10년까지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 후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방법과 지식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한계는 예수님을 어떻게 보느냐와 연관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분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 죄악과 죽음에서 건져주신 분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능력이 많은 목수의 아들 즉 사람으로만 믿는다면 예수님의 능력을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어떻게 보느냐? 이것은 참 중요합니다.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렵게 얻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없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오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만 두어라. 네 아들 이삭까지도 아끼지 않고 바치는 것을 보니 나를 신뢰하는 줄을 이제야 알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은 자신의 생명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자기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바칠 수 있을 때 믿음의 한계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에서 느브갓네살 왕이 커다란 금 신상을 만들어 “나팔소리가 울리면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그 자리에 서서 금 신상에게 절해라. 만약 절하지 않는 자는 풀무불속에 던져 불태워 죽이겠다.”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금 신상에 절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니엘과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그들은 왕 앞에 끌려갔습니다. 왕이 그들에게 앞으로도 절하지 않으면 지금보다 일곱 배나 더 센 불에 집어넣겠다. 는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비록 풀무불 속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불속에서 건져내시리라.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불속에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믿음이요 신뢰인 것입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에게 어느날 갑자기 이유 없는 고통이 찾아와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고 자식까지도 잃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어 가신 이도 하나님이시니라. 고백합니다. 사단이 욥의 건강을 쳐서 그의 온 몸에 욕창이 났습니다. 욕창이 너무 심해 기왓장으로 자기 몸을 북북 긁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려라.”고 말하며 욥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때에도 욥은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셨듯이 화도 주신다.”고 고백합니다. 결국 욥이 하나님을 신뢰했듯 하나님도 자신을 신뢰하는 욥에게 큰 축복을 내리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