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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12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12

필립 켈러 (W. Philip Keller) 양과 목자(A Shepherd Looks at Psalm 23)’라는 책을 통해 목자와 양의 관계를 설명하였습니다. 특히 양의 속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양은 스스로 보호하지 못하는 무력한 짐승인지라 적이 나타나면 겁에 질려 도망치거나 덤불에 숨을 뿐입니다. 게다가 한 번 뒤집히면 혼자서 몸을 뒤집고 일어나지 못합니다. 목자가 구해주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따라서 양은 세심한 관리가 필요합니다. 자기를 잘 돌보지 못하는 동물이라 그냥 두면 독초를 먹고 더러운 물을 마셔 병에 걸리거나 위험한 곳을 돌아다니다가 죽게 됩니다. 또 양은 다니던 길로만 가려 하고, 풀을 뜯던 곳에서만 뜯으려고 합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양도, 초장도 모두 피폐해지고 맙니다. 그리고 양의 눈은 근시라서 가까운 것은 보지만 멀리 있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10미터 이상을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들짐승이 나타나도 미리 대비하지 못하고, 길을 잘 잃어버립니다. 그러기에 양은 귀를 기울여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갑니다. 넓은 들판에 가면 양들은 한 곳에 모여 있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양은 전염병에 약하기 때문에 모여 있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목자들은 모여 있는 양들을 흩어 놓으려고 염소를 풀어 놓습니다. 염소는 모여 있는 양들 틈에 들어가 뿔로 박아 여기 저기 흩어 버립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면 목자가 얼마나 양에게 필요한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양이 건강하게 자라려면 선한 목자를 만나야 합니다. 양의 행복은 전적으로 목자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양을 위해 온갖 어려움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선한 목자는 양 떼를 번성하게 합니다. 그러나 게으르고 악한 목자는 양 떼가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 속에서 죽어가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목자와 양은 생명의 관계입니다.

복음성가 여호와 나의 목자를 부릅니다. “여호와 나의 목자 내게 부족 없네 푸르른 초장 위에 나의 몸 누이시네 선한 목자 오 나의 목자여 생수가 넘치는 곳 날 인도하시네. 내 영혼 소생하며 자기 이름 위해 의의길 인도하니 골짜기 두렴없네. 주님의 지팡이가 안위 하네 나를 주께서 원수 앞에 상으로 베푸시네. 기름을 머리 위에 바르시는 주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함 따르리니 선한 목자 오 나의 목자여 생수가 넘치는 곳 날 인도하시네.”

본문은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초막절기가 끝나는 시점에 주어진 예수의 교훈입니다. 양과 목자의 비유를 통해 유대 종교 지도자 바리새인들을 영적 소경이라고 언급하십니다. 또한 그들은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가 아니라 강도 혹은 삯꾼 목자에 불과하다고 규정하셨습니다. 아울러 예수 자신만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여기의 선한의 원어 칼로스 모든 면에서 흠잡을 것이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면에서 흠잡을 것이 없는 목자임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우리에 들어가게 하는 양의 문이요 유일한 목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예수가 선한 목자가 되시는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인도하는 목자이시니

미국의 작가 캐서린 마샬 (Catherine Marshall)의 이야기입니다. 남편 피터 먀샬(Peter Marshall)은 미국 상원의회의 목사였는데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졌습니다. 마샬은 아들을 데리고 달려갔으나 남편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습니다. 남편의 얼굴을 보고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나오는데 앞이 캄캄해집니다. “앞으로 남편 없이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이런 마음으로 문을 나와 두 발짝쯤 걸었을 때 갑자기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발걸음이 멈춰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그 음성은 우리가 듣는 언어는 아니지만 확실한 소리였습니다.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이 세상 끝날까지 정녕 너를 따르리라(Surely goodness and mercy shall follow you all the days of your life)”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그녀와 어린 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작가가 되었고, 아들 피터 존 마샬(Peter John Marshall) 역시 유명한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해도 복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한 목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여기의 인도하여는 원어로 엑사게이입니다. 목자가 자기에게 속한 양들을 개별적으로 철저하게 알고 각자의 처한 형편에 따라 적절한 방법으로 인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의 형편과 처지를 세밀하게 살피시고 보살피시는 목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적절한 방법으로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양들은 목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목소리를 구별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목자이신 주를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음성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양이 목자의 음성을 모르면 길을 잃어버리듯 주님의 음성을 알지 못하면 인도를 받을 수 없습니다. 사단의 미혹하는 소리에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참된 양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구원하는 목자이시니

영국 BBC방송에 한 노신사가 초대되었습니다. 왜 자신이 초대되었는지 모르는 노신사에게 아나운서가 자료를 주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체코 프라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669명의 유대인 아이들을 영국으로 입양시킨 서류와 사진들이었습니다. 이 노신사의 이름은 니콜라스 윈턴(Nicholas Winton)입니다. 방청객들은 그에게 찬사를 보냈지만 그는 오히려 부끄러워했습니다. 전쟁 당시 29살 은행원이었던 윈턴은 유대인 아이들까지 갇혀 있는 나치 수용소 실상을 보고 사비를 털어 669명의 아이를 영국으로 데리고 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나치의 폴란드 침공으로 마지막 250명의 아이를 태운 기차가 출발조차 하지 못했으며 그 후 아이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구한 아이들 보다 구하지 못한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을 느꼈던 윈턴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50년 후 아내가 서류를 우연히 발견하여 방송에 알리지 않았다면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방송이 나가는 것에 불편해하는 윈턴을 보며 아나운서가 말합니다. "혹시 방청객 가운데 니콜라스 윈턴에 의해 생명을 구한 분이 있다면 일어나 주세요." 그러자 주위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났습니다. 구원받은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참석한 것입니다. 윈턴은 그들과 함께 50년 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가 구한 669명의 아이들과 그들이 낳은 자녀와 손자들을 포함한 6천명의 가족들을 '니키의 아이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윈턴은 2002 '니키의 아이들' 5,000명과 만남의 자리를 가졌으며, 2003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습니다. '영국의 쉰들러'라고 불리는 니콜라스 윈턴은 10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는 다른 이들을 구원한 영웅입니다. 생명을 구원한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이 넘칩니다. 목숨까지 버리시며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의 사건도 이와 같습니다.

본문 9절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여기의 구원을 얻고 소데세타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는 미래 시제 수동태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이루어짐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사도 요한은 죽어가는 양을 구원하시는 은혜와 소생된 양을 자기 것으로 삼으시고 꼴을 먹여 길러주시는 은혜를 언급하였습니다.

구원이 예수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거짓 목자로 인해 죽어가는 유대인들을 소생시키는 은혜를 베푸셨고, 이리와 같은 사단의 위협으로 인해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전인적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과거의 죄로부터만 구원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까지 하나님 우리안에 거하도록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의 구원을 깨닫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어둠의 권세 아래에서 신음하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이 구원의 목자이심을 전파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생명주는 목자이시니

바보 예수라는 그림으로 알려진 김병종 화백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수의 그림에 언제나 한 방울의 눈물을 그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어떤 신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뿐 아니라 자신을 미워하며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는 모든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리십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를 가리켜서 김 화백은 바보 예수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바보 같으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똑똑해서 이 시대에 진실한 목자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지적합니다. 물론 양을 돌보기 위해 목자가 존재하지만 자신의 목숨이 아닌 양의 생명을 선택한 바보같은 목자가 있습니다. 그 목자는 자신을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말합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한 자가 아닙니까? 그러나 이 바보 같은 선택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께서 기꺼이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많은 이들이 생명을 얻도록 하신 것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여기의 생명 조엔이라는 원어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영혼을 구원하여 살릴 뿐만 아니라 충분한 만족까지 주셨습니다. 예수를 선한 목자로 믿고 따를 때 영원한 생명과 만족이 보장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값진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목자이신 예수를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선한 목자가 되셔서 풍성한 생명을 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환경과 처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확고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따라서 어떠한 고난과 불행이 닥쳐도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일이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생명을 풍성하게 얻게 될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시입니다. 최고의 배우가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할 때입니다. 노신사가 배우에게 부탁합니다. “당신의 멋진 목소리로 시편 23편을 들려주세요.” 배우는 곧 시편 23편을 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참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였습니다. 낭송을 마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객석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잠시 후 배우는 노신사에게 시편 23편을 낭송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노신사가 지그시 눈을 감고 천천히 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노신사가 낭송을 마치자 극장에 침묵이 흘렀습니다. 관객들이 눈물을 닦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배우가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시편 23편을 알았지만, 저 분은 시편 23편의 목자를 알고 계셨습니다.” 선한 목자를 알고 계십니까? 선한 목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양과 관련된 사실에 의하면 양은 목줄을 매지 못하는 고집이 있는 짐승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목줄을 메어놓으면 스트레스를 받아 죽기도 합니다. 그래서 방목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고집을 꺾지 않는 양이 있으면 일부러 다리의 약한 부위를 부러뜨립니다. 양은 고통스러워서 웁니다. 그때 목자는 부러진 다리에 깁스를 대고 우리에 넣어 누워서 지내도록 합니다. 양에게 꼴과 물을 주며 잘 돌보아줍니다. 그리고 부러진 다리가 나으면 양을 우리에서 데리고 나옵니다. 그러면 고집이 센 양이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고 목자의 인도를 잘 따르게 됩니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목자이신 예수를 믿고 따르는지의 여부입니다. 아무리 선한 목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음성을 듣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목자이신 예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선한 양입니까? 고집이 센 양입니까? 부디 선한 양이 되어 예수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인도하는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구원하는 목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생명을 주는 목자이시기에 순종하며 따라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