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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광일목사

주의 손이 함께 하는 교회-행 11:19~30

주의 손이 함께 하는 교회-행 11:19~30

 

우리나라에 최초로 세워진 교회는 소래 교회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황해도 의주에 살았던 서상륜(徐相崙)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한문을 잘 알 뿐 아니라 중국어에도 능통하였습니다. 홍삼 장사를 하면서 중국을 드나들던 가운데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됩니다. 그 때 헌터 선교사를 만나 치료를 받고 회복되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서상륜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한편 스코틀랜드 출신 로스 선교사는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면서 조선 땅에 선교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상륜은 심양에서 활동하던 로스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로스는 서상륜의 도움으로 우리말로 성경 번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1882년 누가복음을 번역하여 심양에서 출판하였습니다. 그러자 서상륜은 번역된 누가복음을 가슴에 품고 국경을 넘어 오다가 압록강변에서 국경수비대원들에게 발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친구의 도움으로 풀려난 서상륜은 고향인 의주에서 전도를 시작하였습니다.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되자 외가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로 피신을 가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송천리는 소나무가 무성하고 샘이 솟는 마을로서 우리말로 솔내인데 여기서 소래라는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서상륜은 1883년 초가집 처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동생 서경조와 합류하여 교인들과 함께 기와집 여덟칸 예배당을 건축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교회였던 소래교회의 모습입니다. 한국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들어오기 2년 전의 일입니다.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교회가 생겨난 것은 세계 선교역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 후 서상륜은 1887년 소래 교인 세 사람을 데리고 서울의 언더우드 선교사를 찾아가 세례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그때 언더우드 선교사가 감격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씨를 뿌리러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뿌려진 씨를 추수하러 왔다.” 이러한 사실들이야말로 주의 손이 함께 하심으로 이루어진 놀라운 모습이 아닙니까?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명령 즉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 성취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특히 본문은 최초의 이방교회였던 안디옥 교회 설립과 헤롯에 의한 예루살렘 박해를 중심으로 보도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그 이유는 주의 손이 함께하는 교회였기 떼문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여기의 에 해당하는 케이르 떠받치고 보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도우시면서 임재하여 계시는 것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주의 손은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키며, 하나님은 그 능력으로 교회를 도우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창립 41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인도해 오셨습니다. 교회는 겉모양의 크기나 지명도로 좌우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됨의 생명력과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안디옥 교회처럼 주의 손이 함께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어떤 교회이기에 주의 손이 함께 하는 교회가 되었습니까?
 

첫째로 선교에 힘쓰는 교회이기에

릭 워렌 (Rick Warren) 목사는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저서에서 그리스도인을 세상적인(Worldly Class) 그리스도인과 세계적인(World Class) 그리스도인으로 나누었습니다.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용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들이기는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입니다. 교회에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모임에는 참석하지만, 희생하며 헌신하고 선교하는 일에는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임에는 분명하지만 세상적인 관점에 서 있습니다. 늘 자신이 우선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함만 추구합니다. 늘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구원받은 목적이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세계적인 그리스도인은 쓰임 받기에 기꺼이 순종합니다. 얼마나 편안하며, 얼마나 인정을 받으며, 얼마나 알아주는가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심에 흥분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세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세계적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세계적인 그리스도인은 온 천하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 중심의 교회를 이루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20절입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매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여기의 전파하니는 원어로 유앙겔리조메노이 입니다. 구브로와 구레네 여러 사람들은 유대 동족에게만 아니라 이방인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헬라인에 대한 복음전파는 전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자들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큰 변화를 의미하였습니다. 당시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은 선교하는 교회로 나타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공적인 전도, 사마리아 교회의 놀라운 부흥, 안디옥 교회의 돋보이는 성장에 이르기까지 선교하는 교회로 활력이 넘치는 공동체였습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는 교회는 성도들이 함께 일어나 선교에 힘쓰는 교회입니다. 일치된 선교에 대한 열정이 교회의 생명력이 되는 것입니다. 선교하는 교회만이 세상의 죄악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갈 수 있습니다.
 

둘째로 교육에 힘쓰는 교회이기에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 (Yohanan ben Zakkai)는 유다 민족이 위기에 처하였을 때 활약한 인물입니다. 기원 후 70년 로마가 유다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 요하난은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로마의 장군과 협상을 하고자 했습니다. 밤 중에 장례행렬로 가장하고 예루살렘을 빠져나갔습니다. 로마 장군 앞에 이른 요하난은 관에서 나와 황제의 예를 갖추며 인사를 하였습니다. 깜짝 놀란 장군이 당신이 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요?” 라고 물었을 때 요하난이 대답합니다. “야분네라는 마을에 토라를 가르치는 학교가 있는데 그 학교만은 파괴하지 말아 주십시오.” 요하난의 말을 들은 장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명령을 내렸습니다. “야분네 마을의 토라 학교는 절대로 파괴하지 말고 그 안에 있는 선생들도 해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요하난은 토라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던 교사였습니다. 민족의 주체성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문화를 가르쳤습니다. 요하난은 말합니다. “죽어 가는 민족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교육이다. 교육이 살아있는 한 그 민족은 죽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요하난의 업적을 훌륭하게 평가하여 후손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이렇듯이 교육은 중요합니다. 특히 주의 손이 함께 하는 교회가 되려면 가르치는 교육에 힘을 다해야 합니다.

본문 26절입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여기의 가르쳤고 디닥사이입니다. 초대 교회는 성전에서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가르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나바도 사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큰 무리들을 가르쳤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성숙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 부활, 승천, 보혜사 성령의 보냄, 현재의 일과 장래 일어날 일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을 가르친 것입니다.

교육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향을 설정해줍니다. 이러한 교육의 결과로 안디옥 교회는 본이 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성장 위주에서 교육 위주의 교회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 받았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숙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 선교의 전초기지가 되었습니다. 지속적인 교육이 얼마나 위대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손이 함께하는 교회가 되려면 무엇보다 교육에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봉사에 힘쓰는 교회이기에

북아프리카에 한 성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소문을 들을 로마의 사제가 그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 성자가 한낱 거리의 구두 수선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실망했습니다. 사제는 그에게 당신은 어떻게 성자가 되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침묵 속에서 일에 열중하고 있던 그는 방문자가 다시 다그쳐 묻자 대답하기를 내가 어떻게 성자가 되었는지 나도 잘 모릅니다. 다만 사람들이 헌 구두를 맡길 때 나는 우리의 주님의 신을 깁고 있다는 마음으로 일해 왔을 뿐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본문 29절입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여기의 부조를 보내고 디아코니안 펨프사이인데 형제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주는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흉년의 때에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를 도운 것입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여건이 되는 대로 부조를 보낼 것을 작정하였습니다. 한 믿음 안에서 형제들의 필요를 지나치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바른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오로지 선한 봉사를 일삼았습니다. 묵묵히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무릇 봉사는 큰 일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일을 통해서도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형제와 고통을 나누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습을 봉사로 입증하여야 합니다. 봉사에 힘쓰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봉사에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불러 모으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목적을 가지고 사람들을 불러 모은 곳입니다. 모여야 말씀을 통하여 힘을 얻고 교제를 통하여 힘을 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모이는 까닭은 모여 있으려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기 위함입니다. 함께 모이고 세상으로 흩어지는 상호작용이 교회를 교회답게 하고 힘이 있게 만듭니다. 교회는 모이지 않으면 흩어질 힘이 없으며 흩어지지 않으면 모일 가치가 없습니다. 현대 교회가 세상에서 온갖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무기력하게 되었습니까? 교회가 능력을 상실하고, 교인들이 거룩한 모습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모이기를 게을리하고 예배를 소홀하므로 성도들이 거룩하지 못하고 힘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로서의 모습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뿌리의 작가 알렉스 헤일리(Alex Haley)는 책의 말미에서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고 말하였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위대한 기록으로 남기려면 패자가 아닌 승자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지옥의 권세가 넘보지 못하는 승리가 보장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역사의 모진 풍파 가운데 국가도 군대도 도시들도 소멸했지만 홀로 교회만은 멸망하지 않고 남아 있었습니다. 이 놀라운 힘의 바탕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교회가 간직한 고유의 기능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1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려면 교회의 기능을 먼저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오로지 선교에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육에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봉사에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의 손이 함께하는 교회로 바르게 세워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