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과 기다림
(누가복음 2:22-33)
설교 : 문성욱 목사
기다림은 우리에게 소망을 갖게 합니다. 기다림은 또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어렸을 때 설날이 다가오면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고 좋았습니까? 설날 당일보다 설날을 기다리는 1주일 전이 더 좋았습니다. 그래서 설날에 입을 옷을 매만지며 손꼽다 기다리던 기억들이 생각납니다. 그것이 기다림의 즐거움이 즐거움이고 행복입니다. 결혼하는 젊은이들은 결혼 당일보다 결혼 날을 받아놓고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이 더 행복하고 좋을 것입니다. 금식도 일주일 동안 금식할 때는 먹고 싶은 생각이 절절이 느껴지지만 막상 금식을 끝나고 음식을 보면 또 별 것도 아닙니다. 그때 느끼는 심정은 이것 때문에 그렇게 안달했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기다림, 이것은 참 행복의 원천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므온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밤낮 기도하면서 메시야의 오실 것을 고대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결예식을 받기 위해서 성전에 온 어린 예수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며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또 36절 이하에는 안나라는 분은 남편과 7년을 살고, 사별하여 84세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면서 섬기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정결예식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주님 앞에 나아와서 감사하고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어떻게 오랜 세월 동안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임이라”는 약속 때문입니다. 이 약속은 장차 이 땅에 메시야가 탄생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약속이 있는 사람은 기다리는 행복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황량한 들판을 걸으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날마다 황량한 들판을 바라보면서도 꿈을 꾸며 살았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혀 기약 없는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지난날에 보여주셨던 꿈들을 생각하며 그 꿈이 언젠가 현실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약속이 있는 사람의 행복함입니다.
기다림은 때때로 주어지는 고난을 기쁘게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고난을 기쁨으로 소화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당시의 고난을 잘 이겨냈고 그 고난 속에서도 자존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지배를 받고 살았지만 오히려 로마인을 우습게 바라볼 수 있는 자존심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약속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같이 힘이 있고 용기가 있고 행복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약속이 주어져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고 행복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약속이 없는 사람입니다. 약속이 없는 사람은 현실에 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약속이 있는 사람들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며 유대인의 자존심을 지키며 메시야가 오실 날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고대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가 탄생하리라는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기다리던 메시야인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천군천사들이 합창소리가 있었고,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고, 멀리서 동방박사들이 찾아왔고,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찾아 왔습니다. 얼마나 요란했으면 그 멀리서 사람들이 다 찾아왔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조용했습니다. 아무 소리도, 징조도, 꿈도 없었습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요란하고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요란한 징조가 있었어도 그 소리들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소리만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약속이 없는 사람이 불행한 것입니다. 약속이 없으니까 기다림도 없는 것입니다.
약속을 바라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시므온과 안나의 모습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첫째, 시몬과 안나는 예수님을 ‘믿음과 소망 중’ 기다렸습니다.
두 사람이 바라본 당시 시대 모습을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야로 금식하며 탄식의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들의 나이를 보더라도 희망을 노래하기 보다는 포기에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합니다. 당시 시대상황을 보더라도 사두개파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로마 권력층에 붙어 살고, 바리새파는 자신들만 경건하다고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했습니다. 에세네파는 이것저것 보기 싫다며 은둔생활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역사적으로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간 소망의 메시지는 들려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소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망이란 무엇입니까? 불행이라는 터널을 지날 때 터널 끝에 비추이는 빛과 같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두려울 때 이길 수 있는 용기도 되기도 하고, 현실을 포기하고 싶을 때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등을 떠밀어주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은 27년간 감옥에 있을 때, 아이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딸의 요청에 이름을 ‘Hope’ 곧, 소망이라고 지었습니다. 그가 석방되던 날 그는 참 자유자의 표정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어서도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용서할 수 있는 평화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서 소망이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삶의 현장을 보십시오. 개인적으로 봤을 때 경제적인 소망도, 다시 일어날 건강의 소망도 없었습니다. 민족 분단의 상황 속에서도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손바닥에 새겼다고 담대하게 외치며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 안에서 노래해야 합니다.
대림절은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 소망을 다시 찾는 시간입니다. 소망을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 앞에 두십시오. 어둠도 내 환경도 보지 마십시오. 나 자신을 보지 마십시오.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간다면 우리 삶은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둘째, 안나와 시몬은 언제든지 메시야를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며 살았습니다.
그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를 메시야인줄 알아본 사람은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가 올 것을 알고 있었고, 오시면 맞이하리라 생각하며 수동적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기다림’이란 단어의 모양은 수동형입니다. 오면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기다린 기다림은 수동형이 아닌 능동형입니다. 메시야가 오실 것을 능동적으로 준비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시므온과 안나가 메시야를 기다렸기 때문에 경건하고 진실하게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 삶도 경건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진정 주님을 만나기 원하십니까? 아름다운 만남을 위하여 오늘 우리 삶을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인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 시간과 물질, 건강을 바로 사용하고 있는지,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돌아보셔야 합니다. 그것이 다시 오실 주님을 적극적인 기다림입니다.
셋째, 시므온과 안나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감사와 증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구원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였습니다.
백 년 가까이 살아온 시몬의 눈에 비친 세상은 절망과 상처, 위로받지 못함과 괴로움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므온이 소망을 잃지 않고 메시야를 기다렸던 어느 날, 이제야 주의 구원을 보았노라고, 어둠 가운데 빛이 되시는 주님을 보았노라고 외치는 감격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또 안나는 얼마나 감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나이 많아 주님을 만난 안나의 감격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감격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감격을 갖고 계십니까? 아무리도 보아도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나를, 버려져 아무도 돌보지 않는 나를 찾아오신 주님, 조건도 이유도 없이 찾아오시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까지 사랑하셨던 그 사랑의 하나님을 만났다면 우리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경배 드리며 우리 입술을 다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탄의 계절,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내가 찾은 복음의 소식을 증거하는 것이 진실로 구원을 맛 본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본질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감사와 증인으로서 삶은 어렵고 복잡하지 않습니다. 낙담과 탄식의 자리에서 일어서십시오. 내 인생을 찾아와 구원하고 인도하실 그 주님의 이름을 딛고 일어나십시오. 절망과 낙담을 중단하십시오. 내게도 빛과 소망이 되어주실 주님의 손을 붙잡고, 여러분을 둘러싼 그 어둠을 뚫고 나가십시오. 바로 그것이 주를 증거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고난당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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