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돌
(전도서 1:1-7) 설교 : 문성욱 목사 인간이 사는 곳에는 어디나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기념될 만한 것이 있을 때에 기념비를 세웁니다. 천안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헌신했던 많은 사람들의 업적을 기르기 위해 독립기념관이 세워져 있고, 부산 동래구 안락동에는 충렬사가 있습니다. 왜적이 바다를 건너 침략해왔던 1592년 음력 4월 13일 부산지방의 성주와 백성들은 일치단결하여 최후의 순간까지 그 성과 운명을 같이 하였습니다. 동래부사 송상현과 부산첨사 정발, 다대첨사 윤홍신을 비롯한 백성들은 적을 맞아 용전분투 끝에 전사하여 대의 앞엔 개인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하였던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념관이나 기념비들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단체의 업적이나 공적을 기르기 위해 세워져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호수아서 4장에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를 자손대대로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광야생활을 모두 마친 여호수아와 백성들 앞에는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요단강’이라는 장애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요단강을 건너라’는 명령하셨고,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백성들 앞에서 요단강물에 발을 내 디뎠습니다. 이때는 요단강의 강수량이 최고 수위를 기록하는 니산월(3,4월)이었습니다. 왜 이때를 정하였을까요?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더욱 강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마침내 광야 40년의 고달픈 여정을 마감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이토록 감격적인 사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과 도우심의 사건을 당대 뿐만 아니라 후대에 계속적으로 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에서 돌 12개를 가져다가 요단강을 건넌 뒤 처음으로 유숙하게 되는 길갈에 그 열두 개의 돌을 세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후손들이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요단강을 건넜고,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영원토록 그들의 후손들도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2개의 돌을 ‘요단강 가운데서’ 가져오도록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은혜와 기적의 현장,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의 현장이 요단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만히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면서 기념비를 두 곳에 세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서 있을 때 요단강 물이 마르므로 강바닥에 있는 돌 열둘을 취해서 보관해 뒀다가 요단강 건너 최초로 도착했던 길갈에 세운 기념비이고, 다른 하나는 제사장들이 서 있던 요단강 가운데서 돌 열둘을 취해 세웠던 기념비입니다. 그런데 두 개의 기념비는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지만 요단강 가운데 있던 열두 개의 돌 기념비는 현재적인 의미가 가미된 기념비라면, 길갈에 세워졌던 기념비는 미래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기념비입니다. 흐르던 물이 멈춘 마른 요단강에 돌 열두를 취하여 기념비를 쌓았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요단강을 다 건너고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올라올 때 멈췄던 요단강 물이 다시 흘렀기 때문에 바닥에 쌓아두었던 기념비는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단강을 건너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던 사람들은 돌 기념비가 세워졌던 요단강 바닥이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 현장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곳이 바로 여기다’라고 기억할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 내가 서 있는 삶의 자리가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정한 곳에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섬기는 교회, 내가 섬기는 가정, 내가 섬기는 직장, 내가 살아가는 현장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 신앙이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과거만 강조합니다. 우리의 현재 신앙이 올바를 때 우리 미래도 확실하고, 우리의 부끄러웠던 과거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에 만족하지 못하고, 때때로 불평하던 이 장소, 이 가정, 이 직장이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장소였는데 깨닫지 못하고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철부지였었다.”고 후회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현장성, 신앙의 현재성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현재성이 강조되어져야 합니다. 현재성이 강조된다는 것은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확실한 신전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확실한 신전의식이 없는 사람은 불확실성 때문에 그의 영원한 미래가 없습니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섰던 요단 가운데의 열두 개의 돌은 요단강을 직접 건너왔던 체험자들에게 주어진 기념비라고 한다면, 길갈에 세워진 기념비는 미래의 세대들을 위해 세워진 기념비입니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미래요, 천국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오늘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야 되는 이유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즐거운 그 시간에도 교회에 앉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들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바보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현재로서 끝나는 삶이 아니라, 영원한 미래가 보장되어진 현재의 삶입니다. 길갈에 세웠던 열두 개의 돌 기념비는 바로 그들이 현재 그곳에 기념비를 세우지만, 이스라엘의 미래를 위해 영원토록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그곳에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교육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증명들이었습니다. 기념비는 언제 세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째 달 십일, 요단강을 건너 길갈 땅에 도착하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요단강에서 가져온 12개의 돌로 바로 그곳에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즉시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는 지체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잘되면, 후에 사업이 잘되면, 진학을 한 후에, 이번 일만 잘되면... 감사해야겠다.” 아닙니다. 지금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감사해야 합니다. 왜 기념비를 세우라고 하셨습니까? 요단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 하나님을 영원토록 경외케 하기 위해서 돌 기념비를 세우라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시편 128편 말씀처럼, 형통의 복, 결실과 기름이 넘치는 복, 평강의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손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경외하며 복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페르시아의 한 임금이 시골을 가다가 총명하고 마음이 맑은 한 목동을 만났습니다. 임금이 그 목동을 불러 나라의 일을 맡겼더니, 이 목동은 공정하고 깨끗하게 나라 일을 잘 처리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그를 조사해보니, 그가 밤마다 어떤 방으로 들어가서 커다란 박스를 열어 보고 있다고 닫는 것을 보고 엄청나게 많은 보물을 감추어 놓았을 것이라며 임금께 고발했습니다. 임금이 그 곳에 가보니 정말 커다란 박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스를 열어보니, 그가 목동 시절에 불던 피리와 그 때의 낡은 옷들만 들어 있었습니다. 임금이 이유를 묻자, 그 목동이 대답하기를 “나는 목동일 때 참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임금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행여나 그 은혜를 잊을까 싶어서 매일 이것을 들여다 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단을 건넘에 하나님을 빼놓고 설명이 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하나님을 빼놓고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기념비를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정말 기념비가 무엇입니까? 이미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기념비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빼놓고는 우리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특별히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께서는 세례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씻음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표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기념비와 같습니다. 오늘 세례를 받는 성도들이나, 이미 세례를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기적과 은혜를 가슴판에 새기고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죄씻음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념비와 같은 세례식을 통해 다시 한 번 결단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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