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문성욱목사

부활의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마태복음 28:1-10)

부활의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마태복음 28:1-10)

설교 : 문성욱 목사

거짓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다 드러납니다. 요즘 나라를 술렁거리게 만들고 있는 가수 서태지와 배우 이지아의 이혼관련 소송사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잠시 동안은 속일 수 있지만 한 세대를 넘지 못하고, 아무리 길어도 1백년을 가지 못합니다. 막스 레닌의 공산주의 철학 및 경제학은 인류를 가난과 불공정한 분배에서 해방시켜 지상낙원을 만든다고 하여, 소련은 국력을 기울여 선전하고 전파하며 노력했지만, 70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거짓이 만천하에 폭로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진리 위에 터를 두고 전파된 복음은 2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10억이 넘는 인유가 믿고 세계사를 바꿔 놓고 전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마친 사실은 이것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증명된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순교를 당하면서까지 예수님의 부활을 외쳤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부활의 증거를 허물어뜨리기 위한 수많은 도전이 있었지만 성경의 증언은 결코 허물어지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교회역사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배를 드릴 때, 사도들의 설교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부활을 믿고 체험하고 모이니 그들의 모임에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임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의 예배와 성경공부에도 감격이 있습니까? 기도하거나 봉사를 할 때에도 감격이 있습니까? 문제는 우리에게 진정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지 사흘째 되는,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발라 드리려고 무덤에 가 보니 돌을 굴러가고 무덤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사에게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제자들에게 먼저 갈릴리로 가라”는 말을 듣고 박찬 감격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바라보고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가 믿고 사랑한 주님이다. 무서워 말라.”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라는 사명까지 주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 여인들은 더 감격하여 달렸습니다. 숨이 차는지도 모르고, 넘어지고 엎어지고 신발이 벗겨짐에도 개의치 않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기쁨과 감격에 사로잡힌 채 그들은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그들에게 주님이 부활을 전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들은 제자들이 무덤에 달려갔더니 그곳에는 주님의 시체는 없고 단지 빈 무덤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빈 무덤으로 증거가 되고 주님이 입으셨던 그 수의가 그대로 개켜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고, 고난을 이기고, 주님을 위해 땀을 흘리고 수고합니까? 부활의 영광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확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이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목격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 보이셨고, 또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던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 다음 고향 갈릴리로 내려가 다시 고기를 잡고 있던 베드로에게 나타나셨고, 감람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오백여 명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그 이후에 야고보에게도 다시 나타나셨고,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사울이 변화되어 위대한 하나님의 종 바울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람이 조작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실제적으로 증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체험한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사망을 이기고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된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기독교는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알고 나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보거나 알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지식에 불과합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안 보았는데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까 믿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많은 기사와 이적을 보고 놀라운 체험을 하면, 더 잘 믿고 신앙이 성숙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 1세대는 그 누구보다 수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보았습니다. 10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것도 보았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의심해서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고 방황하다가 광야에서 다 죽고,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내가 꼭 눈으로 보아야 하고, 꼭 손으로 만져 보아야 믿을 수 있을까요? 사도들의 증거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의 경험으로 삼을 때에 믿음의 사람이 되고, 그 믿음의 결과로 실상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표정이 다르고 말이 다릅니다. 생활이 다릅니다. 그들은 용솟음치는 힘, 기쁨과 활력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에 오래 나왔고 점잖게 앉아 예배드리고, 교회 풍습에 익숙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감격이 없는 사람은 근심, 걱정이 얼굴에 나타납니다. 두려움에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 사람의 말에는 확신이 없고 다른 사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감격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 유진 오닐이 쓴 “나사로는 웃는다”라는 희곡 >

유진 오닐은 이 희곡에서 나사로가 죽은 후 4일 동안 낙원의 영광을 보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는 내용을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낙원에 갔다 온 나사로의 가치관과 인생관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그의 변한 모습은 먼저 돈을 보는 태도에서 나타났습니다. 전에는 돈 많은 부자를 보면 무척 부러워했는데, 이제는 먹고 사는데 부족함이 없으면 만족하고 감사했습니다. 오히려 치사한 돈에 대해서는 경멸하는 미소를 보내며 살았습니다.

낙원에 갔다 온 그의 두 번째 변화는, 세상 권세자를 보는 태도였습니다. 로마 황제의 장엄한 행차를 보면서도 담담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천년만년 권세를 누리고 살 것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황제를 보고 비웃었습니다.

나사로의 세 번째 변화는, 죽음을 만났을 때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그는 신앙 때문에 황제 앞에 끌려갔지만 아주 평안한 얼굴을 하며 황제를 향해 웃음을 지으며 죽음을 여유 있게 받아드렸습니다.

결국 나사로는 사람들이 바라는 돈과 권력, 그리고 두려워하는 죽음의 문제를 모두 웃음으로 넘겨버렸습니다. 무엇이 나사로를 그렇게 만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부활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 가는 영광스러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만들어 낸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로부터 ‘부활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는 변수가 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활은 우리 신앙의 기초요, 시작이요, 결론이요 모든 것이 됩니다. 과거 신앙의 위대한 인물들을 보면 하나같이 부활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믿음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은 물론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부활의 감격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의 감격으로 그들은 진정한 예배를 드렸고, 먼 길을 단숨에 달려가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했고, 함께 모여 기도하며 교회를 섬겼습니다. 부활의 감격으로 닥쳤던 핍박과 환난도 이겨냈습니다. 결국 이 여인들의 삶을 변화시킨 것은 바로 그 부활의 감격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이 부활의 감격입니다. 이 감격을 가지고 예배드리고, 이 감격을 가지고 구역이 모이고, 이 감격을 가지고 성경공부도 하고 기도도 해야 합니다. 이 감격이 없으면 우리들의 모임과 신앙생활은 헛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어려움을 극복할 힘이 없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이러한 감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과 체험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에 눈물을 흘리고 다시 살리심에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그런 감격이 있는데, 우리에게는 약합니까? 물론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사실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느냐 보다 그것이 사실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망권세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부활의 감격을 가지고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