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믿는 사람
(창세기 17:15-22)
설교 : 문성욱 목사
우리 인생은 약속입니다. 약속은 지켜질 때에는 복이지만, 안 지켜질 때에는 화가 됩니다. 예를 들어 신호등의 약속은 길을 건널 때에나 자동차를 타고 갈 때에도 신호등의 약속을 지키면 안전하지만 내 생각대로 어기면 서로간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약속을 지키고 약속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한 심리학자가 울타리 있는 운동장과 울타리 없는 운동장에서 아이들을 놀게 했습니다. 그런데 울타리가 없는 운동장에서는 운동장 중앙에서만 노는 반면에 울타리가 있는 운동장에서는 전체 운동장을 다 쓰면서 노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교훈해 줍니까? 울타리가 있어야 사람의 폭이 넓어지고 오히려 더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 사회의 약속은 이 울타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약속을 지켜야 우리에게는 더욱 폭넓은 자유와 기쁨이 주어지게 됩니다.
결혼은 잘 살아보자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결혼해서 남편과 아내가 사로 권리와 의무만 찾고 그것을 강요하면 힘이 듭니다. 그런데도 내 권리를 찾기보다 의무를 다하는 이유는 “내가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안 돼도 장래엔 될 것이다.”는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결혼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은혜 주실 것을 더욱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약속이 지켜지면 행복해집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의무를 감당하지 않고, 권리만 주장하면 원망불평과 갈등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부모 자식 사이에도 부모는 자식을 위해 살고 자식도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는 약속이 지켜져야 합니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리만 찾으면 원망, 불평, 데모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의무만 강요하면 고역이 되지만 “네가 잘하면 나도”,“내가 잘하면 너도”라는 약속을 가져야 합니다.
약속이란 말 속에는 상대에 대한 믿음과 장래에 대한 소망이 있고, 어떤 일을 할 것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과 삶이 있습니다. 약속을 잘 지키면 복이 된다는 말은 믿음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행동에 대해서 허송세월이 아닌 그것에 대한 결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지킬 때에는 여리고 성도 무너뜨리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는 작은 아이성에서도 실패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영원한 안전망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을 약속하셨습니다. 믿고 줄기차게 전진하면 분명히 그 땅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작은 어려움이 있어도 견디지 못하고 애굽을 생각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살다보면 길이 막히고 탄식이 나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우리와의 약속을 버리신 적이 없다는 기억을 되살려야 합니다. 성경은 수많은 하나님의 약속들로 가득한 약속문서입니다. 그러므로 그 약속을 신뢰할 때 우리에게 평안이 있고, 평안히 신뢰할 때 응답이 있습니다.
그 원리는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주님! 그래도 주님의 약속을 믿습니다.”라고 나갈 때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기쁘게 보시고 그에게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약속이 많이 주어졌어도 그 약속을 믿는 자에게만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약속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고, 나에게 제안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따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왜 찾아오셨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도 아브라함이 응답하지 않았던 13년의 공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 좋은 아브라함도 이스마엘을 얻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이 없는 13년의 공백이 있었습니다. 혹시 우리는 13년의 공백의 시간을 살고 있지 않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1절)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섭섭하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다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첫 번째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어려운 나라의 형편을 보면서 “돌 벌자, 일하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자. 하나님을 힘써 알자”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은혜를 주실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후손 대대로 복을 준다고 했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것이지, 번성이 목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하시겠다고 할 때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로 족하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삭’은 웃음입니다. 하나님이 웃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자랑할 것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입니다. 누가 내게 “어떻게 그렇게 잘됐습니까?”라고 물을 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너무나 이스마엘을 자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 되었을 때 오히려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자랑이나 하고 내가 최고로 잘났다고 합니다. 자녀들이 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빠지면 안됩니다. 지금 자녀가 어렵지만 하나님이 웃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신 일을 자랑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관점은 “내가 했다. 이제 됐다”였지만 하나님의 관점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하신 일을 드러낼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십니다.
두 번째로, 오늘 성경은 “네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돈이나 직장이나 배경을 가지고 완전함을 이야기합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주님이 원하시는 완전은 ‘행동의 완전’입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한 사람은 예수님을 배반했고, 한 사람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모두 다 똑같이 죄를 지었지만 차이는 죄를 짓고 난 후 가룟 유다는 책임을 지고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그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부족함을 내놓고 전능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하지만 내 행동이 하나님 앞에 완전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응해주십니다. 주님은 “네 행동이 어떠하냐? 네 행동이 내 앞에서 완전하냐?” 물으실 때, 우리는 핑계를 대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지금 내 행동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완전한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사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우리들의 책임에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내 행동이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계획은 번성함이고 대대로 내가 하지 못한 일들을 내 후손들이 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완전한가를 묻고 계십니다.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 완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은 두 가지 부탁을 하십니다.
첫째, 새로운 이름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행동의 믿음은 새 이름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시간부터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 부르십니다. 아브람과 아브라함, 사래와 사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아브람은 한 사람, 이스마엘의 아버지이지만 아브라함은 “여러 나라의, 많은 후손들의 아버지”이고 사라도 한 사람의 어머니가 아니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이미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 번성의 복을 주십니다.
두 번째로, 할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할례는 끊어낸다는 것입니다. 남자 생식기의 표피를 자르는 것인데, 쉽게 이야기하면 포경수술하는 것입니다. 이 할례를 통해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식을 나타내는데, 하늘의 별들을 통해서 수많은 후손들을 보게 하시고 생식기의 주인이 되신다’는 약속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골리앗은 거인이고 힘센 장수였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이기신다는 믿음을 갖고 나가 싸울 때에 할례 받은 백성이 이길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나가 싸울 때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약속하신, “내가 전능한 하나님이 되어 너를 번성케 하고, 대대 후손에 네 하나님이 되리라.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영적황무지 13년을 지내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 앞에 나와 엎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실 줄로 믿습니다. 새로운 이름을 받고, 할례 받은 고통을 책임으로 감당하며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로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그 믿음이 위대한 생애를 만드는 것입니다. 비록 환경이 어렵고 힘들어도, 위협하는 세력이 있어도, 몸이 약해 쓰러진 사람들도, 경제적으로 파산한 사람들, 가족을 잃고 슬픔에 젖은 사람들, 어려움을 당하여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승리할 것입니다.
약속을 믿는 믿음보다 더 큰 힘은 세상에 없습니다. 주님은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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