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429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본문은 1장부터 7장까지 이어지는 구약 5대 제사법 가운데 각 제사시 제사장의 직무와 몫을 중심한 제사법 규례를 다루고 있는 구절입니다. 감사함으로 드릴 때의 화목제 규례, 화목 제사 후의 공동 식사에 관한 규례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11-12) 여호와께 드릴 화목제물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만일 그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려면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제물과 함께 드리고
화목제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화목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점을 시사해 줍니다. 화목은 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화목은 희생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바로 이런 원리 때문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드리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가끔 우리가 이해하는 복음은 희생 없는 용서 또는 대가 없는 용서로 복음을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오해하겠습니까? 인간이 받은 용서와 배려의 대가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희생의 대가의 크기를 정확히 그리고 완벽히 이해하는 인간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과 동일하게 살 수 없습니다. 단지, 부족하지만, 예수님처럼 살아가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도 이처럼 대가가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도 반드시 희생이 요구됩니다. 대가 없는 용서와 화목은 없습니다. 자녀를 두신 부모님들도 양육을 할 때 왜 훈계를 하며, 징계를 하고 용서하십니까? 잘못 또는 죄를 돌이키게 인도해서 용서의 크나큰 감격과 잘못 함과 죄의 무서움을 알려주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의 일상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기 잘못을 인격적으로 알고 뉘우치고 깨닫는 교정과 성화의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은 값질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화목함이 가져다주는 진정한 기쁨은 모를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하나님께 감사하므로 화목제 희생을 드릴 때는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 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감사 희생과 함께 드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서 감사하므로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여러 가지 은혜를 감사해서 드리는 감사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런 감사의 화목제가 끝난 후에는 제물 중에서 제사장의 몫을 제외한 나머지로 제사를 드린 사람 뿐만 아니라 친지를 비롯한 이웃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혼자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혼자만 잘 먹고 잘살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그것의 소유자, 권력자, 계급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 단지 그 은혜를 나눌 청지기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기에, 현재 내가 가진 권력, 계급, 서열들이 있다면 복음적으로 지혜롭게 쓰시기 부탁 드립니다. 삶의 예배가 없이, 예배 속의 예배만 드리면 우리의 주인은 반드시 결산의 날 물으실 겁니다. ‘내 것으로 너는 무엇을 했냐’고 말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까지 청지기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복된 교우님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3-14) 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제물과 함께 그 예물로 드리되 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지니라
13절을 보면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 희생과 함께 예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은 언뜻 이해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성경에서 죄악과 부패를 상징하는 누룩을 넣은 유교병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처럼 유독 감사의 화목제에서만은 유교병을 희생과 함께 예물로 드리라고 명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크면 클수록 좋음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누룩은 성경에서 죄와 부패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음식물을 부풀리는 특징 때문에 확장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감사 화목제에 유교병을 함께 드리라고 한 것은 풍성한 감사를 드려야 함을 말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현실의 어려움과 고단함으로 주님 앞에 감사를 잃어버린 교우님 계시다면, 주님 앞에 감사가 회복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4절을 보면 감사의 화목제를 드릴 때 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하나님께 거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화목제 예물을 제사장이 하나하나 일일이 들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많은 예물을 일일이 하나씩 들고 감사를 드리는 것은 매우 귀찮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니 제단 위에 있는 예물을 한꺼번에 놓고 감사를 드리면 더욱더 효율적이고 편리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굳이 이렇게 명하신 것은 특별한 뜻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부른 찬송가 429장은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찬송가입니다. 그 받은 복을 세어 볼 때,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라고 이어 나옵니다. 죄의 습성을 가진 우리 모두는 불평,불만,원망 등을 세어볼 때가 많지만, 은혜 가운데 주님께서 주신 복들을 우리의 인생에서 잘 살펴보며 감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5-18)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그러나 그의 예물의 제물이 서원이나 자원하는 것이면 그 제물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그 제물의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만일 그 화목제물의 고기를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되지 못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죄를 짊어지리라
15절에 보면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그 날에 먹고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원제나 자원제 희생고기는 이튿날에도 먹을 수 있는데 비해 감사제 희생 고기는 먹을 수 있는 기간이 하루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명령은 감사제의 희생을 나눌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여러 사람과 나누어 먹으라는 명령이며, 특별히 가난한 자들을 염두에 둔 명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의 인생에 나만을 위해 쓰고 있는 감사제는 없는지 생각해 보십시다. 나누라고 주신 나의 인생의 여러 가지 혜택들을 혹시 나만을 위해 지속적으로 쓰려고 묶어놓고 숨겨둔 것은 없는지 생각해 보길 기도합니다. 16절에 나오는 서원제와 자원제는 화목제와 달리 하루 더 먹을 수 있도록 하나님은 허락하셨습니다. 사실,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기간에 대한 정확한 근거는 주석서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온도 차이가 심한 광야에서 고기를 보관하는 것은 사실상 냉장고가 없는 시대에 불가능했을 것 같다는 상황적, 시대적 추측은 가능하지만 정확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함을 생각해 보며 본 절을 묵상해 볼 때, 하나님께서는 썩은 음식 즉 부정한 음식을 먹을 만큼 그의 자녀들을 빈곤에 처하게 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날마다 풍족히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신뢰하길 바라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끔 우리의 일상에도 이런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찾아올 때 있습니다. 우리 개인이 볼 때는 잘못된 것이 없어 보이는 일들이 있습니다. 마치, 몇 일 지난 고기를 먹는 게 뭐가 잘못 된 일인가 하는 질문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이나 요청하신 일은 당장 이해 되지 않는 일들도 많습니다. 한경신문사에서 2020년 3월 9일 발행한 ‘유대인은 왜 전염병에 강한가’라는 칼럼은 오늘 읽은 말씀을 이해하는데 한 관점을 제시 할 수 있을 것 같아 잠시 소개 드리겠습니다. 그 칼럼의 주된 내용은 유대인들이 왜 역사적으로 이동이 많았고, 인구밀도가 높은 곳에 살았는데, 질병이 적었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흑사병도 감염률이 낮아 한동안 흑사병을 퍼뜨린 게 유대인이 아니냐는 헛소문이 돌았던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감염률이 낮은 이유는 결국 그들의 정결 의식이었다고 합니다. 식사 전 손 씻기 방법만 20여 가지에 이른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정결 의식을 배웠을 때는 귀찮고 성가신 일이었을 수도 있지만, 질병에서 보호될 때는 그 이유를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배우고 행하기에 귀찮고 버거운 일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일들이 오면 그 진가가 드러날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어려운 때 빛을 발하는 귀한 역사 있으시길 기도합니다.
(19-21) 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었으면 먹지 말고 불사를 것이라 그 고기는 깨끗한 자만 먹을 것이니 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 곧 사람의 부정이나 부정한 짐승이나 부정하고 가증한 무슨 물건을 만지고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도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19절을 보면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깨끗한 자만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부정한 자가 먹으면 곧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심각한 죄를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깨끗한 자만이 희생의 고기를 먹으면서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한 깨끗한 자라는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벽히 행하고 지킨 자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실수를 합니다. 완벽한 인간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죄 사함을 받은 자를 성경은 깨끗한 자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회개하며 자복하는 사람이 깨끗함을 입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에 임하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십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감을 입을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의 죄를 잠시 가리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그 피의 공로로 씻을 수 없는 우리의 죄가 가려지고 씻어지는 것입니다. 결코 쉽고 간단한 과정이라고 성경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너무 어렵고 힘든 과정이라고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보혈의 능력이 죄 씻는 유일한 길이라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21절은 부정한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제물을 먹는 자들에게는 더 가혹한 처벌이 주어진다고 증거합니다. 이렇게 강한 경고를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함부로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때론 신앙생활에서 찾아오는 익숙함과 반복은 우리가 죄에 쉽게 빠지게 합니다. 한없이 내려지는 죄 사함의 은혜와 한없는 자비로 내려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맛보고 경험할 때, 이러한 은혜와 사랑 때문에 감격이 넘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이 정말 쉽게 용서받을 수 있어 대수롭지 않게 넘길 때가 많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정령 죽으리라 하셨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먹어버린 사건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법 중, 하지 말라고 하시며,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신 것이 아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주신 것이라는 점을 우리가 이 아침 깨달아야 할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은 화목제물을 어떻게 다뤄야 하며, 주님의 명령은 어떻게 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제사에 관한 규정들을 읽다 보면, 현대 시대를 살아가고, 편리와 합리를 찾는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고리타분하며, 이해가 가지 않는 요청들이 많아 보이는 구절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성경은 우리의 이해나 동의를 구하는 책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선포이며, 약속입니다. 노예를 다루듯이 억압적으로 강요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서열이 높은 존재가 아래를 깔보듯 하나님은 말씀을 따르라 우리에게 억압하지 않으셨습니다. 권력을 마구 휘두르듯이 인간에게 말씀을 따르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명 한 명 인격적으로 말씀에 순종 하도록 이끄십니다. 그 궁극적 모습으로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희생제물이 되셔서 우리와 오고 오는 세대의 구원자로 우리와 같은 낮은 자리로, 오셨습니다. 그 고귀하며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을 사도행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도행전 4: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는 끊임없이 인생에서 하나님의 대용품을 찾습니다. 심지어,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이 외에 다른 사람과 다른 것들로 공허하며 허무한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할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화목제물 되어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은 다른 어떤 대체물이 없음을 우리 인생이 알게 하시며,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인생의 갈증은 오직 주님의 희생으로 해갈됨을 새롭게 고백하는 복된 하루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유일하신 이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유교병의 역할처럼, 주님께서 이웃에게 최대한 나누길 원하시는 것들이 있는지 점검해 봅시다.
2. 제사 예물처럼 시간의 기한을 두시고 나에게 요청하신 행함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3.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예배에 주님이 요구하시며 원하시는 거룩함과 정결함을 준비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해 봅시다.
4. 그 당시에 이해 되지 않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행하여 큰 기쁨을 얻은 경험이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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