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새벽기도/로마서(새벽)

로마서 1:1-17

본문 로마서 1:1-17
찬송가 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로마서를 기록하게 된 배경
로마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끝내고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을 순회하던 주후 58년 경, 고린도에서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6장 23절에서, 로마교회에 문안하는 여러 성도의 이름 중에서도 고린도 시의 재무관 에라스도를 언급하여, 자신이 로마서를 기록했던 도시가 고린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 교회의 대표들과 예루살렘으로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기근에 시달리던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이방교회의 연보를 모아 로마의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면서도, 예루살렘에서의 일을 마친 이후에, 로마를 방문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먼저 로마서를 기록해서 보냈습니다. 일면식도 없었고, 한 번도 방문한 적 없던 로마교회에 편지를 보냈던 목적은 로마서 15장 22절부터 29절까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지중해 동쪽에서의 복음 전도를 마무리했다고 여긴 바울이 스페인으로 가고자 했고, 그 도움을 로마교회로부터 받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말했던 사도행전 19장 21절의 말씀처럼,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이동한 후, 로마에서 복음을 전한 이후를 이미 머리에 그려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로서는 일면식 없는 로마교회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진리가 로마교회 구성원들이 알고 있는 기독교 진리와 다르지 않음을,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보편적인 복음이라는 것을 알리고 설득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로마서에 복음의 핵심 진리들이 상세히 기록될 수 있었던 배경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끝으로, 하나님 앞에서 부름 받은 삶에 만족하고 살려고 했더라면 오늘의 로마서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데 있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그의 치열한 삶의 자세 덕분에, 달려가야 할 푯대를 늘 주시하며 변질되지 않으려고 열심을 내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복음의 진수를 읽고, 은혜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늘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찾아 행하려고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좋은 것을 줄 수 있습니다. 오늘 주어진 일만 피동적으로 행하는 존재가 아니라 늘 말씀으로,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변질되지 않으며, 복음의 진보를 위해 헌신하는 모든 교우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인삿말(1-7)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바울은 1절을 통해, 편지를 보내는 자신의 이름이 “바울”이라는 것을 밝히며, 자신의 정체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자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아 택하심을 받은 부름 받은 사도”임을 드러냅니다. 바울이 쓴 서신의 여러 인사를 살펴보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자 “사도”임을 동시에 밝히고 있는 곳은 로마서밖에 없습니다. 빌립보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만 표현하고,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전서는 “사도”라는 호칭만 사용합니다. 왜 바울은 로마서에만 이 두 호칭을 덧붙여서 사용하겠습니까?
지중해 세계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은 낯선 존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복음의 박해자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급변한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스토리가 여러 교회에 회자되었을 것이며, 로마교회로부터 건너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통해 분명 소문이 로마 교회에까지 전해졌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다른 배경에 대해 별다른설명이 없다는 것이, 이런 생각의 증거입니다.
“종”으로 번역된 둘로스는 노예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주인은 노예를 물건 취급하여 마음대로 처분할 수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의 종이냐에 따라 사회에서 받는 대접이 달랐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밝히며,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붙여졌던 “우리 주”라는 4절의 표현을 예수님께 붙임으로써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진정한 이 세상의 임금되심을 드러냈습니다.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신 예수의 종임을 드러낸 바울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목숨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신실하고 충성된 종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또 자신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부름받은 사도”로 소개합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자신을 택하시고, 자신을 불러주신 분이 하나님임을 강조합니다. “사도”의 헬라어는 ‘아포스톨로스’로 보냄을 받은 자, 곧 대사를 의미합니다.
바울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베냐민 지파 사람이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한 바리새인이고,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로마시민권자임을 드러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이니 자신이 로마시민권자임을 밝히며 친근감을 드러낼 수도 있었으리라 예상합니다.그러나 바울은 여느 서신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만 밝힙니다. 이는 겸양의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빛으로 임하신 주님을 만났던 경험 이후로, 바울은 철저히 자신의 뜻대로 인생을 살지 않았고, 온전히 주님의 뜻에 따라 복음을 전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바울의 자기 선언은 가장 온당하게 바울을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이었습니다.
바울이 부름받은 목적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통용되던 복음의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랐습니다. 그레코-로마 사회에서 국가적인 큰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거나 왕가에 경사가 났다는 소식만 복음, 유앙겔리온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신약을 쓴 주님의 제자들은 정치적인 이 용어에 세례를 주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구원 역사를 지칭하는 용어로 그 뜻을 바꿔 사용했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했듯이, 당시 세대의 언어 용례, 사회적 합의를 비틀어 하나님을 증거하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로마 황제와 관련된 것이 복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이 복음이다라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고, 자신의 삶의 목적을 인식하고 있으며, 세상의 질서를 따라 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우리 인생을 표현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기꺼이 시인하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말할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사회와의 소통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사회가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만인의 만인을 향한 투쟁을 일삼는 정글과 같고, 강자만 살아남는 곳이라면, 진실을 밝히 드러내고, 로마 황제가 우리의 주가 아니라 진정한 해방과 평화, 구원을 가져다주신 예수가 우리의 주님이다 고백하며, 오직 주님과 관련된 복된 소식이 복음이다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의 종이냐? 나는 무엇을 위해 부름받았느냐? 무엇이 복음이냐? 라는 싸움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로마서 1장1절에 나타나는 사도 바울의 자기 인식과 선포를 타산지석 삼아 나에게 질문한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진면목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실 것입니다.

(2-4)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복음은 혜성처럼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었고, 구약성경에서 미리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구약에 기록된 주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지속된 불경건과 불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끝내 외면하지 않으시고 수많은 적들로부터 신실하게 구원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끝내 그의 아들도 주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참 사람임과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으셨다는 대목에서, 참 하나님이심을 동시에 드러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는 표현에서, 원래 하나님이 아니셨는데, 하나님이 되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분명해졌다는 표현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실 때,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빌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바울은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사도”의 직분을 받았음을 드러내며, 모든 이방인들 가운데서 믿어 순종하게 만드는 역사를 가져오기 위해 일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예수님을 주로 믿게 되면, 우리는 회개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만약 순종의 삶이 없다면, 우리는 그의 믿음이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7장 20절에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말씀하신 바가 있지 않습니까? 믿음과 순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것이 바울을 사도로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자 오늘 우리가 주님의 품에 갈 때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삶의 대명제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빌립보서 2장 12절말씀이나,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는 갈라디아서 5장 5절말씀처럼 우리는 우리의 오늘을 통해 우리의 삶에 말씀에 대한 순종이 있는지를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로마교회에 대한 감사(8-15)
8절부터 15절은 로마교회에 대해 바울이 감사한 이유를 밝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로마교회 방문 목적과 이유를 밝힙니다.

(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는 점에 대해 감사합니다. 이런 인사는 초면에 서로의 낯을 세워주는 체면치레 같은 느낌은 아닙니다. 당시 로마는 인구 100백만 명이 넘는 거대 도시였고, 모든 면에서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는 중요도를 띈 도시였습니다. 당시 지중해 세계의 거점들을 찾아 다니며 복음을 전했던 바울로서는, 로마 교회가 든든히 서가고 있다는 것에 고무되었고, 당연히 감사할 수 있었다고 보입니다. 지중해 세계의 한 복판에 있었던 로마 교회를 통해 복음 전파가 한결 수월해지리라는 전망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어, 자신이 로마교회를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있었음을 밝힙니다. 이것이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라는 것을 9절에,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신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9절과 11절까지 밝히고 있듯이 늘 기도하며, 로마 교회를 방문하기 위해 늘 기회를 보았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바울의 전도여행 초기에 다방면으로 그를 지웠했던 것처럼, 스페인 전도를 로마교회가 지원해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바울의 목적은 단지 지원의 목적만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교회 성도들과 말씀으로 교제하여 그들을 믿음 위에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1-12)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2절에,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고 한다는 데서, 바울은 자신이 일방적으로 은혜를 주는 자라고 여기지 않고, 로마 교회더러 은혜를 받는 자라고 여기지도 않음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말씀 안에서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할 때에 서로간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며 서로가 안위함을 얻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기꺼이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이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분량이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을 만나게 하셨을 때는, 서로가 섬기며 좋은 모습으로 발전해 나가라는 뜻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분량에 그 사람이 이르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내가 받들어 이룰 수 있을까 고민하며 다가갈 수 있어야 합니다. 완전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음을 기억하고, 바울이 희망했던 성도의 교제가 오늘 우리 삶에 실현되기까지 나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16-17)
마지막으로 로마서 1장 16절, 17절은 로마서 전체의 중심 주제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이 부끄러워하지 않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복음 안에서 백정도 사람 대접받고, 손가락질 받던 세리도 구원 받을 수 있으며, 예전에는 약속 바깥에 있었던 헬라인을 비롯한 이방인들도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차별 없이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의 위대함입니다. 인종과 신분과 성의 경계를 넘어, 죄 아래에서 신음하는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실제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이 선포될 때, 그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 응답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 믿음을 갖게 되었을 때 어떤 반응이 일어났습니까?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이, 구원의 여망이 사라져버린 비탄에 빠진 우리에게 주어진 한 줄기 빛과 같은 복음이 주어졌습니다. 그 복음은 시장판에 어지러이 쌓여있는 값싼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복음을 들음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함과 동시에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기로 작정했었습니다. 이 믿음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지킬 수 있고, 나를 쳐서 복종시킬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마음에 품고, 오늘도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상 속에서, 또 믿음의 공동체 속에서 우리 스스로를 누구라고 규정하는지 되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과의 관계에서 종임과 사도임을 증언하며, 그 부르심을 따라 달음질하기를 쉬지 않았던 바울을 떠올리며, 오늘 우리가 서있는 곳과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 가늠해보는 시간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지난한 현실 속에서도 털고 일어나 힘찬 하루 시작하도록 인도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바울은 로마교회 앞에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합니까? (1)
2. 복음을 나의 말로 정리해서 한 문장으로 표현해 보십시오. (2-4)
3.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어떠해야 합니까? 나는 이런 교제를 누리고 있습니까? (11-12)
4.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바울의 진술을 나의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내가 생각하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16-17)

'새벽기도 > 로마서(새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3:19-31  (0) 2022.08.31
로마서 3:1-18  (0) 2022.08.31
로마서 2:17-29  (0) 2022.08.31
로마서 2:1-16  (0) 2022.08.31
로마서 1장 18-32절  (0) 2022.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