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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로마서(새벽)

로마서 1장 18-32절

로마서 1장 18-32절
찬송가 478장 ‘참 아름다워라’

멀리 전쟁터에서 달려온 전령이 전한 승전보에 온 국민이 환호와 함께 외친 ‘유앙겔리온(ευαγγελιον)’은 복음, 즉 기쁜 소식입니다. 한 연구소에게 코로나19에 대한 완벽한 백신을 개발했다면, 이는 전 세계 사람에게 복음입니다. 그런데 어떤 소식이냐에 따라, 또 대상에 따라 ‘Good News’가 될 수도, ‘Bad News’가 될 수 있습니다. 앞서 예에서 승전소식은 패전국에게는 나쁜 소식이며,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음에도 개발하지 못한 회사에게는 백신 개발 소식은 기쁜 뉴스일 수 없습니다. 이번 미국 대선의 개표 결과를 지켜보던 미국 언론들은 바이든 후보의 당선을 확실시하는 뉴스를 앞다퉈 보도했습니다. 이 뉴스는 바이든 후보와 지지자들에게는 복음이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지지자들에게는 복음이 아닌 나쁜 소식이었고, 접전지역 투표용지의 재개표를 요청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자처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받았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학문적 연구나 오랜 수양을 통해 깨달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다고 밝혔습니다(1). 하나님의 복음의 대상도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 모두를 포함한다고 합니다(16). 즉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 모두에게 기쁨이 되는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통상적인 유대교의 종교적 개념을 넘어서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다(16-17)고 선언합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바울은 오늘 본문인 18절에게 갑자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를 먼저 이야기 한 이유는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제대로 깨닫게 하기 위한 배려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제대로 깨닫는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전도하기 가장 어려운 대상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았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도덕, 윤리, 규범 등은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개념입니다. 시대나 지역,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식인종 문화에서 식인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이 활동했던 당시 근동지역은 헬레니즘 문화가 융성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집필한 고린도와 로마교인들이 살고 있는 로마는 헬레니즘, 즉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아 도시 곳곳에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의 경우만 해도 아크로코린트 산의 정상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곳의 예배는 성(sex)을 찬미하는데 바쳤습니다. 여신에게 바쳐진 여성 천명의 행렬과 의식은 남성 신도들을 성적으로 유혹했습니다. 얼마나 성적으로 문란했는지 바람둥이를 가리켜 ‘고린도인처럼 산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도시 안에는 로마인이 재건한 아폴로 신전이 있었습니다. 아폴로는 남성미의 이상을 구현한 신입니다. 신전 내부에는 관능적인 자세를 취한 아폴로 신의 나체 조상이 남성 예배자들을 자극해서 신의 미동(美童)들과 육체관계로 신앙심을 표현하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고린도는 동성연애의 도시였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는 상업, 물류의 허브 역할을 하는 도시였기에 물질적으로 풍족했습니다. 고린도가 이 정도였다면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는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갑니다. 물질주의가 만연하고, 성적으로 문란하고 온갖 우상을 섬기는 문화권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죄악된 삶인가를 깨닫게 하게 위해서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를 거론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하나님의 진노는 ‘불의로 진리는 막는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바울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행동’을 ‘경건하지 않은 것과 불의’라고 규정합니다. 진리를 가로막는 경건하지 않은 것, 즉 불의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19~25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반 고흐의 작품에는 고흐의 세계관이 그림 속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소설가의 작품에는 소설가의 세계관이 녹아있습니다. 작가마다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관을 갖고 있고 그것을 작품에 녹여 넣고, 독자들은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의 생각을 알게 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하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터치에 의해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과 우주는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천하만물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19-20)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오감을 있는 사람이라면 보거나 만지거나, 감각이나 냄새를 통해 사물을 인지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물을 보면서 압도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래 전에 안동하회마을을 방문했었습니다. 평일인데다 우중충한 쌀쌀한 날씨여서 그랬는지 방문객이 거의 없었습니다. 마을을 구경하면서 마을 중앙에 있는 골목을 돌아 들어섰는데 섬뜩했습니다. 골목 가운데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날씨도 을시년스러운데 나뭇잎은 거의 떨어진 거대한 나무의 모습에 가슴 한편이 서늘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수령이 600년 된 나무로 하회마을에서는 삼신당 신목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 주위에는 사람들이 소원을 쓴 하얀 종이들이 촘촘히 묶여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높이 15m, 둘레 5.4m의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서 소원을 비는 이유는 그 나무의 규모에 압도되어 마치 그것이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삼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물 속에 깃든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우주물리학을 전공하는 분들 중에는 우주를 연구하면 할수록 도저히 알 수 없는 우주의 신비 앞에서 인간의 사고나 지식의 한계를 깨닫고, 우주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지혜있다고 하지만 어리석기 그지없습니다(22). 그래서 한낮 나무에 불과한 느티나무의 규모에 압도되어 그 나무를 삼신으로 믿고, 그 앞에서 소원을 빌고 또 소원을 적은 종이를 꼽아놓습니다. 이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사람이라면 삶속에서 접하는 생물과 사물 그리고 자연계에 깃든 하나님의 영광을 누구나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썩어 없어질 피조물을 우상으로 섬기는 어리석은 우를 범했습니다. 그 결과 즉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다음과 같이 하늘로부터 나타났습니다.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진노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창세기의 애굽에서 있었던 각종 재앙이나 재해가 먼저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늘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가 ‘내버려둠’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 속에 내버려 두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치고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의 상대적 개념은 ‘영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더러움 속에서 뒹굴다가 한줌의 흙으로 사라져 버리는 인생으로 놔두시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가장 큰 진노이십니다.

26~32절은 영원을 소망하지도 못하고 티끌처럼 사라져버릴 어리석은 인생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26-27)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만물에 임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부인하고 피조물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면 종국에는 성적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성은 신성합니다. 성은 생명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신적인 거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을 사람의 쾌락을 위한 도구로만 여길 때, 성은 자신은 물론 상대방을 죽이는 독이 됩니다. 성적인 쾌락과 욕망을 추구하다보면 결국에는 동성애로 귀결됩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황제, 귀족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미동과 관계를 맺는 것을 당연시했습니다. 동성애를 당연시 여기고 있는 문화에 살고 있는 로마 교인들에게 바울은 “아니다! 동성애는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이다”라고 선포합니다. 이처럼 바울이 동성애에 대해 확고하게 선을 긋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27b)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그들은 이미 영원을 소망하지 못하는 이 땅에서 심판받아 죽은 목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에서 ‘실전신학’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과목을 들었는데, 사회적 문제에 대해 찬성팀과 반대팀으로 나누어 서로 토론하는 형식으로 수업을 했는데, 제가 속한 팀은 동성애에 대해 찬성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저는 그때 동성애를 옹호하는 신학 논문들을 처음 접했습니다. 제가 봤던 논문의 저자의 대부분 캐나다 종교학 교수들이었습니다. 그러데 저는 동성애를 옹호하는 논문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신학적으로도 동성애가 죄가 분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발표할 때는 동성애를 적극적으로 옹호했지만 말입니다. 신학적인 차원을 떠나 동성애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금한 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동성애는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라고 밝히고 있지 않습니까!
인권문제가 대두되면서 동성애자를 성소수자라고 표현합니다. 동성애자들은 ‘사회의 차별과 혐오를 종식시키고 다양성이 존중받는 문화를 만들겠다’며 매년 서울퀴어문화축제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동성애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오늘 본문으로 해석하면 이들은 하늘에서 임한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원을 소망하지 못하고 심판받아 사라져버릴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보낸 서두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먼저 밝힌 이유는 로마 사회에 만연한 더러운 죄악의 구렁텅이에 있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악에서 벗어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을 당부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로마 문화의 죄악 속에 있는 로마교인을 긍휼히 여겼습니다.
동성애자 그들은 혐오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귀한 존재입니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저버리고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고, 동성애가 마치 하나님의 선물인양 착각하며 살고 있을 뿐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들을 밀어낼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품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포르투칼의 사창가에서 복음사역을 하는 선교사님에게 들었던 이야기인데, 교인 중에 성 전환 수술을 받은 후에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 정체성의 혼돈으로 성 전환 수술을 받은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사라져야 할까요? 누구보다도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 분이 복음을 받아들이기까지 선교사님이 얼마나 오랫동안 관심과 사랑을 갖고 섬겼을까요!

28~32절은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신, 즉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이 우상숭배자와 동성애자 외에도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마음 그대로 내버려 두셨고, 그 결과 이들은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하도록 놓아두셨습니다(28). 다시 말하면 신앙인이라면 해서는 안 될 일들을 기술했는데, 총 21가지입니다.

(29-31)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 21가지 죄를 짓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죄를 알고 있습니다. 도둑은 타인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고, 잡히면 처벌받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둑질합니다.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혼자만 죄를 짓지 않고 죄를 저지르는 다른 사람을 옹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삶을 살도록 유도합니다. 바로 죄의 속성입니다. 죄는 확장성을 갖고 있습니다. 죄를 멀리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죄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코앞에서 와있는데도 모르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하나님을 목적 삼지 않을 때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교인에게 ‘하나님의 진노’로 복음의 포문을 연 이유는 겁을 주기 위해서 아닙니다. 바로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고, 그리스 신들과 로마 황제를 우상으로 섬기고, 성적 쾌락을 추구하며, 심판이 임할 것임을 알면서도 남을 비방하며, 남을 것을 빼앗고, 생명을 도외시하며, 인간의 욕망충족에 목적을 둔 타락한 로마 문화권에 살고 있는 로마 교인을 포함한 로마인들을 향해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에 잇대는 삶을 살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은 당시 로마 시대보다 훨씬 더 혼탁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 속에 있던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나의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진노의 자녀에서 사랑의 자녀로 거듭난 이 사실 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찬양이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초대에 아직 응하지 않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향해 긍휼한 마음으로 다가가서 주님의 사랑으로 품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함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신 주님을 목적 삼고 주님의 의를 이루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참과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만의 우상을 세우고 정욕대로 살고 있던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감사합니다. 말씀이 주님의 말씀임을 믿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믿고 고백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해주시고 주님의 자녀 삼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늘 감사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의 진노 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도록 지혜와 능력을 주시옵소서. 나의 가치관과 신앙관과 다르다고 기피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긍휼함으로 그들을 품고 주님께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을 향한 감사의 찬양이 가득한 오늘 하루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2. 하나님의 진노는 언제 임하나요?
3. 하나님의 진노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4. 본문에서 말한 하나님의 진노가 무서운 이유는?
5.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관계라고 생각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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