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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로마서(새벽)

로마서 3:19-31

로마서 3:19-31
찬송가 260장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



율법이 아닌 새로운 길(19~26절)
로마서는 1:1-17은 서론이고, 1:18∼15:13까지가 본론입니다. 그런데 본론의 내용은 ‘인간의 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경건하지 않은지, 인간이 얼마나 불의한지를 상세하게 묘사합니다. 이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라고 할 수도 있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요약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구원하는 방법은 없다’가 로마서가 규정하는 인간에 대한 평가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 말씀이 1:18부터 이어진 말씀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의 용도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다 지키게 되면 자신이 온전히 의롭게 될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율법은 자신이 얼마나 의인인가를 확인시켜 주지 아니하고,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확인시켜 줍니다. 그래서 율법의 역할은 ‘거울’과도 같고, ‘진단서’와도 같으며, ‘계산서’와도 같습니다.
오물투성이 속에서 살면서도 평생 목욕이나 샤워는 고사하고, 세수도 한 번 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럼에도 자신이 얼마나 지저분한지를 모릅니다. 그냥 옷에 묻은 먼지만 툴툴 털어냅니다. 그렇게 옷을 열심히 털어내면서, 옷을 털지 않는 사람을 정죄합니다. “어떻게 옷도 털지 않고 그렇게 지저분하게 사십니까?” 그런데 어느 날, 거울을 통해서 얼굴을 보았는데, 온갖 오물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서 자신의 본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율법이 ‘거울’과 같습니다. 그 거울을 보면, 볼수록 자신이 얼마나 지저분하고 더러운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옷을 좀 털지 않았다고 정죄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다른 사람의 옷에 있는 먼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럼에도 거울을 아무리 많이 본다고 해서 얼굴이 조금이라도 깨끗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 병원에게 가서 자기 몸 구석구석을 진단했는데, 병들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몸에는 온갖 종류의 암이 있고, 뇌 신경에도 문제가 있으며, 관절 상태도 너무 좋지 않습니다. 진단서에는 몸에 있는 온갖 종류의 질병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그 병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쪽에는 ‘치료 불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멀쩡하게 보입니다. 마치 아주 건강한 사람처럼 근육도 자랑하고, 날씬한 몸매도 자랑합니다. 다른 사람이 팔이나 다리에 피가 나게 되면, “어떻게 몸을 그렇게 관리 하느냐?”라고 핀잔도 줍니다. 그러나 자신의 진단서를 보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역시 그 진단서의 내용이 아무리 자세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치료제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또 자신이 지불해야 할 계산서를 받았는데, 거기에 우리나라 1년 예산 정도에 해당하는 500조 원이 찍혀 있다면,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부자도 170조 원 정도이니 전 세계에서 갚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계산서에 500조 원의 1만 배인 500경 원이 기록되어 있다면, 아마 지구를 팔아도 갚을 수 없을지 모릅니다.
이처럼 율법은 자신은 씻을 수 없는 오염투성이이고, 치료할 수 없는 질병으로 가득하며,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즉 율법은 구원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죄인인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상태가 이러했는데, 21절부터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이제는’이라는 단어로 시작하는데, 헬라어 성경에는 ‘그러나’라는 단어가 더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읽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그러나 이제는’은 1:18-3:20까지에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확인하고, 인정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과도 같습니다. 만약 로마서가 3:20에서 끝났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증거합니다. 세상에서의 의는 언제나 상대적입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국제 경기에서 같은 경기를 두고서 이긴 선수의 나라 사람들과 진 선수의 나라 사람들의 반응은 정반대입니다. 서로 보는 관점이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의 기준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이고 불변합니다. 하나님은 의인과 관계를 가지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준에서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롬 3:10, 20). 그래서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어떠한지 이렇게 증거합니다.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고 증거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사람들이 가진 의는 눈에 보이는 외모나 직업, 학벌, 소유 등으로 차별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됩니다. 거기에 나오는 아브라함, 야곱, 다윗, 솔로몬을 비롯하여, 여인들인 다말, 라합, 룻, 밧세바 등은 사람이 가진 차별적인 의로 하면 아무도 족보에 오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의로 입혀 주셨기 때문에 거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모든 사람은 스스로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오물투성이이고, 도저히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질병(疾病)들을 지니고 있으며, 세상을 다 주어도 갚을 수 없는 계산서를 지니고 있는데, 예수님의 속량으로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속량(贖良)’의 문자적인 의미는 노예를 산 후에 그 증서를 찢어버림으로 그 종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은총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속량을 해 주셨는지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25a)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값없이 은혜를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은혜는 공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은혜를 값없이 받는 것은 받는 입장에서는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는 입장에서는 결코 공짜가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1만 원의 빚을 탕감해 주었다면, 누군가는 댓가 지불 없이 빚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탕감해 준 것만큼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댓가지불 없이 은혜로 용서받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 전부를 주시고 우리의 죄와 맞바꾸신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정말 값비싼 것입니다.

(25b)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길이 참아주시고, 우리의 죄를 간과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이시는 데까지 ‘길이’ 참으셨습니다. 참은 것은 곧 고통이고, ‘길이 참는 것’은 ‘깊이 참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를 깊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책임한 배우자나 속 썩이는 자녀를 길이 참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도 ‘길이’는 ‘깊이’의 동의어입니다. 만약 우리가 길이 또는 깊이 참지 못한다면 깊이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간과, 패스오버(passover), 넘어가 주시는 방법으로 참아주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유월(passover)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 주심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넘어가게 해주시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우리의 의로움을 동시에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죄의 값을 정당하게 치르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사사로이 무죄를 선언하면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장이 되십니다.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그렇게 선고를 받은 사람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게 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로만 판결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아들을 죽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의가 하나님과 우리를 모두 세우는 참다운 의가 됩니다.


이신칭의_3가지 핵심(27~31절)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할 정도의 상태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 주시고, 우리를 길이(깊이) 참아주심으로 우리의 의를 세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의는 우리가 이루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의를 ‘이신칭의(以信稱義)_믿음으로써 칭하여진 의’, 또는 ‘이신득의(以信得義)_믿음으로써 얻게 된 의’라고 말합니다. 27~31절은 이 이신칭의(이신득의)의 세 가지 특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27~28절입니다.
(27-28)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이 의는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이 의를 우리가 이루어 낸 것이면 자랑할 수 있는데,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는 또 다른 표현이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집에 있는 전기 스위치를 올려서 전등이 켜졌다고 해서 내가 전기를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발전소가 우리 집 스위치까지 전기를 언제나 보내주기 때문에 불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발전소가 전기를 보내주지 않는다면 내가 아무리 열심히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스위치를 올려도 전등은 켜지지 않습니다.

둘째는 29~30절입니다.
(29-30)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이 의는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 대해 차별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차별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반대편에 있는 우리나라에까지 복음이 전해지게 하셨고, 우리같이 형편없는 사람을 찾아와 주셨습니다.

셋째는 31절입니다.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이 의는 율법을 파기하지 않고 세웁니다.
율법에 의해서는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이신칭의가 율법을 세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세상’이라고 하면, ‘세상 사람들’을 의미할 수도 있고, ‘세속적인 가치관’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말씀, 제사를 율법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짐승으로 제사를 드리고, 부정한 것을 먹지 않음으로 자신을 구별했는데, 이런 ‘율법의 원리(principle)’는 폐지되었습니다. 또 번제를 짐승을 모두 태워서 드렸고, 소제는 곡식을 곱게 갈아서 드렸습니다. 이런 ‘율법의 예식(ceremony)’도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의 계명(command)’은 주님 오실 때까지 영원히 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 14: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신칭의는 이 계명의 율법을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이신칭의를 입은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잃어버린 자가 되었던 우리를 찾아와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를 찾아와 주신 주님을 힘으로 여기고, 주님과 동행하시는 한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는 율법을 잘 지켜서 과시하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것 자체가 우리를 의롭다고 만들어주지 못하고, 하나님의 한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음과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계명의 율법을 지키는 것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은 잃어버린 자가 되었던 우리를 찾아와 주신 주님의 은혜임도 한 평생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우리의 의이시며, 우리의 힘이신 주님과 동행하는 한 날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우리는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 의는 당신에게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2. 하나님께서는 길이(깊이) 참아주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무엇을 길이(깊이) 참아주셨습니까?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길이(깊이) 참아준 것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의 의는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지금 지켜야 할 계명의 율법은 무엇입니까?
4. 하나님 한 의를 나타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당신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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