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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로마서(새벽)

로마서 8장 1-17절

로마서 8장 1-17절
찬송가 188장 ‘무한하신 주 성령’

생명의 성령의 법(1-4절)
로마서 7장은 그리스도인의 실존적 위기를 그려냅니다. 이 내용이 그리스도인이 구원받기 전의 모습인지, 혹은 구원받은 후의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도 죄와 씨름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7장 6절에서 말했던 “영의 새로운 것”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복음의 정수를 밝힙니다. 즉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다는 아름다운 진리입니다. 로마서 8장은 기독교 신앙의 최고봉, 에덴동산의 생명 나무, 대성전의 지성소, 신약이라는 반지의 보석과 같은 로마서에서도 가장 빛나는 광채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핵심에는 성령님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러므로”라는 단어는 7장 마지막 구절인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와 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5장에서 말한 정죄 및 생명의 논의와 연결된 내용으로서, 보충적인 내용을 다룬 6장과 7장을 종합하여 내리는 결론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망과 부활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 유죄선고를 따라 받아야 마땅한 극악한 형벌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선포입니다. 정죄함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소외되는 버려짐인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그러한 정죄함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를 생명을 주는 성령의 법이 사망을 주는 죄의 법에서 해방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법이란 원리 또는 권위를 뜻하는 말로, 바울은 노모스라는 동일한 헬라어 단어를 의도적으로 법, 원리, 율법, 권위 등의 뜻으로 자유롭게 사용하기 때문에 해석에 주의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8장의 핵심 단어인 성령 또는 영으로 옮긴 헬라어 역시 프뉴마라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문맥에 따라 잘 해석해내야 합니다. 참고로 오늘 말씀에서 2절과 7절에 나오는 노모스는 법으로, 그 외에는 율법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또 한국어 성경에는 영과 성령이 혼재되어 있지만 16절을 제외하면 프뉴마를 모두 성령으로 해석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생명을 주는 성령의 원리와 권위에 속하여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됩니다. 즉 사망을 앞세워 우리를 구속하던 죄의 권위에 복종하던 옛 시대에서 벗어나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새 시대에 살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해방이란 영역의 옮김이며, 시간의 옮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 전혀 다른 시간을 살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의 원칙은 우리를 구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지만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는 큰 대가가 필요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게 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자체는 선한 것이지만 사람을 의롭게 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즉 율법은 죄의 권능을 깨뜨리고 생명을 주는, 고상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우리 죄에 해당하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심으로써,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에게는 율법이 원하는 바인 의로움과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제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육신과 영(5-13절)

(5-8)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바울은 육신과 영을 극단적으로 대비하며 설명합니다. 육신을 따르고, 육신의 생각을 하고, 육신에 있다는 말은 앞에서 말한 육신의 연약함을 상술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속하지 않고서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그 근본적인 독립성이 죄라고 할 때, 육신은 죄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5절에서 말하는 육신을 따르는 자는 사실 8절에서 말하듯이 육신에 있는 자로서, 죄란 행동의 개념이 아닌 존재의 개념입니다. 즉 하나님을 떠난 존재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육신을 따라 살지 말고 영을 따라 살라는 권면이 아니라, 로마에 있는 수신자들이 이미 영을 따르는 자들임을 전제하고 이어지는 논의를 뒷받침하려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욕망이 죽음을 향할 뿐이라는 사실은 두 번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생각하는 선한 것조차도 죽음을 낫는다는 사실을 살펴보면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사망을 향하며,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점을 자명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2절은 사람이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종종 더 나은 것을 생각하고 기획하고 실천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곧 그 생각과 행동이 자신을 검열하는 새로운 굴레가 되는 자기모순을 일으킵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기획이 오히려 사람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현실을 우리는 역사와 나의 삶에서 끊임없이 확인합니다. 사람은 사고하고 행동할수록 방황합니다. 자유, 평등, 박애 등 사람이 꿈꾸는 가치는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그것은 궁극적인 대상입니까?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결과밖에 초래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사람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닌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성령에 따른 생각과 행동만이 평안과 생명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부정으로도 증명이 됩니다.

(9-11)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우리가 거한다고 말했다면 이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고,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고,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구분하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데 그만큼 그에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당연하고도 익숙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상호 내재하시며 상호침투하시는 삼위일체의 영이 우리의 안에 있고, 또 우리가 그 안에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영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프뉴마라고 하는데,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생기 또는 생령을 말하는 단어에 해당합니다. 즉 하나님의 숨결을 지니고, 그 숨결을 따라서 호흡하는 자는 그리스도인이며, 그 숨결을 거부하고 자신의 호흡을 내쉬는 자는 육신을 따라 살아가는 자인 것입니다. 10절에서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라는 구절은 여러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육체의 몸은 죽지만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로 살아서 부활의 생명을 주신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우리의 몸은 죄로 인한 결과로 죽게 되지만, 성령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성령 안에 있는 우리는 궁극적으로 부활시에 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12-13)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이제 바울은 강하게 권면합니다. 우리는 빚진 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 육신에게 빚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이 세상의 권세, 옛 시대의 권세에 아무런 부채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죄악된 길을 계속해서 걷다가 영원한 사망에 들어섰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부르셔서 택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성화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은혜의 부채만이 있습니다.

육신대로 살지 말고 지지 말고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직설법과 명령법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불러주시고, 전적인 주권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며 구원을 베풀어주셨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편에서도 몸의 행실을 죽이며 구원을 이루어가는 일을 해나가야 합니다. 육신대로 살지 말고 육신에 지지 않도록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는 양립할 수 없는 두 명제처럼 들리지만 성경은 두 가지 진리를 동시에 말합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2015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피아노를 연주한다고 의식한 것이 아니라 연주하는 손을 감상하는 느낌을 받았고 그렇게 연주했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예술가가 예술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예술이 예술가를 택해 자신을 발현시키는 것인가 구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술도 성령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면 두 가지 모두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조종하거나 촉매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움직일 때 성령님이 우리를 주동하시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성령의 삶, 영의 삶입니다. 우리가 몸을 움직이지만, 그 움직임을 이어나가시는 하나님의 영을 의식하며 그 흐름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아들됨의 확증(14-17절)

(14-15)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으면 곧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고,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하며 앞서 다룬 논의를 부가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종의 영과 양자의 영을 해석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양자의 영은 당연히 아들의 신분을 공인해주시는 성령님을 뜻하지만, 종의 영을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종의 영 역시 성령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하며, 하나님의 영에 의해 죄를 자각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타난 “종의 의식” 또는 옛 시대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로 봅니다. 종합적으로 파악하자면 성령님은 더 이상 두렵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양자로서 안정감을 주시는 분임을 선포하는 구절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단지 신분의 기계적 변화가 아니라 정서적, 인격적 변화를 이끌어 우리가 아빠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아빠라는 호칭은 정말 아름다운 단어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고통에 신음하고 괴로워하더라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때 말할 수 없는 감격에 휩싸입니다. 아버지 생전에 잘해드리지 못해 산소에 가서 아빠라고 부르며 흐느끼는 그런 호칭이 아닙니다. 언제나 살아계셔서 내 삶을 품어주시는 하나님께 아빠라고 내 모든 인격과 삶을 맡기며 내뱉는 이 단어에는 사람의 모든 언어로도 담을 수 없는 깊이와 무게가 있습니다.

(16-17)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자녀가 되었으면 상속자가 됩니다. 신분의 변화, 정서의 변화에 이어 실제로 누리게 될 완전한 혜택까지도 변화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영, 즉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까지 위로하시고 감동하셔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시켜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먼저 아들 되신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되는 상속자가 됩니다. 하지만 옛 시대와 새 시대의 긴장 속에 머무르고 있는 종말의 시대는 고난을 수반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과 고난 속에 먼저 들어오셔서 우리와 장벽을 없애셨다면,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고난 후에 영광, 죽음 후에 생명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하지만 해가 진 것만 같은 고통과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로 성령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게 하셨고 수많은 믿음의 선배와 동기들을 주셔서 함께 살게 하셨습니다. 영에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로 담대하게 참된 자유와 평안을 누리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육신 안에서 육신을 따라 살던 저희를 불러주시고 성령 안에서 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상속자임을 증거하시고,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 은혜 잊지 않게 하시옵소서. 새 시대에 속하였지만 옛 시대를 살아가는 긴장 관계를 의식하며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오늘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당신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인을 무엇이라고 정의합니까?
2. 우리가 아무리 비천한 삶을 살아도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 근거는 나의 힘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힘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3.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니는 직설법과 명령법은 무엇입니까? 이 신비를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4.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감격했던 기억을 떠올려보십시오. "아빠 아버지"라는 호칭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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